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우체국
written by. SKAT
***
어느 날 골목길을 돌았는데 그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가게 하나가 나타났다. 작은 쇼윈도 안에 갖가지 모양의 초콜릿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초콜릿 가게인 듯했다. 쇼윈도 옆에는 오렌지 빛깔의 문이 있고, 우체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우체국에 왜 쇼윈도가 있고 초콜릿 같은 걸 전시해두었을까, 초콜릿 가게에 왜 우체국 마크를 붙여두었을까, 둘 중 어느 쪽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게 앞을 지나간 건, 그해 들어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
딸랑-
늦은 오후. 언제나 그의 작업실을 드나들때면 들리는 익숙한 종소리였다. 현관 근처의 둥그런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여기까지 오는데만 해도 오십번은 넘게 들여다봤지만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다. 하나로 곱게 묶어 올린 머리가 온전한지 한 번 보고, 그 옆으로 빼죽 삐져나온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가 아닌가 싶어서 앞으로 빼고, 어젯 밤부터 고심해 고른 스커트 밑단도 탁탁 털며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이제 괜찮은가?
" 거기서 뭐해?"
헙,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서성거리는 내 인기척을 눈치챘는지 어느새 현관까지 마중한 모양. 멋쩍게 웃으며 단화를 벗었다. 방금까지도 작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뿔테안경을 쓴 채였다. 능청스레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실치고는 넓다랬다. 이 집엔 그가 주로 지내는 침실과, 전용 작업실(이지만 그는 줄곧 골방이라고 불렀다.), 응접실까지 있었다. 이 역시 내 앞으로 떨어진 재산의 일부였다. 지금은 그의 소유지만.
" 작가님 글쓰는 건 어때요?"
" 작가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 김 작가님. 마감 기일이 코 앞입니다."
" 내가 마감이 어딨어."
아. 또다, 또. 샛달처럼 눈을 휘어 웃는 그의 눈웃음에 나는 항상 약했다. 그가 방세를 내지 않아도, 그의 시가 통 나오지 않아도, 그래서 내가 읽을 글이 없고 더이상 그를 찾아올 핑계가 사라져도, 저 눈웃음 한 번이면 만사가 해결되는 걸. 처음 코 꿰인 날도 꼭 이랬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던 몇 해 전,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봄날도. 그는 퍽 예쁘게 웃어보였다.
-
세상은 쉴새없이 바뀌어가고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바람에 기민하게 군 것은 친구들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던 제비처럼 나는 깨어있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점차로 세상이 굴러가는 모양새를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조물거리며 제 입속을 채우려는 열강들과 일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뭔데?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그들이 알지 못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뜻을 전하는 것.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 대답이 그였다. 말에는 뼈가 있고, 그 뼈에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일으킬 힘이 있다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설명한 그가 웃었다. 어둔 밤하늘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샛달같이. 친구를 졸라 그를 몇 번 더 만났다. 그는 학업만으로도 바쁠텐데 문집활동에 열심이었다. 학생들이 다같이 연합해서 만드는 문집임에도 그의 골방엔 언제나 그 뿐이었다. 그의 방에서는 사각사각한 종이 냄새가 났다.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에게도 그는 다정했다. 평소처럼 웃어주고 차를 내어주고 다음 문집에 실을 글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에는 온기가 있었다. 39도. 검열관의 눈에 들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는, 정상체온을 웃도는, 39도.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의 골방을 나섰다. 그는 비평을 부탁했으나 나는 진실로 좋은 것 뿐이었으므로 제대로 된 비평이 될리 만무했다. 엄지를 치켜올려줘도 그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글을 꼭꼭 씹어 혀 아래 넣어두고 집 가는 길 내내 곱씹었다. 그의 유려한 필체와, 사각거리는 만년필 소리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런 것들로 간을 쳤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며 쓴 그의 글에선 쌉싸름한 맛이 났다. 그러나 끝맛은 눈물이 돌 정도로 달큰했다.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명명했다. 파도처럼 밀려올 밝은 빛.
좋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좋다'란 저도 모르는 새 젖어버리는 것, '좋아한다'란 치마폭을 접어들고 물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 그 미묘한 경계선 위에 서서 나는 평형놀이를 했다. 잘해야 본전인 그 싸움에서 내가 이길 리 만무했지. 그의 바다에 몸소 뛰어들며 그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집에 웬만큼 돈이 있었기때문에 경성에는 내 앞으로 된 건물이 수 채였다. 개중에서도 가장 넓고 가장 깨끗한 건물을 골랐다. 그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내가 더 간절히 부탁하자 하는 수 없이 받아주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죄이고, 내가 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서였다.
나는 종로 경찰서장의 딸이었으니까.
-
딸랑-
하는 종소리마저도 익숙했다. 충동적으로 들어와버렸다. 괴상망측한 초콜릿 우체국에. 좁다란 실내를 빠르게 둘러보며 짧게 생각했다. 음. 우체국보다는 초콜릿 가게에 가까운 건가. 쇼윈도에 먹음직스럽게 놓여진 초콜릿을 보며 군침을 삼킬 무렵 주인이 나왔다. 히멀건하게 생긴 남자였다. 심드렁하게 눈짓으로만 물어보는 꼴이 곧 망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 초콜릿?"
" 네?"
" 초콜릿 보내려고 왔냐고."
눈만 댕글 굴리며 이 곳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초콜릿. 우체국. 이질적인 낱말들 사이를 이리저리 조합했다. 그러니까 남자말대로, 이 곳은 편지 대신 초콜릿을 부치는 곳인가?
" 주고 싶은 사람 있어?"
" 아... 뭐 딱히... 지금은 없는데요."
아니 근데 왜 초면에 반말? 서비스 정신이 제로인 남자를 보며 슬슬 약이 오를 무렵 이상한 소리를 꺼냈다.
" 예전엔 있었던거고?"
" 아... 뭐..."
까마득한 과거를 회상하며 옅게 웃음 지었다. 샛달 눈웃음. 혀끝에 맴돌던 쌉싸름한 맛. 고개를 한참 치켜들어야 볼 수 있던 그의 얼굴. 맞잡은 손의 온기. 잊을 수 없는 기억엔 시간이 약이라지만, 어떤 기억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감춰져 있던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따갑게 반짝였다. 그저 선명하기만 한 민낯의 기억들은 바래지고 아름답기만 한 기억으로.
" 보내줄게."
" 네?"
" 과거 그 사람한테 보내준다고."
대뜸 내민 건 택배용지와 비슷한 모양새의 종이였다. 예전의 주소와 예전의 그 사람을 쓰라고. 무딘 펜촉이 종이에 닿는 느낌이 생경했다. 그 옛날, 내 전공서적엔 그의 이름만이 가득했는데. 떠올려보니 꽤 오랜 시간을 잊고 지냈다. 펜을 고쳐쥐며 예쁜 글씨로 쓰려고 노력했다. 이름을 쓰는 것마저도 버거운 사람.
받는 사람. 김 남 준
-
그 해 여름은 숨가쁨의 연속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독립운동에 가담한 게 화근이었다. 해를 넘길수록 그네들의 검열은 더더욱 심해졌는데 일개 대학생들의 문집에도 그 영향력이 미쳤다. 41도의 글을 쓴 오빠가 어제 잡혀갔다. 그의 골방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심란한 표정이었다.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속내를 비치지 않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였다. 문집의 폐간. 그는 애정을 쏟아부은 문집의 사형선고를 직접 내렸다.
" 오늘부로 연희문집은 폐간하겠습니다."
뿔뿔이 집으로 돌아가는 발자욱들은 무거운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그림자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골방 창틈으로 그네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 창틈새로 그는 내 뒷모습도 지켜보았나. 뒷모습이란 건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내 등뒤의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앉은뱅이 책상에 반쯤 기댄 뒷모습은 콧등이 시큰해질 정도로 서러웠다. 왜 항상 넓직한 등이라고만 생각했지. 고작 스물셋이었는데. 그도 겨우 스물셋이었는데.
말 없이 등 뒤에서 그를 안았다. 입 밖으로 내는 말은 진동을 내고 음파를 만들어 만물에 영향을 미치지만, 마음으로 내는 말은 은밀하고 조용한 구석이 있어 더욱 진실됐다. 온 마음을 담아 건네는 위로에 그는 조금 등을 떨었다. 나도 따라 눈물이 조금 배었다. 항상 내 등에 올라타고 있는건 일종의 죄의식이었다.
비가 누굴 사랑한다면 적시는 일밖에 할 수 없어서, 중력이 누굴 사랑한다면 끌어내리는 일 뿐이어서. 내 존재가 그에겐 괴로움일까.
그런 죄의식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충동적인 행동을 야기했다. 나 몰래 진행되던 독립운동에 끼게 된 건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연거푸 저었지만 나는 완고했다. 막내딸이라 체화된 우기기는 여기서 유용했다. 그는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고 얼굴을 가리는 용도의 모자를 씌웠다. 유명 인사들이 꽤 많이 모인 곳이었다. 주도한 다른 오빠가 폭탄을 던지면 숨어있던 학생들이 독립을 외쳤다. 그는 나를 위해 진원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미루나무 밑에서 어제 밤새 그렸던 태극기를 땀이 나도록 쥐었다.
집결지로 이동할 때까지 손 놓치면 안 돼. 벌써 열 네번째인 말을 다시금 중얼거리며 그는 내 손을 고쳐잡았다. 길쭉한 손가락이 내 작은 주먹을 다 감싸고 남아돌았다. 날뛰는 심장의 이유가 곧 시작될 사건때문인지, 그와의 연결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쾅- 굉음이 신호탄이 되어 우레와 같은 만세소리가 터져나왔다. 시야를 막은 매운 공기를 피해가며 우리는 달렸다. 땀에 찬 손바닥이 자꾸 미끌거려서 깍지를 꼈다. 그의 손이 살짝 움찔거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두근두근. 마주한 손바닥 사이에 심장이 끼워져있었다. 둘의 심박이 합쳐져 쿵쿵대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 ...! 너!"
" 아빠!"
정신없는 와중에 마주했다. 이 곳에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는 손을 더욱 세게 감싸쥐었다. 우리는 계속 달렸다. 그 해 여름은 숨가쁨의 연속이었다.
-
부어오른 종아리가 걱정을 끼칠까, 긴 한복 치마에 두 다리를 감췄다. 처음 보는 내 의복에 그는 살짝 놀란 듯 싶다가 이내 힘겹게 웃어보였다. 나는 심문에서 벗어났지만 다른 아이들은 조사를 받았다고 들었다. 어찌 될지 모르는 운명들. 그의 얼굴이 더 퀭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끝까지 누구의 이름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 인사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고등경찰의 집결지였다. 그 수장의 딸. 그리고 시대의 시인.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 오랜만이네."
" 그러게요. 오늘 날씨 너무 좋다."
그의 작업실로 들어서며 웃었다. 그는 민족계 신문에서 시를 연재했다. 나는 신문을 매일같이 사서 그의 글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지만, 아마 그의 글이었을 몫은 백지로 남겨졌다. 우리는 울지 못해 웃었다. 울 수 없어 웃었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우리는 상황이 심각해질 수록 가벼운 얘기만을 나눴다. 그가 좋아하는 시인의 신간이라든가, 근래의 날씨라든가, 연일 공사를 거듭해 시끄러운 주위라든가. 그런 것들. 하고 싶은 말은 정작 속에만 갇혀있었으므로 정적이 깊어졌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입고 자고 먹는 값은 다 내 동지의 목숨값이여요. 피를 빨아마시고, 살을 뜯어먹는다는 서양의 흡혈귀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의 대화에는 금기어 투성이었다. 머릿속을 떠도는 말은 그 금기들 뿐이었다. 경로를 조금만 이탈한다면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낼, 날 선 단어들. 동지들, 독립운동, 경찰, 아버지, 아버지.
정적이 고요히 내려앉을 무렵 그가 내 손에 무언갈 쥐어줬다.
" 초콜렛, 이라는 거래.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사왔어."
2월 14일. 여류잡지에서 보아 알고 있었다. 밸런타인 데이. 세상엔 인제 초봄이 다가오는데, 우리네 땅엔 봄이 언제쯤 찾아들런지.
-
레스토랑이란 곳엔 가족들과 몇 번 찾았었지만 이토록 불편한 적은 손에 꼽았다. 일본 어디 기업의 맏아들이랬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는 혼기가 다 찼다며 닦달을 했다. 잡힌 선자리가 이거였다. 남자는 다정하고 내내 나를 신경쓰는 눈치였지만, 난 달갑지 않았다. 이 숨막히는 공기를 벗어나 아늑한 그의 작업실로 가고 싶었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 선자리였기에 함부로 자리를 박차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어요. 아버지께 단호히 올린 말씀은 말 허리가 뎅강 잘렸다. 김남준이냐? 정보력 하나는 대단했다. 침을 꼴깍 삼키며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한편 그는 그 날 이후로 줄곧 내게 초콜렛을 주었다. 아마도 하지 못한 말을 대신 건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주는 초콜렛은 어딘가 씁쓰름하고 더 진득하게 늘어졌다. 끝내 고백은 없는 채였다.
어렵게 선자리를 끝마치고 그의 작업실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전차를 닦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종소리였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깔끔한 집 안이었는데. 그가 없다는 게 왜 이렇게 불안했는지. 아버지가 말했던 그의 이름이 계속 떠올랐다. 불안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그랬다. 발개진 눈으로 그를 기다렸다. 그의 의자에 앉아 새벽과 함께 그를 기다렸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건 고된 일이었다. 동이 터 올 무렵, 충동적으로 서랍장을 뒤졌다. 각종 서류와 문구류로 가득 찼던 서랍장을 넘기고 암호가 걸린 마지막 서랍장을 열었다. 암호는 내 생일이었다.
마지막 서랍장엔 초콜렛과 급하게 찢긴 원고지가 있었다.
[어서 후생(後生)으로 가세요, 이제 곧 난세(亂世)가 올겁니다
그대 심장을 내가 주웠다면 그대는 놀랄까요, 불멸의 바람이 눈보라를 몰아치네요
수백만 송이 꽃이 필 겁니다]
그가 남긴 수백만 송이 꽃은 핏빛 장미라서, 나는 그 가시에 찔려가며 품에 꼭 안았다. 꽃을 마음에 심은 것은 처음이라 서툴었다. 양분은 내 눈물이 전부였다. 눈물과 피로 피워낸 꽃은 더더욱 찬연했다.
끝내. 고백은 없는 채였다. 우리는 나중을 기약했다. 그는 그렇게 떠났다.
-
그 길로 나는 집을 나갔다. 내 사랑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남의 목숨값으로 내 생을 이어나가는 극악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끌려가지 않은 동지들에게 내 주소를 알렸지만 그에게까지 전해졌을지는 미지수였다.
-
" 날짜도 써야 해. 그 때로 보내줄테니까."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따졌다. 그는 간헐적으로 생을 알렸다. 엽서가 왔던 날을 여직 기억했다. 그 때 쯤 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받은 마지막 연락이었다.
" 꽤 오래전이네."
" 무슨 수로 보낸단 거죠?"
" 기적은 믿지 않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 법이야."
" 그 사람은 벌써,"
... 그 사람은 벌써. 죽었다구요.
-
빛이 돌아왔다. 바야흐로 광복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기쁨의 춤을 추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나만은 웃을 수 없었다. 동문들이 모이는 자리에 혹시나 하고 나와봤지만 역시나 그는 없었다. 간도로 넘어갔다고 들었어.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돌아오지 않을까. 위로인지 확신인지 모를 추측성 어조들이 난무했다. 마음엔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우리가, 우리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시간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다.
광복으로부터 몇년이 지났지만 익숙한 이름엔 몸부터 반응했다. 그 산골에 집배원이 온 것도, 아침부터 까치가 운 것도 심상치 않다 했다. 교무실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걸 듣고 벌떡 일어났다. 발신인 자리에는 선명하게 김남준, 이란 이름 석자가 적혀있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날까봐, 교직원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칸 안에 들어가서도 한참 봉투를 열지 못했다. 심호흡을 오십번 정도 하고 나서야 겨우 봉투를 열었다. 봉투에는 어김없는 초콜렛과 엽서가 들어있었다. 아주 한참을 돌아온 엽서였다. 그는 광복이 되던 해, 4월에 보낸 그의 소식이었다. 엽서를 수십번이고 읽었다.
그는 소문처럼 간도에 있었고 소문보단 잘 지내고 있었다. 일제의 기세가 소강즈음이란 걸 눈치챘고, 곧 귀국하겠다고. 어린 애처럼 울고 있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곧 찾아가겠다고. 그리고 말하겠다고.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그는.
-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와 간도에 같이 갔던 선배가 찾아왔다. 학교 근처 찻집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가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알지만. 모르는 체 했다. 내가 불쌍해서 거짓이라도 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짓으로라도 연명하고 싶었다. 선배는 한참을 애꿎은 커피잔만 매만졌다. 첫 마디를 떼는게 그렇게 어려웠다.
" 남준이가. 봐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 사람이랑 광복이 되는 걸 봐야한다고. 우리는 남아서 철수를 돕기로 했고 남준이가 먼저 떠났어. 귀국하는 길에... 열차사고가 있었어."
아니. 검문이겠지. 바뀌어버린 판도의 마지막 발악이었겠지. 간도까지 넘어갈 정도의 인사라면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었겠지. 조사도 없이 바로 끌려갔겠지. 누구나 열차라고 말하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의문의 열차사고 였겠지.
" 그 사람이, 너였나보네."
나는 제법 담담하게 웃어보였다. 확인사살을 받는 기분은 참담했지만, 다 예상가던 사실이니까.
"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었거든. 돌아가자마자 청혼할거라고."
고개를 틀어 거리를 바라봤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 얘길 꺼내는 선배도 고통스러워보였다. 그가 떠나던 뒷모습이 선하다고, 신발 뒷축을 구겨신고, 그와중에 지갑을 놓고가서 가던 길을 되짚어왔더라고. 밤이 늦었으니 내일 열차를 타라고 말렸지만, 한시라도 빨리 가야한다고 서둘렀던, 그 뒷모습이.
하늘은 맑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여우비. 물끄럼 창밖을 보다가 울컥 눈물이 터졌다. 못나게 꾸물거리는 입을 앙 다물고 참아내려고 했지만, 뼈를 갉아내는 슬픔은 가눌 수 없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펑펑 울었다.
마지막 동앗줄이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가 올거라는 사실 하나로, 나는 그 영겁같던 시간을 버텨냈는데, 기어코 살아냈는데. 다신 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그와 함께 했던 그 계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암흑같았던 시절이지만, 그가 내 세상이라 나는 항상 빛 속에서 살았다. 보고 싶었다. 그 눈웃음과, 다정하게 올라가는 그 입꼬리와, 손가락이 유난히 길던 손과, 항상 뒷축을 구겨신던 발 뒷꿈치까지 모조리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좋아한다고 내가 먼저 말할걸. 우린 서로를 좋아하면서, 그 마음의 밑바닥까지 모조리 알면서, 끝내 좋아한단 말 한번도 꺼내지 못했다.
-
초콜릿을 부치고 잰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임시방편 삼아 얕은 모래로 덮어두었던 그의 기억은 파도에 휩쓸려 선명해졌다. 허기를 인지한 며칠 굶은 사람처럼 그가 보고싶었다. 그의 죽음을 당면한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내 마음마저도 그 몇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자취방에 도착해서 급하게 벽장 안쪽에 있던 박스를 꺼냈다.
몰래 몰래 훔쳤던 그의 원고지들, 그가 선물해준 시집, 신문에서 오려낸 시, 그가 주었던 편지, 엽서, 초콜릿 포장지들이 가득 했다. 단내가 확 풍겼다. 개 중, 마지막으로 받았던 초콜릿은 아직 포장도 뜯지 못한 새 것이었다.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보고 있자니 몇년 전 그 때의 그리움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불 꺼진 방안에서 달빛에 의지해 글을 읽었다. 그때의 그 온도, 그 향기, 그 맛. 마지막은 그가 보내왔던 엽서였다. 봉지를 뒤집어 엽서와 초콜릿을 꺼내는데 팔랑거리며 웬 쪽지가 떨어졌다. 분명 그 전엔 보지 못했던 쪽지였다. 조심스레 펼쳐본 쪽지엔 급하게 쓴 듯한 그의 글씨가 선명했다. 시간의 흐름을 받아 종이도 글씨도 바래있었지만,
" 초콜릿, 고마워. 아주 먼 곳에서 온 듯한 향기가 났어. "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믿어도 믿지 않아도 좋다. 초콜릿 우체국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이 사라졌고, 종이쪽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주인의 말대로, 정말 기적, 이었을지 모르지, 2월 14일의 초콜릿 우체국은.
-
독자님들 안녕하세오 ^^! 대역죄인 스카트임미다..... 고삼의 인생이 이렇게 쉴틈없는 것인지 몰랐답니다.... 용서해주세요....... ^ㅁ^ (독서실 가는 거 미루고 글 쓴 새럼)
쓰고 싶은 거 너무 많지만 현생!!!! 죽어라!!!!! 빨리 대학교 가서 이 짓을 관두고 싶어요 ;ㅅ;
오늘도 역시 이렇게 된 글은 시 구절을 인용한 것이구요. 전체적인 프레임은 황경신 작가님의 <초콜릿 우체국>에서 따왔어요!
시 구절은 각각 이현호, 외눈이지옥나비로 생각하기/ 박진성, 중세의 겨울입니당.
가끔 이렇게 얘 누군가 싶을때 오겠습니다..... ^ㅁㅠ 져눈 이제 독서실에 간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