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오메가 팬픽
Gainloss
삐리리릭
잠결에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몸을 뒤척이면서 포근한 솜이불 안으로 애벌레처럼 기어들어갔다. 관자놀이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버지를 닮아 지훈은 술이 센 편이었지만 확실히 어제 들이킨 주량은 숙취가 생기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지훈을 이불을 돌돌 만 채로 이쪽부터 저쪽까지 침대를 굴러다니며 침대보에 베인 희미한 로즈마리 향을 맡았다.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향에 윙윙 울리는 머릿속이 차츰 진정되는 기분이다.
“어유. 도련님 공기 환기 안 시켰어요? 아주 현관부터 숨이 콱 막히네. 공기청정기 뒀다 뭐해요?”
아, 오늘 목요일이지. 밖에서 들려오는 친근한 목소리에 지훈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누군가 싶었더니 일주일 두 번 월요일, 목요일마다 오는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귀찮아서 미룬 설거지 양이 제법 많을 텐데 큰일이다……. 동면한 뱀처럼 지훈은 이불 속안에서 꼼짝도 안한 채로 입을 다셨다. 흐아아암. 어떻게든 되겠지, 뭐. 천생이 게으른 지훈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몸을 꿈틀대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져있고 입가에는 흐릿한 침자국도 있지만 워낙 잘생긴 외모 덕분에 그런 모습도 섹시하게만 보인다. 지훈은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검지와 중지로 꾹꾹 누르면서 문을 열었다.
“잠시만요. 아주머니, 잠깐!”
공기청정기를 작동하려는 아주머니에게 지훈은 헐레벌떡 달려갔다. 방금 막 도착한 듯 외투도 벗지 않은 아주머니가 의아해서 지훈을 올려보았다. 지훈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공기청정기는 됐어요. 청소는 필요 없고, 빨래랑 청소만 좀 해주세요. 반찬은 아직 냉장고에 남아있으니까 안 만드셔도 되구요.”
예? 그렇지만 공기가 너무 안 좋은 게 실내오염 수준인 걸요. 이러다가 도련님 건강에 어디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려고……. 아주머니가 눈을 부릅뜨며 무언의 항의를 했지만 지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지훈은 실실 웃으면서 아주머니의 등을 밀어 부엌으로 갔다.
과음하더니 도련님이 미쳤어, 라고 적힌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훈은 밍기적 밍기적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살얼음이 낀 차가운 물을 꿀꺽꿀꺽 마시자 잠이 좀 달아나는 것 같다. 여전히 머리는 아프지만.
지훈이 공기청정기를 틀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태껏 집안 공기를 환기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바로 로즈마리 향 때문이었다. 그가, 지호가 다녀간 뒤로 집안 곳곳에 배어있는 장미향이 옅어지는 게 싫어서 창문을 꼭꼭 닫고 공기청정기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집밖에 나갈 때도 혹여 향이 빠져나올까봐 조심조심하며 나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향이 희미해져서 지훈을 슬프게 했다. 지훈은 물컵을 탁- 소리나게 식탁에 내려놓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어 설거지 중인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아주 평범한 베타였다. 지훈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잠시지만 베타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을 맑게 해주는 이런 천상의 오메가 냄새를 맡지 못하는 그들이.
“아, 보고 싶다.”
벌써 헤어진지 보름이 넘었다. 지훈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구름에 가려 흐린 달빛 같던 고고한 오메가, 지호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 날은 결혼을 앞둔 경이 형과 마지막으로 덕담을 주고받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독한 오메가의 냄새가 근처 골목길에서 녹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알파의 본능대로 급히 냄새를 좇아갔다. 평소 물욕이 없던 그답지 않게 어떤 알파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강렬한 승부욕에 사로잡혀선 무작정 뛰었다.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독한 로즈마리 향…… 정신없이 달려간 그 끝에서 지훈은 타락한 장미꽃 한 송이와 대면할 수 있었다.
앞섶이 부풀어올 만큼의 끔찍한 성적 충동이, 믿을 수 없겠지만 장미꽃을 본 순간 완벽하게 수그러들었다. 역한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침을 질질 흘린 채 땅바닥을 기고 있는 그가, 히트싸이클에 이성을 모조리 감금당한 채 추악한 밑바닥을 전부 드러내고 있는 그가 너무도 가여웠다. 오물과 뒤섞인 퇴폐적인 오메가 냄새에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때 지훈이 느꼈던 감정은 경건한 예술작품을 눈앞에 둔 카타르시스였다. 오르가즘이었다. 지훈은 홀린듯이 지호에게 다가갔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 듯 지호는 끝까지 알파인 지훈을 밀어내고 저항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천사는 순결을 위해 검게 물든 날개를 스스로 꺾어내고 있었다. 과연 어떤 오메가가 히트싸이클 기간 동안 그 정도의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지훈은 영양실조가 아닌 게 용케 다행일 만큼 깡마른 지호를 안아들었다. 영혼의 무게만 남은 듯 한없이 가벼운 그를 소중히 안아들고 자취방으로 뛰었다. 그리고…….
회상을 끝마친 지훈은 새카만 눈으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 안에 남은 로즈마리 향이 달아날까 꽈악- 하고 주먹을 쥔 지훈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이토록 열망한 적은, 처음이다.
***
“하아.”
지호는 파레트 위에 붓을 내려놓았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생을 함께 해오던 그림이 이렇게 그려지지 않다니. 슬럼프인가. 지호는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딱딱한 나무의자에서 일어섰다. 최근 계속 이랬다. 정확히는… 그를 만난 뒤부터.
지호는 공허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호는 항상 그림을 그릴 때면 낮이건, 밤이건, 비가오건, 눈이 내리건 창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뻥 뚫린 유리창을 내다보고 있으면 답답한 기분이 곧잘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암만 창밖을 보아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메마른 나뭇가지와 아직은 눈이 덮인 거리가 차가운 바람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 풍경이 자신의 마음을 닮은듯해 지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혀끝에 비릿한 피맛이 감도는 게 또 입술이 찢어진듯 싶지만 개의치 않고 차가운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다. 정수리로부터 겨울의 한기가 모조리 침투하는 것 같다.
“뭘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던진 말인데, 호수에 가볍게 던진 조약돌처럼 사방으로 파동이 번져나간다. 지호는 발끝으로 벽을 툭툭 차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좀처럼 그가, 지훈이 지호의 머릿속 한 구석에 콕 박혀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공간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다. 인정이라는 건 ‘내’가 새롭게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단순한 즐거움과 자기 위로를 위해 그렸던 그림이 이제는 나를 증명해줄 하나의 수단이 되었고 그래서 더 욕심이 생겼다. 잘 그리고 싶었다. 그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우지호’를 인정받고 싶었다. 오메가라는 유전자의 신분의 벽을 깨부수고 무한한 날개를 펼치고 싶은, 다소 헛된 희망의 씨앗이 가슴에 심어졌다. 하지만 막상 환희에 들떠 붓을 잡았을 때 지호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지고 도무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물감에 붓을 찍어 발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종이를 찢어냈다. 새카만 그림자가 주둥이를 쩍 벌리고 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씹어 삼킨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안되겠다. 바람이라도 쐬야지.”
공황장애가 있는 지호로서는 대담한 결심이었다. 물론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다 떨어져가는 음식도 한몫했다. 지호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외투를 걸쳤다. 약도 철저히 챙겼다.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주머니 안에 약이 들었는지 몇 번씩이고 거듭 확인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밖에 나가기 전에 문 앞에서 계속 약이 든 주머니를 더듬었다. 후우. 일련의 심호흡 끝에 지호는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나가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추웠다. 목도리라도 하고 올 걸. 물밀듯이 후회가 밀려왔지만 지호는 일단 가는대로 발걸음을 옮기로 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밖으로 나올 용기가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아니지만, 그만큼 긴 달동네 계단을 밟고 내려온 지호는 빵빵 울리는 자동차 컬렉션 소리와 귀를 좀먹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다. 괜찮아, 괜찮아. 자기최면을 걸며 최대한 한적한 길을 걷던 지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문득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른다. 지호는 몸을 돌렸다.
***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면 좋든 싫든 어떤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게 지호의 판단이었다. 생각과 동시에 지호는 그가 아는 곳 중에서 가장 큰 화방으로 달려왔다. 저번에 그림을 판 곳이었다. 그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화방은 3층까지로, 큰 규모도 큰 규모지만 굉장히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테가 흘렀다.
“이번에는 어쩐 일로 온 게야?”
다양한 자극제를 찾아 놀이동산에 놀러온 꼬마처럼 두리번거리던 지호는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번에 그림 감정을 맡겼던 노인이 뒷짐을 지고 큰 눈을 데구루 굴리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맑은 눈동자가 마치 자신의 마음속까지 전부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여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지호는 입술을 씹으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그냥 구경하러왔어요.”
“홀홀 그래? 저번에 내가 말했던 제의는 생각해봤고?”
제의? 무슨 말인가 싶어 미간을 찡그리던 지호는 이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며칠 전에 노인이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자신의 해마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분명히 노인은 자신보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보라고 했었다……. 그 순간 지호는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 하고 저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모세혈관이 터질 것처럼 혈압이 급격히 올라가고 동공이 찢어질듯 확장되었다. 간질이 일어난 것처럼 몸이 덜덜덜 떨렸다.
배우고… 싶다.
그건 예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도 없는 어마어마한 간절함이었다.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어!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하찮은 오메가라도 보잘 것 없는 쓰레기라도 상관없었다. 먹는 것보다 숨 쉬는 것보다 사는 것보다도 더 중요했다.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신경회로가 뇌 속에서 만들어지고 전기 자극에 의해 뉴런이 폭발적으로 연결된다. 단 하나, ‘그림’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400km속도로 미친 듯이 신경이 타올랐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건 생존의 위협에 벗어나 동식물을 짓밟고 먹이 사슬 종결자에 도달한 인간의 추잡한 오감과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사치였다. 부유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이었으며 오만이었다.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재력이 탄탄히 뒷받침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호는 당장 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빴다. 생계도 위태로운데 무언가를 배울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호의 얼굴이 절망으로 어둡게 일그러져 간다. 어째서? 대체 왜? 한낱 나약한 오메가가 뒤집어엎기에 약육강식의 세상은 너무나 잔인하고 냉혹했으며 인정을 몰랐다.
“아.”
꺼져가던 지호의 눈동자에 한줄기 빛이 켜졌다. 한없이 어둠의 나락으로 추락하던 자신에게 하늘이 동아줄을 내려준다. 약. 히트싸이클을 지연해주는 약. 폭발적인 수요와 달리 터무니없이 낮은 공급덕분에 그 약 값은 상상 이상이다. 못해도 하나에 이백은 거뜬히 넘을 것이고 지금 수중에는 총 8개의 약이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손끝에 부스럭하고 약이 걸린다. 꿀꺽. 지호는 메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아 정체성과 인간의 존엄성. 둘 다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가치였다. 하지만, 하지만……!
“네. 배우고 싶어요.”
지호는 눈을 감으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자신이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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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ㅜㅜ 앞으로는 연재 속도가 좀 더뎌질것같아요. 왜냐하면...왜냐햐면...팬북을 참여하니까요 ^_T
아무튼 제 소설을 봐주시는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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