*이 글은 영화 〈라푼젤>을 모티브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人間化 인간화
인간적인 성격을 띠거나 띠게 함
人間 花 인간 화
인간의 모습을 위한 꽃
w.텔레투비
"그래가지고 언제 갈래? 내가 적이 많아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넌 이게 신기하지 않아?"
"그게 왜 신기해, 그냥 꽃인데! 동물이라도 보면 기절하겠네."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 길이 멀었다. 일단 이 구역만이라도 벗어나면, 적어도 죽을 고비쯤은 넘길 수 있을 텐데. 스스로 안 간다고 하고 왕관이나 돌려줬으면. 괜히 왕실 근처에 데려다줬다가는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굴까지 다 팔린 마당에.
"이 세상엔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게 아니야."
"그건 나도 창섭이한테 들어서 알아."
"네 친구 창섭이가 많이 속상해할 텐데."
"…금방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쪽지는 남기고 나왔어?"
내 물음에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남기고 올 정신이 없었어. 말끝을 흐렸다. 어쩔 수 없지, 뭐. 도둑이란 자고로 연기도 어느 정도는 따라줘야 하는 직업이라.
"네 친구 창섭이가 많이 걱정할 거야, 상처도 받을거고. 혹여나 버려졌다고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오해?"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위약금 같은 건 우리 사이에 안 받을게, 어때?"
"……."
"그렇다고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난 너희를 응원하거든."
언제 봤다고 응원을 하겠느냐마는, 사정이 딱하다 싶으니 응원 정도는 진심으로 해주긴 할게. 뒷말은 생략했다. 남들의 사정이 뭐든 간에,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사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어 보였다. 제발 좀 돌아가자.
"안 따라오고 뭐해? 돌아가야지."
"아니야."
아아.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지. 창섭이가 오기 전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겠네."
"……."
"이쪽으로 가면 되지?"
오히려 앞장서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신고 있지 않은 맨발이 눈에 찼다. 아니, 쟤는 무슨 밖에서 신을 신발 하나가 없어.
"야!"
"얼른 안 오고 뭐해?"
원래 이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아니긴 한데.
"너는 무슨 애가 겁도 없이 맨발로."
"…이걸 나보고 신으라고? 이렇게 큰걸?"
"없는 것보단 나아. 발 들어봐."
단단한 곳 어디 밟아보지 않은 연약한 발에 상처 나는 것보단, 내 발에 상처 나는 게 훨씬 낫겠지 싶어서.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발에 신발을 신겨주려고 보니 발목에 있는 흉터가 보였다. 낯설지 않은 흉터는 곧바로 없어진 공주의 흉터와 같음을. 단번에 알아챘다. 명색이 주의력이 깊은 도둑인데, 이런 것 하나쯤 발견 못 할까.
인제 보니 어릴 때의 얼굴과도 비슷했다. 나잇대도 딱 이 정도 되었을 텐데.
"발목 흉터, 언제 생긴 거야?"
설마. 정말, 설마 하는 마음으로. 관심 없는 척 물었다.
"이거 흉터 아니야, 창섭이가 그랬어. 그냥, 점이라고."
"이게 어딜 봐서 점이야? 점은 이게 점이고."
"아니, 점이든 흉터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아, 신이시여.
아무래도 제가 착하게 살아오기는 했나 봅니다.
구역 수색을 위한 군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관자놀이를 짚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왕관을 훔쳐간 몹쓸 인간의 흔적은, 어젯밤 사냥한 뱀파이어들의 짙은 피 냄새로 모두 가려져 있었다.
뒤이어 쉴 틈도 없이 서쪽 구역의 백성들이 흔적도 없이 실종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와서는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뱀파이어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가 저지른 일이라 섣불리 판단해서도 안 됐다. 뱀파이어에게 습격을 당했다면 시체라도 있어야 정상이었으니.
"아니, 누가. 대체 왜? 납치를 하는 거야? 그렇게 할 짓이 없나?"
가뜩이나 요즘 축제준비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보고된 자료를 신경질적으로 넘기다가 이내 내려놓는 정환이었다.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납치하겠어, 말이 안 돼 이건.
"실종자 공통사항은?"
"없어. 그냥 같은 지역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
"시체라도 나와야 뭘 조사하던가 하지. B구역 탐색하다가 시체 나오기만 해봐라, 아주."
"감시 철저하게 해, 구역마다 배치 인원도 늘리고."
"…그것도 그건데."
"또 뭐 있어?"
"…올해가 마지막이라며? 믿어도 되는 소문이야, 이거?"
뭐가? 하고 되물으니 답지 않게 말하는 것을 주저했다. 아니, 소문이 엄청 파다하길래.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답해주기도 전에, 한동안 잠잠하던 공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정환은 익숙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쟤는 왜 또 왔대. 아무 때나 벌컥벌컥. 현식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사실이야. 별 의미도 없는데 돈, 시간에 인력까지 죄다 낭비할 필요가 뭐가 있어?"
"……."
"어차피 주인 없는 왕관 찾겠다고 헛수고 하지 말고, 실종사건에나 신경 써. 폐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어차피 같은 구역 탐색 중이라 헛수고는 아니죠."
새로운 공주는 언제나 현식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에 맞서는 현식 또한 마냥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무서워 정환은 슬쩍 자리를 피했다.
"네 형벌이 끝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내가 조건을 달지도 모르잖아?"
조건이라 함은, 누가 봐도 뻔했다. 새로운 공주는 늘, 이전의 공주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이전의 공주보다 더. 훨씬 많이. 이전의 공주를 찬양하는 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을 돌려놓으려 애를 썼고, 좀처럼 되질 않으면 자리를 박탈시키면 그만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잊히길 바랐다.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공주는 오직 자신뿐임을.
그러나 그는 달랐다. 현식을 제멋대로 하려고 한들, 왕의 무한한 신임을 받는 자로서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죄인 주제에, 건방지게. 도저히 그녀를 잊질 못한다면, 종일 자신과 붙어있으면 됐다. 그녀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잘 보여야지, 나한테."
"……."
"후회하지 않도록."
후회. 후회를 안 한 적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던가.
"괜찮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홀로 남겨진 네가 받았을 고통에 비하면.
인간화
낮에 돌아다닐 때는 인간들 틈에 스며드는 것도 편했지만, 잔챙이들이 달라붙을 일이 없어 특히나 편했다. 이를테면 이 구역 지도자의 앞잡이들이라던가 하는.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찼다. 나의 꽃이, 홀로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B구역을 벗어나 인간의 구역으로 거의 접어들었을 때 수많은 군인의 움직임에 멈춰섰다. 오늘은 무슨 연유로 이들이 이 구역에 들어섰을까. 이렇게 인간과 같은 걸음걸이를 해서는 빨리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여기 무슨 일 났어요?"
"공주의 왕관이 없어졌답니다, 그래서 이러고 있고요."
"공주요? 어떤…,"
"사라진 공주요. 간도 크지, 그 왕관을 훔쳐서 B구역으로 도망갔대요."
"…도둑은 잡혔어요?"
"아마 밤사이에 습격당했겠죠, 이곳으로 도망쳤거든요."
마음이 조급해졌다. 왕실에서 군대를 직접 풀었으니, 그렇다고 10년 동안 찾지 못한 공주를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래도 불안했다. 언제나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연신 벌레들이 꼬이려 했다.
"일반인 통제하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건지…. 얼른 내보내겠습니다."
본능적으로 낯설지 않은 체취에 눈길이 갔다. 분명히 어디선가, 어렴풋이. 어디서 봤더라. 짙은 피비린내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B구역의 경계선에 서 있어서 그런가. 현식의 오더는 곧바로 창섭에게 전달되었다.
"나가주셔야겠습니다, 통제 중이거든요."
어차피 나가려던 길이니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식과 눈을 마주했다. 무려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현식이 저를 알아볼 리는 없었지만. 문득 지난날이 떠올랐다. 불 속에 뛰어들었던 늑대 한 마리. 가엾게도 늑대는 너무 약했고, 악에 받친 인간은 강했다.
"……."
"아시는 분 입니까?"
"..데려와, 신분조사도 해서 보고 올리고."
"예, 알겠습니다."
이번엔 창섭이 더 빨랐다. 현식의 오더가 내려지기 전에, 군인들 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까지.
"대위님, 저 그게…사라졌습니다."
"……?"
"순식간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남은 건 창섭의 몽타주 한 장과 의심뿐이었다.
*
순식간에 생일선물을 준비했다. 빛을 보고 싶어 하는 꽃을 위해 숲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여나 놓치기라도 할까 단단히 묶어서. 좋아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설아, 나 왔어."
하루나 떨어져 있었더니, 그새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새하얀 피부에 푸른 실핏줄이 솟아올랐다. 어서 와서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인기척에도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 진짜 빨리 왔지, 선물도 다 사 왔는데."
숨바꼭질하자고? 저택 가득 공허한 메아리만 울렸다. 어디 숨은 거야, 얼른 보고 싶은데. 보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안 봤어.
"아직 화났어…?"
조마조마했다. 섣부르게 내뱉은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봐. 네가 아파할까 봐서. 불안함에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장난치지 말고 얼른 나와,"
그런데 그 어디에도.
"설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나가야 했다.
.
"됐어, 그만해. 질리지도 않냐?"
"딱 한 번만. 나도 좀 이겨보자!"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도 비장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보다도, 용에게 잡힌 공주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왕자보다도. 몇 배나 더 큰손 안에, 작게 말아쥔 주먹이 겹쳐왔다.
"보리."
"……."
"쌀! 아악!"
또 주먹이 잡혔다고 울상이길래. 은근슬쩍 져주는 척하니 제대로 하라고 난리였다. 새로 알려준 게임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승리욕이 남다른 것인지. 아까는 그네에 꽂혀 종일, 그네만 타고 있을 것 같더라니. 그보다 더 전에는 물놀이에 흠뻑 빠져서는 물장구를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를 키우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좀 쉬었다 가기 위해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오랜 시간 걷는 걸 버거워했던 탓이었다. B구역을 벗어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나란히 잔디에 누웠다.
"뜨겁다, 햇빛."
"햇볕은 원래 뜨거워."
"넌 아는 게 진짜 많구나?"
아는 거라곤 도둑질을 위한, 살기 위한 몸짓밖에 없는데. 괜히 민망해져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못 뜨길래 주머니에 아까 쑤셔 넣었던 현장수배 벽보로 햇빛을 가렸다. 귀하게 자라날 아이였을 텐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왕실에 데려다주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아니, 합리화할 것도 없지. 그게 맞는 일이고 옳은 일이니까.
내가 이렇게 생겼냐?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지 않았어? 하는 물음에 진지하게 벽보와 내 얼굴을 비교하며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아닌데? 이게 더 코가 높아."
"다시 잘 봐."
"졸려. 팔베개해주라."
"뭐? 내가 왜?"
"졸리단 말이야."
오늘 너무 무리했다며 내 품 안으로 들어와서는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대로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도, 얼떨결에 팔베개를 해주게 된 팔도, 숨을 한 번에 들이쉬는 것도 그대로. 그렇게.
한참 뒤에 물었다. 너 끼 부리는 거야 지금?
그새 잠에 들었는지 대답은 못 들었다. 스스로 묻고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밖에 나오는 것 자체를 못 해본,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끼는 무슨. 있는 그대로,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거다. 자고 싶은데 베개가 없으니까.
얼른 벗어나야 하는데. 조금만 더. 거의 다 왔으니까 괜찮겠지. 아주 조금만.
잠에 든 그녀의 머리에서 꽃이 한 송이씩 피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피던 색색의 꽃들은 곧 나를 홀렸다. 꽃에 홀린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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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줄거리 요약: 성재는 설이의 정체를 알게되고! 새로운 공주는 현식이를 가만히 못납두져..우리 식이 멋진건 알아가지고8ㅅ8 그리고 드디어 현식이와 창섭이가 마주쳤네요! but 현식이는 창섭이를 모른다는 것 8ㅅ8 창섭이는 설이가 집 나간 것도 알게되었고. 성재는 꽃에 홀렸고..(흐뭇)
-제 망태기에 많이들 들어와주셨쟈나ㅠㅠㅠ홍일점때부터 달려주신 분들도 있으셔서 넘나 반가웠쟈나여!♡
-♥뚜비/ 파인애플/ 쿠조/ 붕붕/ 람보/ 얏삐/ 피치블러/ 천섭/ 데일리♥ 님덜 싸라합니다. 암호닉 항상 받아요!
-사실 홍일점 때보다 독자님들이 많이 줄어서 걱정도 많이 하고 그랬지만ㅠㅠㅠㅠㅠ 여러분들 댓글보고 힘나서 써요*ㅅ*
-아 혹시 분량이 너무 많은가요...? 적당한가요..? 조금 줄일까여...? (소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