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윤의 진한 검은빛 머릿칼이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먹물처럼 진하게 흩어졌다.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로 책상 위에 둔 문제집을 차근히 풀어가는 그 모습이 눈이 시릴 정도로 태현의 눈동자 안에 박혔다. 태현은 이럴 때가 참 좋았다.
승윤이 유일하게 정적인 상황. 평소에 까불대던 승윤이 도저히 생각치 못할정도로 진지하게 무언가에 뚜렷하게 집중하는 모습. 그런 평상시와 다른 고요한 모습의 승윤에게서 먹향이 나는 것 같았다. 한 폭의 수묵화와도 같은, 동양의 옛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수려한 소년. 검은색의 차분하게 늘어뜨린 생머리라던가 그 밑의 조금 째진 탓인지 차갑고 이지적인 눈매. 그리고 그 눈매 속 검은색 눈동자의 소년다운 풋풋함과 반듯함이란.
아.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고동쳐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태현은 심장께를 오른손으로 꾹 부여잡았다. 떨지마라. 너무 크게 울리지 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뜩 두근거리기만 하는 것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온 몸이 심장으로 이루어진 것 만 같이 요동치며 온 몸에 펌프질을 가해대는, 북 소리 같이 울려퍼지는 심장소리. 옆에 세상 모르게 책상 위로 엎드린 채로 자고있는 짝꿍의 귓가에 행여나 들릴까 숨을 한꺼번에 잔뜩 몰아 삼킨 다음 한꺼번에 뱉기를 반복했다. 거짓말 않고 정말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강승윤 x 남태현 본투스타 1
*
시험 출제기간의 교무실은 평소의 배로 북적이고 웅성거리는 분위기다. 이것 프린트하고 저것 제출하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눈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음. 태현아, 미안한데 지금 상황 보이지? 선생님이 매우 바빠서 진로 상담은 불가능한 것 같고··· ,"
원래 약속했던 상담시간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몇번이나 젊은 여 선생님은 제게 사과를 계속 해댔다. 그저 점심시간 자는 시간을 조금 빼앗겨서 힘들어서 눈썹이 축 쳐졌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또 오해하시는 것 같은 모냥이었지만 태현은 그닥 상관치 않았다. 진로 상담이라는 것도 진로 상담 선생님이라는 명목으로 전교생 누구에게나 해주는 거고 오늘이 자신의 차례였는데 운없이 선생님이 바빠 다음으로 미뤄진 모양이다. 자기 다음번인 성이 ㅂ자로 시작되는 아이도 진로상담 순서가 느려질터이니 상관 없었다. 그렇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 이렇게 오고 가는시간에 잠을 잔다면 몇분은 더 쭉 잘 수 있었을텐데.
그 점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태현은 뒷머리를 긁다 인사하고 뒤를 돌리는 순간 여선생이 잔뜩 어지러진 책상 위에서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프린트 물 한장과 함께 바지 주머니 속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제게 건냈다.
"미안하지만 태현아, 하나만 부탁 할게. 선생님이 지금 시간이 없어서 그래. 이 프린트 용지 보이지? 이거 너네반 승윤이한테 좀 전해주렴"
이잉, 좀 부탁해. 라며 제 팔목을 잡고 앙탈을 부리는 선생의 모습은 눈 안에도 없었다. 강승윤. 단순한 이름 하나에 잘못한 것을 들키기라도 한 양 심장이 잔뜩 덜컹거렸다.
"네? 강승윤요?"
"그래 승윤이. 요즘 승윤이를 여자애들이 그렇게 '본투스타'라고 부르며 따른다며. 그래서 혹시 전교회장 같은거 관심이 있나해서 입후보 용지야. 반마다 한명 씩 후보로 나가야하는데 승윤이 만한 애가 너네반엔 없잖니?"
조곤조곤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하는 여선생의 목소리라던가 이 종이를 주는 이유 같은게 잘 귓가로 안 들려왔다. 승윤이라는 이름 하나로 머릿속이 온통 진창이 되어버린 듯 해 귓가의 소리가 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강승윤. 1학기 내내 제대로 한번 마주쳐본 적 없는, 마음을 깨닫고나서도 다가갈 건수 하나 잡지 못했던, 강승윤.
이 용지가 무엇이던지간에 손에 놓인 종이 하나로 가슴이 덜컹거리는 기분이다. 2층인 교무실에서 교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가는 걸음이 평소와 다르게 나는 듯 가볍다.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도저히 현실감이 안나서 나풀대는 듯한 발걸음. 그러다가, 교실 앞에 멈춰서서야 겨우 현실과 마주했다. 2학년 1반이라는 팻말 아래 석상이 된 것처럼 굳은 듯 정지했다.
종이를, 어떻게 전해줘야할까.
고작 종이 하나 전해주는 거에 이토록 심장이 떨리다니. 그러고보니 잔뜩 흘려들은 탓에 뭔 내용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차,싶었다. 난감했다. 빠르게 종잇조각을 눈앞에 들이대며 대강의 내용을 읽으며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려했는데 동시에 교실문 밖으로 나오는 아이 한명과, 장렬히 부딪혀 버렸다. 어쩐지 교실 문이 평상시와는 달리 쉬이 열린다 했다. 그 때에 의심을 했어야하는건데.
"아!아아!!"
"!"
머리를 잡고서 웃음기 가득 담은 눈꼬리로 오버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는 제 앞의 사람은 강승윤이 맞았다. 잘 좀 살필걸.이라는 마음은 사실상 사라진지 오래다. 눈 앞에 강승윤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머릿속이 부얘졌다. 허공을 누비는 듯 정신이 없었다. 손에 쥔 종이에 갑자기 땀이 절로 차는 것만 같았다. 종이? 순간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휘몰아쳤다. 강승윤과 조금 더 대화하고 싶다,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과 이 때가 아니면 항상 친구들과 어울려 잔뜩 신나게 노는 강승윤에게 다가가서 종이를 건네줄 기회가 없다는 생각 둥. 여러가지 생각이 맞물려 달리는 충동과 함께 저절로 손에 쥔 종이를 강승윤에게 내밀어 버렸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지도 못했는데! 라는 절규가 머릿속을 울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종이? 뭐야?"
눈썹을 8자 모양으로 안쪽 부분만 들어올린 채로 눈이 커다래진 승윤이 허리를 살짝 굽힌 채로 종이에 쓰인 내용을 눈으로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강아지를 연상시켜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강승윤이 자신의 앞에 서있다. 학원을 1년간 같이 다니면서, 같은 반에서 1학기 간 같이 다니면서도 어울린 적 한번 없던 강승윤이 제 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연예인 앞에 선 것 마냥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전교회장 입후보 용지? 이걸 왜 나한테 줘?"
"그, 김···미경 쌤이 전해달래서."
아아, 라며 아무렇지않게 제 말을 흘려듣는 듯한 승윤이 고맙다고 말을 흘리며 제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가며 다시 한번 종이를 훑으며 아무렇지 않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근데 손에 쥔건 뭐야?"
손에 쥔 것? 아. 아까전 여선생에게 받은 츄파춥스였다. 주머니에 넣어둔다는 걸 승윤에게 종이를 전해주러간다는 생각에 깜박 잊고 그냥 종이와 함께 대뜸 쥐고 있었나보다. 잔뜩 쥐고 있었던 터니 승윤이 궁금해하더라도 딱히 이상할 턱이 없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를 몇번이고 되뇌여가며 떨지않으려 잔뜩 속으로 심호흡하며 손바닥을 펴서 승윤의 앞에 대고 사탕을 흔들었다.
"줄까?"
"어, 나 주려고?"
사탕이라는 것에 별거 아니었다는 듯 김샌 얼굴을 한 승윤이 준다라는 말에 반응 하고는 놀람과 당황 어색을 잔뜩 얼굴에 담더니 좋은게 좋은거라는 듯이 다시 태현, 자신 앞 가까이서 특유의 그 풋풋한 미소와 함께 고맙다며 손에서 사탕을 받아갔다. 제 어깨를 툭툭 치고 가는 것은 덤이었다. 맞닿은 손, 만져진 어깨. 오늘 밤 제대로 잠자긴 글렀다.
태현을 두 손 가득 모아 얼굴에 쥐며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는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