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멤버들에 비해 늦게 합류한 나는 그만큼 더 노력을 쏟아 부어서 1년이라는 연습기간 끝에 데뷔하게 되었다. 데뷔하던 날 대기실에서 빳빳하게 굳어 긴장하고 있던 내가 안쓰러웠던건지 멤버 찬열은 내게 와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데뷔무대 사전녹화가 끝났고, 이제 대기실로 돌아와 땀을 식히고 나면 한 차례 더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앨범을 돌리러 다닐 차례였다. 매니저 형과 함께 있기야 했지만 혹시나 첫날부터 선배들에게 눈도장이 찍힐까 조심 또 조심하는 준면이 형의 모습을 보며 모두들 숨 죽였고, 첫번째로 그날 음악방송에서 최고참이던 걸그룹 대기실로 들어섰다. 대기실의 노크를 똑똑 두드리던 준면이 형이 문이 열리길 잠시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위아 원! 엑소케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문이 열리고, 다행이도 웃는 낯으로 우리를 맞아준 선배들에게 우리는 마치 방송에서 하는 인사인냥 군기넘치는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선배들을 보며 조금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그룹의 리더는 준면이 형에게 대표로 앨범을 건네받으며 틀에 박힌 칭찬들을 서로 쏟아놨다. 준면이 형의 각 잡힌 인사를 끝으로 우리는 그 대기실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멤버들 중 나만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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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활동기간이 절정에 치달아서 조금씩 다들 지쳐하고 있을 시점이였다. 팬층은 매니아층만 두텁고,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않아서 음반 순위도 그저 수면안에서 잠잠히 가라앉을 뿐이였다. 회사의 윗대가리들은 우리를 조금씩 조여오기 시작했다. 하긴, 그럴만도 한게 우리 그룹 프로젝트에만 쏟아부은 돈이 겉보기에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윗대가리들의 쓸데없는 쓴소리들을 들어가며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춤만 추던 그때, 갑작스러운 일이 터졌다.
'[단독] 신인그룹 E의 B군, S그룹 A양과 핑크빛 기운?!'
나와 스캔들이 퍼진 상대는 평소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멤버들이 운운해왔던 그녀였다. 처음에는 장난치지 말라며 넘어갔었지만, 활동 중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과 행동등을 보며 나도 어슴프레 짐작했던 그녀였는데. 그날 밤은 회사의 대처는 미미했다. 그저 불이나게 걸려오는 전화들을 모른 척 하고, 상대 소속사의 발표를 기다릴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식에서는 '전면 부인'이라는 대답 뿐이였다. 그날밤, 회사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고 나는 밤늦게까지 그곳에 몸담으며 활동계획에 필요한 요소들을 만들어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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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백현, 이건 좋은 기회야. 너같은 초짜가 이런 애랑 엮이기 힘들어.'
'...그치만 사실이 아니잖아요.'
'지금 상황보면 몰라? 인터넷은 온통 너와 그 여자애 이름 뿐이야. 이슈라고.'
'어차피 그쪽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변백현.'
'...네.'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싶냐? 너 데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선배소리도 들을만큼 신인들 많이 생겼지? 그중에는 분명히 너같은 새끼보다 훨씬 잘난 놈들도 있어. 그런새끼들한테 뒤쳐져서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는 수면위로 뜰 수 없을만큼 가라앉고 싶어?'
'...아니요. 아니에요.'
그럼 이용해, 그년을. 홍보실장 입에서 떨어진 말과 함께 관계자 모두가 동의하듯 새벽내내 열렸던 긴급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감싸쥐던 내 어깨를 한두번 툭툭 두드리던 홍보실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A4용지 몇장을 건냈다.
'이게 뭐에요?'
'너 앞으로 해야될 것들.'
그 종이에는 앞으로 공중매체에서 그녀와 연애 중이라는 것을 은근히 티낼만한 소소한 행동이나 말들,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직접 가해야할 행동들 등이 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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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없는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는 생각에 꺼림직하지 않은 일이였지만 그녀와 엮이면서부터 불어나는 사람들의 관심과 팬층에 욕심이 생기는 것은 본능이였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아, 왜 답장이 없어....'
언젠가부터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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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기간이 끝나고, 공백기까지 합쳐 그녀와 조작 스캔들을 벌인지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처음에는 미미했던 내 감정은 더욱 커져있었지만, 말 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이제 슬슬 그녀를 정리하고 해외활동 준비에 들어가자며 재촉했지만 냉정하게 그녀를 버리는 것은 그녀에게도, 내게도 가혹한 것이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3개월이 넘어서도 그녀와의 연락을 이어가는 것을 회사 스텝에게 들켜버렸고 곧이어 실장의 귀에도 들어가게되었다.
'정리 하랬지.'
'......'
'왜. 그동안 진짜 사랑에라도 빠졌어?'
'아니에요.'
'그럼. 그 년이 허리라도 잘 돌리냐?'
실장의 입에서 더 추악한 말이 나올까봐 그냥 내 손으로 직접 폰을 반납하는 것으로 입을 막았다. 00에게 말도 하지않고 폰을 반납해버린 것이 마음에 걸리긴했지만 최근 내쪽에서 부쩍 연락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그녀도 어느정도 직감했으리라 생각한다. 아, 어제 카톡온거에 답장이라도 해둘걸.
[백현아! 오늘도힘들었지?ㅠㅠ 우리힘내자! 나이번에마마에서상타면너한테정식으로고백할거야.. 이렇게가짜로사귀는거말고진짜로! 니가나싫어해도일단고백할거야 그래야내가마음이편할것같아.. 아무튼, 열심히해 백현아! 화이팅♥]
***
"아, 그게 백현아. 니가 연락이 안되길래... 폰 걷었어?"
"아니, 안 걷었어."
"근데 왜 연락이 안,"
"연락하지마."
"......"
"씨발. 못 알아들어? 우리 약속했던 3개월 끝났으니까 이제 귀찮게 굴지 좀 말라고. 너 이제 쓸 가치 없을만큼 나도 많이 컸어. 좀 가라, 씨발."
가시 돋힌 말들을 내뱉는 내 속은 엉망이 되어갔고, 점점 일그러지는 00의 모습을 보며 뒷목이 뜨거워짐을 느껴졌다. 아니, 사실 지금이게. 뜨거워지는게 말이야. 뒷목인지, 여기 가슴안인지도 모르겠어. 난 왜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도 못하는거지? 왜그래야 되는거야, 00아. 너랑 나,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왜 눈을 감아버려야 되는거냐고.
"미, 미안해. 난 그냥..."
글썽이더니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자 급하게 소매로 닦아보이는 너. 손목에 차고있는 그새 낡아버린 싸구려 천팔찌는 내가 장난식으로 손에 감아줬었던 그거잖아. 그걸 왜 지금까지 하고 있어. 눈물을 닦으며 뒷걸음질 치는 00이가 쓰게 웃어보이며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내 시야안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빨리 걸으면 어떡해. 너 잘 넘어지잖아. 내가 보이는 곳 안에서 도망치지. 지금 걱정되는데 난 너 잡지도 못하잖아.
00이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보던 내게 매니저 형이 다가와서 말했다. 너 쟤랑 끝난거지? 나 어제도 실장님한테 가서 괜히 깨졌다. 너랑 쟤 띄어놓으라고. 야, 가자. 이제 비행기 타야지. 늦게가면 후진 자리 밖에 없어, 임마. 가자니까? 야, 변백현. 정신차려, 임마. 뭐 보는거야, 아무것도 없구만. 야, 변백현!
'아프지말고 잘있어. 우리 같은 위치에 섰을 때, 그때는 내가 너한테 고백할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