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짠데, 진짜요!"
항상 소란스러운 병원 앞, 보안팀에게 내보내 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웬 환자 한 명이 있었어. 저 진짜 맞다니까요!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이,
"저기 변백현 선생님 아니에요?"
웬 걸...백현이랑 목소리가 너무 닮았다 했더니. 변백현이었어.
"맞는 것 같은데..."
"왜 보안팀이랑 저러고 있지?"
"그러게요."
환자복에 긴 패딩을 하나 걸쳐입은 백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보안팀 앞에서 자기 피알을 하듯 열변을 토하고 있었어.
"저, 백현이한테 좀 갔다가 갈게요. 먼저 퇴근하세요, 수고하셨어요 쌤-."
결국 같이 퇴근길에 올랐던 선생님을 먼저 보내고 종종걸음으로 백현이에게 다가갔어. 무슨 사고쳤니?
"백현..,"
"어, 자기야!"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백현이는 바로 내 어깨를 감싸서 끌어안았어.
"제 아내, 아니아니. 우리 병동 간호사쌤이에요! 저 진짜 여기 레지던트 맞다니까요."
"그럼 잘 아시는 분이 왜 금식 딱지 붙이시고 푸드코트에 오셨어요?"
"내가 먹으려는 게 아니라 포장해가려고 한 거라니까요."
백현이 팔목에 붙어있는 초록색 인식표를 본 보안팀 직원이 팔짱을 턱 꼈어. 우리 병원에서 초록색 팔찌는 금식해야하는 환자를 뜻하고 있었지. 한숨을 뱉어내며 지갑에서 사원증을 꺼냈어.
"제가 밥을 못 먹어서요, 좀 부탁했더니... 죄송해요. 저랑 같이 들어가면 되죠?"
결국 진상 레지던트 대신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백현이를 끄집었고 백현이는 기다렸다는 듯 내 쪽으로 당겨져왔어.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보안팀 직원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백현이를 푸드코트 한편에 세워놓고 머리부터 주욱 훑었어.
"이래도 되는거야?"
주머니에 꾸깃하게 들어가있는 백현이의 불쌍한 수액백과 제멋대로 꼬여서 삼분의 일은 피가 역류해있는 라인을 보며 물었어.
"이거 오늘 자정까진 맞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나온건데... 내과 간호사가 찾으려나? 점심약도 맞았는데, 처방 더 없었는데..."
"아니, 네 몸한테 이래도 되는거냐구."
"나? 왜?"
"피 봐, 피. 아프지도 않아?"
내 말에 당황한듯 말을 더듬던 백현이가 그제야 제 팔에서 잔뜩 역류해있는 붉은 피를 쳐다봤어. 그리고 민망한 듯 스윽 웃으면서 익숙하게 라인을 조물조물,
"얼른 들어가, 이것들아."
내 눈치를 또 슬쩍 본 후 더 열심히 조물조물거려. 그 덕에 역류한 혈액은 다시 수액을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어.
"다 들어갔다..."
다시 투명해진 라인을 보며 백현이는 주섬주섬 주머니에 쑤셔져있던 수액백을 꺼냈어.
"앞으로 폴대 끌고 다닐게..."
"이리줘."
내밀어진 내 손에 백현이는 살포시 제 수액백을 올려놓았어. 잔뜩 꼬인 라인을 풀고 백현이 어깨 높이즈음까지 들어올려서 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다시 백현이 손에 쥐어줬어.
"잘 들어간다, 그치? 자기가 만져줘서 그런가?"
내 눈치를 슬금슬금보며 슬쩍 웃는 백현이를 보니 칭찬해달라는듯 수액백을 제 얼굴 옆까지 올려놓고 있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터지는 웃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더니 백현이도 그제야 활짝 웃어보여.
"밥 먹자, 낙지볶음 먹을까? 좋아했잖아."
"그럴까?"
별로 당기지는 않았지만 수액백까지 주머니에 쑤셔넣고 내려온 백현이의 정성이 예뻐서 고개를 끄덕였어. 낙지볶음이라면 내가 학생시절 이 병원 실습을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던 매뉴였지.
"자기가 낙지볶음먹으면 나도 그거 먹을래."
"넌 해물볶음밥 먹어, 그거 좋아하잖아."
"오늘은 낙지볶음이 먹고싶어. 주문한다?"
낙지볶음을 시켜놓고 헛구역질하며 못 먹을 나를 걱정해서 백현이는 저도 낙지볶음을 시키겠다했어. 그 속내를 다 아는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지. 그런데 오늘은 정말 매콤한 게 먹고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 백현아 주문해놔. 나 행정동 잠시 다녀올게."
"행정동? 왜?"
"나 출입증이 잘 안 먹어서, 마그넷 갈아야될 것 같아."
"내가 다녀올게, 앉아있어. 출입증 줘봐."
"바깥 바람 쐬고 싶어서 그래. 금방 다녀올게."
"그럼 같이 가."
왜? 나 혼자가면 누가 잡아갈까봐 그래? 웃는 내게 백현이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어. 잡아갈 것 같아. 그러면서 내 옷깃을 꼭 붙드는 모습이 귀여워서 또 피식 웃고.
"벌써 어두워졌네."
그러게... 벌써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백현이와 나란히 걸었어. 행정동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었지. 백현이는 그 틈을 타 슬쩍 내 손을 쥐어잡았고 나는 깜짝 놀라서 백현이 손을 털어냈어.
"아이, 왜..."
"환자복 입고, 안돼."
"가운 입어도 못 잡게 하면서..."
잔뜩 시무룩해진 백현이를 보곤 내가 슬쩍 팔짱을 꼈어. 그래, 뭐 내가 사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냥 평범한 환자와 환자 보호자로 생각하겠지.
"뭐야아-."
백현이는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웃어보였어.
"어,어?"
웃는 백현이를 오래 볼 수도 없게,
"응?"
내 눈 앞에 나타난 상황은 백현이 팔을 마구잡이로 흔들게 만들었어. 백현아, 백현아. 내 말에 고개를 든 백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지.
"백현아!"
"어, 어!!"
"빨리 가봐!!"
그러니까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우리의 맞은 편 차선에 세워진 택시에서 내리던 여자가 그대로 철푸덕 바닥에 쓰러져있었어.
"괜찮으세요?!"
백현이가 빠르게 달려가 그 여자를 살폈고 나도 얼른 달려갔어. 쓰러진 여자는 이마에 식은 땀이 흥건했고 아랫배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어. 잔뜩 웅크린 몸에 여자가 짚은 손을 따라 내려갔더니,
"백현아, 임산부 같은데?"
"양수, 터진 것 같은데..."
백현이의 낮빛이 순식간에 변하면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어. 백현이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치마가 눈에 들어왔어.
"아..."
"이알, 이알 콜 해. 얼른!"
아, 아. 응!!! 당황한 내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응급실 내선번호를 눌렀고 백현이는 그대로 산모를 뒤로 눕혔어.
"밑으로 흐르는 느낌 있으셨어요?"
"아...네,"
"배 지금도 아프시고요? 아랫배로 뭉치는 느낌 드세요?"
"..네, 아..."
"언제부터 아프셨아요? 아픈 간격은요?"
"아까...오분마다 아프다가, 병원오는 길에 너무 아파서...아윽,"
"오분이요? 오분간격으로 아팠던 게 언제에요?"
"두시간...전, 아..."
두시간 전에 오분간격으로 아팠다는 말에 백현이와 나는 사색이 됐어.
"이알이죠? 여기 행정동 앞인데요, 30대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가 쓰러져있어서요. 임신 중이시고요. 구급차 빨리 보내주실 수 있나요? 알오엠(양수파막) 의심되어서요."
내 말에 휴대폰 속 간호사의 목소리는 다급해졌어. 전화 너머로 들리는 앰뷸런스 행정동 앞이요-! 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당황스러워하는 간호사의 네? 하는 목소리.
-선생님, 저희 원내 대기 앰뷸이 없어요!!!
"네?!"
-어떡하죠, 산모 알오엠 확실하나요?
"백현아, 확실해?"
내 말에 백현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산모의 아랫배를 짚었어.
"혹시 배변감 있으세요?"
"배변감이요? 대변... 나올 것 같은 느낌은 있는데,"
"전화기 좀 스피커로 돌려서 바꿔줘."
응, 내가 얼른 휴대폰을 스피커로 돌려서 백현이 얼굴 앞이 가져다 댔어.
"GS 전공읜데요, 산모 알오엠 확실하고 액티브까지 들어선 것 같아요. 배변감 느껴진다고 말하는데...앰뷸 없나요? 여기서 이알까지 너무 멀어요."
-앰뷸이 지금 다 콜받고 나가서요, 업체 앰뷸은 불러도 여기까지 오는데 십분은 걸릴텐데요...액티브면 얼른 분만장 옮겨야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OB(산부인과) 의사라도 좀 보내주세요, 빨리요."
-잠시만요, OB콜 해주세요!!!
간호사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어.
-선생님, OB 전부 오피 들어갔다는데요....OB 인턴쌤이라도 빼내서 보낼까요?
"하...인턴..."
백현이가 머리를 짚었어.
-일단 이동 베드 행정동 앞으로 보낼게요! 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멸균 장갑이랑 시저, 캘리, 멸균 포 이렇게 보내주세요 일단."
-네, 쌤. 지금 보낼게요!
백현이의 전화가 끊기고 삼분정도 기다렸을까, 덩치 커다란 보안요원 두명이 본관 쪽에서 베드를 끌고 거의 날다시피 달려오는 게 보였어.
"여기요!!!"
내가 손을 휘적였고 백현이가 얼른 뛰어가 멸균장갑부터 챙겨 빠르게 손에 끼우며 산모에게 달려왔어. 장갑 낀 손을 바로 산모 치마 속으로 넣어 이리저리 만져보던 백현이는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버렸어.
"백현아, 왜?"
"...아기 머리가 나왔어."
"뭐? 진짜?"
"거기, OB인턴이에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두손 가지런히 모으고 서있는 인턴에게 백현이가 물었어.
"네, 네..."
"와서 내진을 해보든지, 뭐라도 좀 해봐요."
"그게...선생님..."
"뭐해요? 거기 서서 애 받을거예요?"
"제가, 엊그제 들어와서..."
아아, 백현이가 한숨을 폭 내쉬었어.
"내진 한 번도 안해봤어요?"
"네..."
"그럼 옮겨요. 베드 끝까지 내려주세요."
보안요원이 끌고온 베드를 급하게 쭉쭉 내렸고 한껏 낮춰진 베드 위로 백현이와 인턴이 산모를 들어 올렸어. 끄응, 하며 베드위로 올라간 산모는 본격적으로 아랫배를 부여잡기 시작했어.
"으윽,"
"배에 힘주지 마세요, 애기 숨 못 쉬어요."
백현이 말에 산모는 애써 힘을 빼려 노력하는 듯 했지만 쉽지 않아보였어. 응급실로 달려가는 베드를 붙잡고 백현이는 몇번이고 치마 속을 들여다보며 손을 넣었어.
"인턴쌤, 이리와봐요."
"네? 네!"
"교과서 내용은 알죠?"
"아, 네!"
"여기 봐요, 급속분만 같은데. 맞아요?"
"여기만 봐서는...경부 개대 속도도 봐야해서..."
"처음봤을 때 아기 머리 안 보였는데 오분만에 보였어요. 지금 아기 빼야되는 거 맞아요?"
"오분이요?!"
"빨리 대답해요, 아기 숨 못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지금, 빨리!! 빼야돼요!"
"인턴쌤이 받을 수 있어요? 저 GS에요, 3년 전에 아기 한번 받아본 이후로 한 번도 없어요."
"저는 26년동안 한번도 못 받아봤어요...어, 어, 선생님!!!"
인턴의 다급한 목소리에 백현이가 달리는 침대 앞에서 치마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빠르게 벗은 뒤 새 장갑을 뜯어 손에 끼웠어.
"캘리 들어요."
"네!"
"...그건 캘리가 아니라 시져에요. 자기야, 빨리. 나 좀 도와줘."
결국 백현이는 인턴을 포기하고 나를 불렀어. 얼른 백현이 옆으로 달려가 캘리를 양 손에 쥐었어.
"알지? 캘리 두개로 찝는 거야. 인턴쌤은 지금 들고 있는 시져로 컷 하면 돼요."
백현이의 빠른 말이 뱉어지기 무섭게 백현이 손에는 아기 머리가 놓여있었어.
"어, 어..."
당황할 틈도 없이 백현이는 아기 어깨를 잡아 한번에 스윽 빼냈고,
응애-
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응급실 문앞에서 터져버렸어. 나는 재빠르게 캘리로 탯줄을 잠궜고 다행스럽게도 인턴은 시져로 컷을 완벽하게 해냈지.
"딜리버리 산모 들어갑니다-!"
응급실 간호사가 다급하게 베드를 끌며 응급실 안으로 소리쳤고 백현이는 응애응애 울고 있는 아기를 안고 먼저 응급실로 뛰다시피 들어갔어. 미리 준비되어있는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지는 아기를 본 뒤 산모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흐끕..."
"선생님? 울어요?"
옆에서 피 묻은 시져를 손에 쉰 인턴이 훌쩍거리고 있었어. 아니, 뭐했다고 울어?
"울지말고, 선생님...누가보면 애 아빤 줄 알겠어요."
"으에에엥...선생님..."
"자, 눈물 닦아요. 얼른."
내가 건네는 휴지로 얼굴을 벅벅 닦은 인턴은 인큐베이터로 달려가 아기를 보고 있는 백현이 등 뒤에서 아기 한번 보고, 눈물 한번 닦고를 반복했어.
"아기 괜찮아?"
"응, 아기 얼굴에 멍 든 것 빼고는."
"멍이야 뭐... 없어지니까."
"그치, 아이구, 아이구. 눈 떴어요? 자기야, 얘 봐. 요즘 애들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번쩍번쩍 뜬다?"
백현이는 포에 돌돌 싸여있는 아기가 귀여운 지 한참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어.
"그리고 자기이-"
그러다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 백현이가 아랫입술을 쭉 내밀며 입꼬리를 올렸어. 인큐베이터 밑에서는 내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는 것이 느껴졌어.
"아까 진짜 잘했어, 내가 너무 몰아쳐서 정신 없었지? 미안해."
"애가 나오는데 몰아쳐야지 뭐...느릿하면 되나."
"우리는 정말 환상의 조합이야, 그치?"
"네가 다 해놓구선...그런데 너 내진할 줄도 알아?"
"사년전에 한번 해보고 처음이야, 나 진짜 떨렸어."
"그게 기억이 나?"
내가 신기하다는 듯 백현이를 쳐다보자 그냥 머리를 긁적거렸어. 나는 엊그제 배운 것도 기억 안나던데...백현이는 학부 때 배운 걸 기억하다니.
"쟤 왜 저래?"
컴퓨터 앞으로 나온 백현이가 그제야 아기 앞에서 훌쩍거리는 인턴을 발견했어.
"몰라, 아까부터 울던데."
"맹한 게 마음은 여리네."
일 못한다는 말을 빙빙 돌려 말한 백현이가 스테이션 위에 놓인 휴지를 몇 장 뽑아서 인턴에게 다가갔어.
"흥-해요."
백현이는 습관처럼 인턴 코에 휴지를 가져다대며 흥해요.라고 무심하게 말했어.
"크..흡,"
"코 먹지말고 흥하라고."
"큽..흥!!!"
깔끔하게 흥!!!한 인턴이 여전히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백현이를 쳐다봤어.
"실수한 거 말 안할테니까 괜히 말실수했다가 걸리지 말고, 그만 울어요."
저 인턴이 여자였으면 나는 조금 질투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다정한 백현이었어. 후배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백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인턴은 눈물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지.
"산부인과 절대 안 가겠네? 어디 가고 싶어요?"
"산..산부인과요..."
인턴의 말에 백현이는 몇 초간 말이 없었어.
"산부인과...그래요, 꼭 좋은 의사 되길 바랄게요."
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토닥토닥 두어번 두드린 백현인 얼른 내 쪽으로 걸어왔어.
"자기야..."
기운 빠졌다는 듯 잔뜩 울상을 지으며 뚜벅뚜벅 다가오는 백현이를 보니 이제서야 그 몰골이 눈에 들어왔어.
"어, 어..."
다가오는 백현이를 반사적으로 막았어. 내 두손에 틀어막힌 백현이가 왜?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
"옷..."
백현이는 내 말에 제 몸을 위아래로 스윽 훑었어. 환자복을 입고있다 아기를 받은 탓에 피범벅이 된 환자복은 정말 처참해보이는 광경이었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은 백현이는 주머니에서 아직도 빵빵한 수액팩을 꺼내 쓰레기통으로 던졌지.
"다 꺾였네."
손등에 붙어있던 반창고도 재빠르게 떼내어 쓰레기통에 던진 백현이는 옆에 있던 카트를 열어 새 반창고를 꺼내 손등에 척척 붙였어.
"여기서 갈아입고 올라가야겠네, 그치?"
응. 그래야될 것 같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현이는 스스로 척척 잘도 말을 들었어. 응급실 한켠에 있는 환자복 더미에서 제 사이즈를 찾아서 화장실로 쪼르륵 달려가더니 깔끔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지.
응급실을 빠져나와 나란히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며 이제 조금씩 불러오고 있는 아랫배를 살짝 어루만졌어.
"백현아, 우리 애랑 아까 네가 받은 아기랑 친구겠다. 그치?"
"그러네, 우리 아가는 엄마 힘들게 하지말고 나와야할텐데."
볼록하게 나온 배가 신기한지 백현이도 내 배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어.
"귀여워..."
"아, 어제 수선생님한테 임신한 거 말씀드렸어."
"잘했어, 이제 숨기지도 못하겠다."
그래서 밤근무가 싹 빠지고 항암제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되었지. 백현이는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활짝 웃어보였어. 늘 내가 나이트근무를 나갈 때마다 불편한 내색을 하곤 했는데 이제 그럴일도 없어진거지.
ㅡ
"잘자, 백현아."
집에 가지 않는 내 덕에 백현이는 1인실 병실에 자리가 나자마자 바로 옮겨버렸어. 일인실의 침대가 넓은 덕분에 오랜만에 백현이 팔베게를 하고 누워 허리를 끌어안은 후 잠이 들었고, 그렇게 잠에 든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번쩍 떠졌어. 옆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다섯시간 남짓하게 자다가 깬 모양이야. 아직 동이트지 않아 깜깜한 병실에 나만 눈을 꿈뻑꿈뻑 뜨고 있었지.
바나나 먹고싶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이었어. 꿈속에서 바나나가 먹고 싶어 냉장고를 열어 바나나를 꺼내 손에 쥐었는데, 그 순간 잠에서 깨버린거지. 차마 입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그냥 입맛만 다셨어.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동이트면 나가서 사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선.
"...깼어?"
내 바스락임에 백현이도 잠에서 깬 건지 등을 돌리고 있던 내 뒤에서 살짝 끌어안아왔어. 내 어깨에 턱을 올린 백현이가 뭐라 웅얼웅얼거렸어.
"뭐라고, 백현아?"
"왜 깼어...잠 안와?"
"아니이, 다시 자려고. 얼른 다시 자."
"...거짓말, 목소리 보니까 잠 다 깼는데, 뭘."
아니야...내가 일부러 잠이 오는 척 몸을 돌려 백현이 품에 파고들었어.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다시 잘 수 있는 건지, 잠이 완전히 달아나버린건지 구분하는 백현이에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지.
"안 어지러워?"
백현이가 내 뒷머리를 다정하게 쓸어내렸어. 내가 밥을 잘 먹지 못할 때 부터 백현이가 습관처럼 물어오던 질문이었어.
"오늘부터 철분제 먹자, 안 어지러워도."
알았어. 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어.
"꿈에서 바나나 먹었어?"
"응?"
갑작스런 백현이의 질문에 나는 품에서 떨어져나와 눈을 동그랗게 떴어. 내 꿈 어떻게 알았어?
"아까 자면서, 바나나...하던데."
"정말?"
"응. 바나나 먹은거야, 못 먹은거야?"
"못 먹었어. 먹으려고 했는데 깼어."
"냉장고에 바나나 있어. 먹을래?"
"응?"
두번 놀란 나는 바나나?하고 되물었어. 웬 바나나?
"지금 먹을래?"
내가 멍하니 눈만 꿈뻑거리고 있자 백현이가 침대에서 내려가 냉장고를 열었어. 정말 그 안에는 노란 바나나 한 송이가 놓여져있었어. 바나나 한송이와 바나나 우유를 꺼내 침대 탁자 위에 올려놓는 백현이를 입만 쩍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지.
"언제 샀어?"
"어제."
"거짓말 하지마, 어제 밤에 물 넣을 때 아무 것도 없었는데."
내 말에 백현이는 또 뒷머리만 긁적였어.
"우유랑 같이 먹어. 목 메여."
껍질을 까서 내 한 손에 쥐어주곤 빨대도 우유에 톡 꽂아서 내민 백현이가 연하게 웃었어.
내가 잠꼬대로 바나나를 말하는 걸 보고 새벽에 나가서 이것저것 사가지고 들어왔을 것이 틀림없었어. 미안함에 먹지도 못하고 눈썹만 잔뜩 늘어뜨리고 있으니 백현이가 빨대로 내 입술을 톡톡 쳤어.
"얼른 먹어, 꿈에서 못 먹어서 얼마나 서러웠어."
"아침에 사오면 되는데..."
"아침에 다시 입맛 떨어지면 어떡해. 먹고싶을 때 먹어."
"미안해..."
왜 자면서 그런 말을 해서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왼손에 쥐고 있던 바나나를 한입 오물오물 베어먹었어.
"맛있어?"
목이 메여서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어.
"우유도, 천천히 먹어."
목 메일까봐 함께 사다준 바나나 우유를 먹어도 내 목은 여전히 뻐근했어. 살면서 먹은 바나나 중에 제일 맛있는 바나나인 것 같아, 백현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백현이를 쳐다보니 뿌듯하다는 듯 백현이는 웃어보였어. 이 때부터였을거야. 입덧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린게.
ㅡ
댓글로 간간히 간호학과 질문 많이 주셔서 한번에 모아봤어요'_' 답글 달 때도 있었는데 못 달았던 댓글도 많았을거예요ㅠㅠ답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Q.문과인데 간호학과가면 못 따라가나요?
1학년 전공필수과목 해부학, 생리학, 미생물학, 생화학 중 해부학은 문/이과 상관없이 어렵고 저와 동기들 판단으로 의하면 생리학이랑 생화학에서 문과는 헬게이트를 맛봅니다...문과가 "이게 뭐야?" 하면 이과는 "이걸 몰라?" 하는 정도의 차이가 나요. 저희도 동기 중 이과출신 한 명이 시험기간에 도서관 앞에서 보충수업 해줬던 기억이 나네요...하지만 이 세 과목만 지나면 문과라고 뒤쳐지고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오히려 의사소통술이나 정신간호 등을 배울 때는 문과가 더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많답니당.
Q. 간호학과 가려면 성적 어느 정도 되어야하나요?
이건 정말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가 없어요! 꼬잉또오잉이 다니는 학교 간호학과 가려면 어느정도 되어야하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저나 동기들 수능성적 참고해서 알려드리겠지만, 이 세상에 간호학과는 많고 학교 스펙트럼도, 성적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어요. 그리고 저는..수시라서...개인적으로 깊게 알아보심을 추천드립니당^_^
Q. 간호학과 많이 힘드나요?
저~엉말 힘들어요. 힘들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하세요. 저는 간호사가 정말 하고 싶어서 간호학과에 진학한 케이스지만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어요. 갈수록 힘들고 산 하나를 넘으면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어요. 타과 보다 많은 전공공부+이수해야하는 필수교양+핵심교양 교수님의 자비리스+우리가 자기 수업만 듣는 줄 아는 전공교수님+인간관계 파괴의 산물 조별과제+삼학년부터 시작되는 실습과 수업의 연속(실습한다고 수업 안하는 거 절대 아님^_^)이 여러분을 차츰차츰 맞이해줄거예요.
Q. 그래도 취업 잘 되잖아요!
취업 잘 되는 것에는 이유가 따르는 것...하지만 확실히 간호학과에서 떠먹여주는 것만 꿀떡꿀떡 받아먹다보면 취업은 다 되어있긴 합니다. 하지만 떠먹여주는 밥을 삼키는 것 자체가 괴롭다는 것...꼭 기억하세요.
Q. 진짜로 간호사랑 의사랑 많이 러부러뷰하나요?
생각보다 많이 만나진 않는데, 꽤 있어요! 보통 회사에서 사내커플 생기듯이 생기기도 하고 병원 내 동아리도 있고, 소개팅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시절부터 의대간호대 연합 동아리가 있어서... 실제로 저도 실습하다가 만난 의대생이랑 만났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있었던 썰도 넣는다고 넣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하네요. 하지만 백현이같은 의대생은 꿈꾸지도 말 것...^_^
Q. 이 글 보고 간호학과 입학했어요 축하해주세요^_^
축하드려요! 그럼..안녕...
정주행 그만훼!!!!!!!ㅠㅠ 나도 낯뜨거워서 못 읽는데... 여러분 항마력 어마어마한 것 ㅠㅠ
늘 따뜻하고 다정한 리플 너무나 감사하게 받아보고 있어요. 하나하나 답해드리지 못함에 죄송하고 항상 이 따위 텀으로 돌아와서 미안합니다...ㅠ_ㅜ
+그리고 보고싶으신 이야기 있으면!!!!!리플 달아주세요!!!!!달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