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문현아!!!"
"오, 혜민이 나 마중 왔네?"
"미친년, 뺀질뺀질 해진 거 봐. 미국물을 먹어서 그런가?"
오후 3시. 이곳은 1년 만에 진정한 불알친구인 현아와 혜민이 상봉하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이다. 현아는 대학교에 입학해 학교생활을 고작 1년간 하고는 휴학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었다. 갑자기 유학을 가겠다나 뭐라나…. 한번 생각하면 꼭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현아의 성격이 유학을 떠난다는 신중한 결정에도 그저 가볍게 적용되었다. 1년만 딱 아무 걱정도 없이 다른 나라 가있겠다고 말하고 무턱대고 떠난 현아를 혜민은 말릴 수가 없었었다.
그렇게 현아의 말대로 딱 1년이 지난 지금 혜민과 현아는 상봉했다. 선글라스를 턱 끼고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를 끼고 있었으며 브랜드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현아를 보고 혀를 끌끌 차는 혜민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그저 순박한 시골 소녀였던 년이 언제 이렇게 능글맞게 변했는지 모른다.
"다시 학교로 들어올 거냐?"
"그래야지. 내일 학교 가서 문현아 돌아왔다고 신고해야겠다."
자식. 혜민이 현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1년 만에 맡아보는 한국 공기에 현아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서울 쪽은 공기가 안 좋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이 고국이 주는 느낌은 포근하기만 했다. 혼자서 미국에서 생활해 그런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는가.
"그럼 내일 학교로 바로 가자"
"캬,이게 얼마 만에 와보는 학교야"
"이제 대학생활 열심히 해. 또 유학이고 나발이고 어이없는 말 하지 말고"
혜민이 인상을 찡그리고 말한다. 현아가 없는 동안 어지간히 심심하고 쓸쓸했나 보다. 현아는 웃어 보이곤 혜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 이제 어디 학교나 둘러보실까? 현아는 혜민과 계단을 오르면서 더운지 긴 소매를 걷어 올렸다. 봄이라고 꽃샘추위만 생각했는데 꽃샘추위는커녕 햇살은 따사롭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꽃이 참 많이 피었다. 우리 학교에서 최고 명소로 꼽히는 벚나무 거리는 봄이 오면 환상이었다. 양옆으로 촘촘히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은 꽃이 피었다 싶으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혜민은 교수님을 만나고 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갔고 현아는 저절로 벚나무 거리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벚꽃은 한창 절정이었다. 나무마다 분홍빛 꽃들이 매달려있는데 이곳에 이성과 함께 있으면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눈 돌리는 곳마다 연인들이었다. 아, 이거 외로워서 살겠나…. 미국에서 존이 고백할 때 받아줄 걸 후회하는 현아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그렇게 한창 혼자서 벚나무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눈앞에 나 말고도 혼자서 이 거리를 걷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현아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저와 같은 처지의 동지가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현아의 앞에 있는 여자는 발걸음이 느렸다. 현아는 그 여자를 앞서 가지 않기 위해 그 여자보다 발걸음의 속도를 더욱 늦췄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여자는 민트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이 봄에 어울리는 밝은 색상이었고 무엇보다 그 여자에게 매우 잘 어울렸다. 어느덧 여자는 나무 사이마다 놓여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아는 여자가 자리에 앉길래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지나쳐서 가야 하나 아니면 거리감은 좀 있지만 맞은편 벤치에 앉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바로 옆자리에 앉아버릴까. 현아는 고민하다가 그 여자가 앉은 벤치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손을 보니 되게 하얗다. 분명 얼굴도 하야리라. 민트색 카디건은 소매가 긴 것인지 여자의 하얀 손등에 반을 뒤덮고 있었다. 그 작은 손으로 아까부터 손에 꼭 들고 있던 와인색의 작은 다이어리를 펼쳤다.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꺼내 든다. 오래된 것인지 구깃구깃하고 빛이 다 바래져 있었다. 멀다고는 못하지만 종이에 적혀있는 내용이 보일 만큼 가깝지도 않아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튼 여자는 그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웃었다. 한참을 그 종이만을 보다가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여자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갤 들었다. 잽싸게 눈가를 닦는다. 어, 울었나…? 현아는 살짝 놀라 안보는 척하며 힐끔힐끔 맞은편 여자를 쳐다봤다. 울었나 보다. 여자는 눈가에서 손을 떼고 코를 훌쩍거린다. 순간 현아의 심정께에 누군가가 망치질을 해놓고 달아난 것만 같았다.
"세라… 류세라…."
멍하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그 여자를 쳐다보며 10년을 추억 속에 묻고 살아왔던 소중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세라야, 세라…. 류세라다. 현아의 바로 눈앞에서 눈 끝에 눈물을 매 단체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는 저 여자는 류세라였다. 한동안 현아를 열병에 시달리게 했던 그 사람. 이름 세 글자로도 현아를 설레게, 아련하게 만들었던 그 주인공이 지금 눈앞에 있다. 10년 만이다. 꼬박 10년이 걸렸다.
세라는 들고 있던 종이를 제 옆에 올려놓고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현아는 웃음이 났다. 어째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니 세라야. 세라는 제 무릎에 턱을 괴었다.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꽃잎으로 향해있었다. 10년 전처럼 벚꽃은 눈이 오듯 아름답게 흩어졌고 그것은 세라의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세라는 손을 뻗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 애썼다. 야속하게도 벚꽃잎들은 세라의 손바닥만 지나쳐 떨어졌다. 세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현아는 당장에라도 세라에게 달려가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어? 아…안돼…!"
세라가 무릎을 껴안았던 두 팔을 풀었다. 벤치에 올려두었던 종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 종이는 거짓말처럼 현아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현아는 조심히 팔을 뻗어 발밑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 이걸 가지고 있었다니…. 이 종이는 10년 전 현아가 세라를 그려줬었던 그 그림이었다. 얼마나 펼쳐봤던 건지 종이는 거의 너덜너덜해졌고 빛이 바래있었으며 그림은 거의 다 지워지기 직전이었다. 현아는 종이를 잡고 있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코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저기…. 그 종이 제껀데…."
현아는 잽싸게 눈물을 훔치곤 잔뜩 웃어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종이를 세라에게로 내밀었다. 세라는 현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상했다, 현아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아니, 그냥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현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세라의 모습에 더 당황한 건 현아였다. 날… 못 알아보는 건가? 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속상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세라에게 화도 났다. 날 못 알아보는 거야? 진짜 그런 거야 류세라?
"저기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실 때 쓰는 멘트를 저렇게 순진하게 입 밖으로 뱉어내는 모습에 현아는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바빴다. 진짜구나. 진짜 세라가 날 기억 못 하는 거구나…. 현아는 다시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밀어내고는 가득 미소를 지었다.
"네. 우리 사랑했었던 사이에요"
"ㄴ... 네? 우리… 우리요? 그쪽이랑 제가요?"
세라는 당황했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현아는 그런 세라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라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도록 굴렸다. 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라의 손을 잡았다. 세라는 정말 변한 게 없었다. 작은 손을 덮어버리는 소매 끝도 변하지 않았다. 근데 왜 내 기억은 잊어버린 거니 세라야. 세라는 갑자기 손을 잡는 현아의 행동에 더욱이 놀랐다. 손을 빼내려고 노력했지만, 현아의 손에 꽉 잡힌 손을 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라는 현아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눈이었다. 웃을 때마다 접히는 눈꼬리 같은 거. 분명 세라가 그동안 그려왔었던 사람이랑 닮은 구석이 많았다. 세라는 이제껏 지금 들고 있는 이 종이를 가장 소중히 여겼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는 선명했었는데…. 이 그림 속 주인공이 자신일 것으로 생각했었던 세라이다. 이 그림을 그려준 사람이 누굴까. 누구길래 내가 이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는 거지? 늘 고민해 왔었던 질문이었는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제 옆에 있는 현아가 이 그림을 그려준 사람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그림… 알아요?"
"그럼요. 잘 알죠. 내가 그렸는걸"
세라는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길고 예뻤다. 현아는 세라의 손을 잡고 벚나무 길을 함께 걸었다. 현아는 기분이 묘했다. 그저 추억 속에 묻고 살아야 했던 세라와 10년 만에 다시 벚꽃을 함께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묘하고 벅찼다. 꿈만 같았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랬어요, 벚꽃은."
"지금도… 제일 좋아해요."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너 때문에 좋아하게 됐어요."
"날… 잘 알아요?"
"말했잖아요, 사랑했었던 사이라고."
아…. 세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현아는 웃음이 났다. 진짜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10년 전 개울가에서 현아과 함께 종이배를 띄우던 그 류세라와 함께 10년 전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단지 사랑했었던 사이라고만 설명해야 하는 게 슬플 뿐이었다.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고 비밀번호까지 채워 다시는 들여다볼 수 없게 그렇게 세라를 묻었었는데…. 지독한 열병에 다시 앓고 싶지 않아서 잊어야지, 잊어야지. 잊기 어려우면 억지로 숨겨야지 생각해서 마음속 구석 깊이 넣어놨던 세라에 대한 기억과 감정들이 다시 피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때의 추억들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러다 문득 세라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을까.
"사랑했었던 사이면 나에 대해 얼마만큼 알아요?"
"…."
"나도 모르는 나를 그쪽은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문현아예요."
"…네?"
"네가 사랑했었던 나 말이예요. 내 이름 문현아라구요."
"아…. 네… 현아 씨."
"어머니는 지금 어떠세요?"
세라는 깜짝 놀라 시선을 현아에게로 돌렸다. 제 어머니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현아에게 적잖이 놀란 세라이다. 세라는 현아가 정말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현아는 세라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세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벚꽃잎 하나가 세라의 콧등에 떨어져 앉았다. 세라는 콧등에 붙은 꽃잎을 떼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현아는 가만히 세라를 눈에 담다가 입을 뗐다.
"옛날 기억 찾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