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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일찍 등교한 미나가 학교 정문 앞의 신문 한더미를 품에 안고는 교무실로 향한다. 학교에서 정기구독하는 경제신문을 교무실 바로 앞 원형 테이블에 전시해놓는 일은 비공식적인 미나의 일이었다. 신문을 감싸고 있는 비닐을 깔끔하게 뜯어내고는 한 부를 손에 들고 바로 아래 층의 교실로 향한다. 미나의 교복 치마속 교실 열쇠 주머니가 짤랑하고 소리를 낸다. 본래 숙직실 옆 열쇠 보관함에 두는게 원칙이었으나 미나가 가장 먼저 등교해 교실의 문을 연지 한달 쯔음이 되던 날부터 열쇠를 소유할 비공식적 권리를 얻게 되었다. 삼십분 정도 가운데 줄 맨 앞자리에 앉아 경제신문을 정독하다 보면 반 아이들이 하나, 둘씩 등교를 하게 되고, 신문을 읽은지 사십오분 쯔음이 되면 선생이 조례를 시작하고는 했다. 일이분의 차이는 있었으나 기본적 틀은 미나가 입학하고 변한적이 없었다.

 

  미나가 학급 반장, 또 학년이 올라서는 전교 회장을 맡게 된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모난데 없는 성격, 조용하지만 강단있는 행동, 전교 1등, 그리고 그런것들이 없어도 괜찮을 만큼의 미모. 예쁘고 공부 잘하고 성격 괜찮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미나는 어쩜 저렇게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을까? 언젠가 같은반 아이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었을때 미나는 스스로 생각해보았다. 성격이 좋다고 비춰질만큼 선행을 했었나 하고. 딱히 떠오르는 미담은 없었으나 미나는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하게된 배경을 이해했다. 이 세상은 더럽게 외모지상주의라서 예쁘고 잘생긴애가 그냥 그저 그래도 성격 좋다 착하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추앙해주니 말이다. 아마 자신에게 성격 좋은 반장이라는 말이 붙은것도 비슷한 맥락이겠지. 딱히 아니라고 손사래 칠것도 없어서 미나는 그냥 한번 웃어주고는 말았다.

 

  대체로 공부하는 분위기인 미나의 반이 시끄러워질 때는 단 두가지의 경우 뿐이었다. 하나는 심자가 끝나고 아이들이 분주히 짐을 쌀때 였고, 또 다른 하나는 반 아이가 공개고백을 받을때 였다. 시커먼 남자애들이 우루루 반으로 찾아와 손채영 어디있냐며 소리를 지를때만 해도 미나는 그쪽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곧 맨 뒷자리에 있던 반 아이 하나가 비척비척 복도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올땐 결국 미나는 집중하고 있던 인강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 했다. 그러고 보니 손채영이라는 애 엄청나게 공개고백을 받는구나. 남 일에 관심 없는 미나가 기억하는것만 해도 벌써 네번째었다. 대체 어떻게 생긴 애일까 궁금증이 치솟아 미나는 채영이 다시 교실로 들어올때까지 뒤를 돌고 뒷문을 지켜봤다. 복도가 약간 소란스럽다 싶더니, 일순간 조용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곧 나무문이 밀리는 큰소리와 함께 채영이 비척비척 교실로 들어온다. 감흥없는 표정이 지친듯도 하고 질린듯도 해보였다. 비록 맨 앞과 맨 끝이지만 대각선으로 위치한 자리었기에 노골적으로 채영을 쳐다보는 미나와 채영이 얼굴을 마주보게 된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미나를 채영도 같이 바라봐 주었는데, 미나가 넋이라도 놓은듯 자신을 쳐다보자 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풋 웃었다. 살짝 당황한 미나가 고개를 돌려 인강을 틀었다. 인강 속 칠판 앞의 선생님이 그래프를 그리며 무어라 말하는데, 미나의 눈과 귀는 이미 뒷자리의 채영에게 점령당한지 오래다. 사실 미나 본인 또한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자였다. 그랬기에 채영에게 눈길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 반에 저렇게 생긴 애가 있었나? 남은 심자시간 내내 채영을 생각하던 미나는 결국 그날 정해놓은 공부량을 그대로 날렸고 생애 첫 보충을 들어야 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채영의 인생에서 이 문장만큼 와닿는 글은 없었다. 항상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 지각하는것도, 조퇴하는것도, 결석하는것도, 술마시는것도, 담배 펴보는것도 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물꼬를 트면 미친듯이 하게 되어있다. 언젠가 술을 잔뜩 처마시고 개똥철학을 늘어놓았을때 친구가 해준 한마디가 왜 지금 떠오른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정말 제멋대로구나. 그렇게 말하던 친구의 얼굴은 사실 흐릿한데, 그 목소리는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너 정말 제멋대로구나. 너 정말 제멋대로구나...하고.

 

  채영은 딱히 어떻게 살아야겠다 하고 살아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명문대에 입학하여 출세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술처마시고 담배피고 결석 밥먹듯이 하고 삐딱선 타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후자의 인생을 살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맹세코 무언가에 대한 반항으로 탈선을 한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하다보니 그리 된것일뿐. 다행인점은 항상 부모님의 자비가 닿는 바운더리 안에서만 제멋대로 굴었기에 모든걸 청산할 여지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무언가가 단단히 수틀렸다. 채영에겐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다. 그냥 평소처럼 적당히 술을 마셨고, 적당히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서 이곳 저곳을 들쑤시다가 집에 귀가할 예정이었건만. 하필 자동차와 가벼운 접촉사고를 내버린 오토바이 앞자리 무면허 오빠를 따라 생에 처음으로 들어선 경찰서에서 채영은 진지하게 짧은 생에를 돌아보게 되었고, 경찰의 연락을 받고 하나뿐인 외동딸을 찾아 변호사와 동행한 부모님의 얼굴을 본 순간 채영은 이유모를 눈물을 뚝뚝 흘려야했다.

 

  아빠의 재규어xf를 타고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채영은 엄마로부터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 시킬테니 그렇게 알라는 통보를 들어야 했다. 신용카드 정지, 외출 금지 같은 강력한 제제를 당할줄 알았던 채영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판결이었다. 사실 양아치들과 술처마시는 생활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냥 알았다는 의미로 침묵을 지켰는데, 부모님의 눈에는 자꾸만 심하게 엇나가는 채영이 머지않은 미래에 임신을 했다고 생양아치의 손을 잡고 결혼하겠다는 막장드라마같은 광경을 연출할것만 같아 결국 채찍을 놓고 당근을 꺼내들었다. 고등학교 성실하게 다녀서 졸업만 하면 하고싶은거 다 시켜줄게. 카페 하고싶으면 하나 차려주고 직장 일년만 착실하게 다니면 저번에 보여준 건물 증여라도 해줄테니 제발 뭘좀 열심히 해봐. 그렇게 말하는 아빠의 말에서 간절함이 느껴져서 채영은 멋쩍게 웃었다. 내가 좀 심하게 막 살긴 했구나. 그래 뭐 학교 다니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어? 앞으로 본인에게 닥칠 미래도 모른채 채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살면서 처음으로 지각하지 않고 종례까지 해보고 하교를 하는길에 채영은 난생 처음으로 양아치 무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할뻔 했다. 그만큼 학교생활은 개같았다. 엄마는 어디서 이런 찌질이 학교를 찾은건지 채영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책에 존나 섹시한 남자 알몸 사진이라도 있는건지 반 아이들은 자리에서 꼼짝을 않고 책만 쳐다보기 바빴다. 숨막히는 공부 분위기에 채영은 할 줄 아는것 없이 숨쉬기 운동만 하루종일 해야했다. 그럼 예쁘고 잘생긴거라도 볼까 싶어서 교실 밖으로 나가도 눈요깃거리가 될만한 인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썅. 술 잘마시고 담배 잘 피는 양아치들은 그래도 와꾸는 괜찮았는데. 이럴거면 차라리 유학 가겠다고 할걸. 하지만 이제와서 미국이던 캐나다던 가겠다고 빼액 우겨봤자 신이 나서 과외 선생님을 찾고 있는 엄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이었다. 내 인생 어디서부터 꼬여버린걸까? 그냥 원래 하던것처럼 깽판이라도 쳐볼까 싶었는데 같이 깽판칠 사람도 없었고, 또 고분고분하게 사는것과 비례하게 늘어나는 통장잔고와 각종 옷 가방 악세사리들이 나쁘지 않았기에 그저 그렇게 사는 중이었다. 졸업하면 전에 매장에서 봐뒀던 스포츠카라도 한대 뽑아달라고 해야겠다.

 

 

 

 

 

 

 

 

  처음이 어렵지 그 후는 쉽다고 믿었던 채영에게 처음으로 좌절감을 준것은 공부였다.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래도 계속하면 쉬워질거라고 믿었다. 근데 그 후로도 꾸준하게 어려웠다. 이딴거 안해, 하고 수학 교과서를 베개삼아 꿀잠 잔 다음날 채영은 엄마로부터 등짝 스매싱을 오지게 처맞아야했다. 이미 담임과의 핫라인이 형성된건지 뭔지 채영의 엄마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채영의 학교 생활에 밝았다. 제발 뭐라도 하려는 의지를 보여달라며 과외선생님은 원하는대로 붙여주겠다는 엄마에게 아직 유학의 ㅇ도 꺼내지 못한 채영은 그냥 알겠다며 얼버무렸다. 뻐킹. 제대로 수업을 들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집중을 해도 초딩때부터 수포자였던 채영에게는 무리었다. 인수분해 간단하니까 넘어갈게 괜찮지? 소인수분해도 못하는 채영에겐 전혀 괜찮지 않았다.

 

  3반 전학생이 엄청 예쁘다는 소문이 돌고 돌아 채영의 귀에까지 들어왔을때 채영은 제발 그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사실 채영이 전학을 올때 다른 친구 한명도 같이 전학을 왔다. 시들시들한 채영의 반응에 금세 식어버려서 그렇지, 한번에 두명이나 전학을 오는게 사실 흔한 일은 아니라 며칠간은 꽤 주목을 받곤 했다. 2년만 조용히 지내면 졸업이니까 수학공부나 좀 하고 살려고 했더니 되도 않는 소문이 나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문까지는 괜찮았다. 얼굴 예쁘다는 소리는 채영이 아주 어려서 자아가 채 형성되기 전부터 수없이 듣던 말이니까 오글거리는 상황에도 내성이 생겨서 괜찮았고. 근데 사건은 그 후에 터졌다. 생각이 없는건지 뭔지 말한마디 해본적도 없는 남자새끼들이 채영에게 공개고백을 해오는 것이었다. 손채영 나와! 뒷문을 벌컥 열고 채영이 나갈때 까지 소리를 지르는 통에 채영이 비척비척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면, 남자애들 열댓명이 자신을 둘러싸고 받아줘! 받아줘! 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 좆같은 상황이 채영은 빌어먹게 싫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서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어쩔줄 몰라하는 남자애의 면전에 심한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으나 아직 자신의 본 모습을 모르는 찌질이 학교 학생들의 얼굴에 서린 묘한 기대감을 망칠순 없었으니 채영은 그저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 단호하게 거절을 해야만 했다는걸 채영은 네번째 공개고백을 받는 그 순간 문득 알아챘다. 좆같다. 자기랑 사귀어 달라고 구구절절 짝사랑 일대기를 늘어놓는 이름모를 남자애의 면전에 대고 미안하다 한마디만 던진 채영이 꽤 신경질적으로 뒷문을 열었다. 이게 자신의 불쾌감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한것이란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멍청한 남자놈들이 알아먹을진 미지수다. 비척이며 자리에 앉아서 잠잘 준비를 하는데, 앞자리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낯뜨겁게도 노골적이라 누군가 싶어 한번 쳐다보는데, 채영은 그 순간 유레카를 외치며 탕을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가 될뻔 했다. 이 척박한 학교에 저런 얼굴이 있었나?! 환희와 당황을 애써 감추고 채영 또한 같이 예쁜 아이를 쳐다보는데, 전혀 당황한 기색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이대로면 심자가 끝날때까지도 둘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어서 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제야 정신을 차린건지 뭔지 급하게 고개를 돌린 예쁜 아이가 다시 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인강을 보기 시작한다. 채영도 다시 책상에 담요를 깔며 잠잘 준비를 마쳤다. 아직 심자 끝나기 까진 한시간 넘게 남았는데 여자애를 본 후로 잠이 달아나버렸다. 왜 저런 얼굴을 이제야 발견한거지. 사실 아까까지만해도 양아치 애들의 와꾸가 조금 그리웠는데 예쁜 아이를 본 후로는 기억도 흐릿하다. 존나 잭팟. 연쇄 공개고백의 좆같음이 한순간에 씻겨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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