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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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옆 테이블에 있던 술에 취한 사람을 그냥 집에 데려와서 재웠다 이 말이죠?"
"어."
"근데 옷은 왜 벗겼어요?"
"내가 안 벗겼다고 니가 혼자 벗었어."
"아니 제가 왜 혼자 옷을 벗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아니 근데 왜 자꾸 아까부터 반말이에요?"
"너 스무살이잖아."
"그쪽은요?"
"너보다는 훨씬 많으니까 걱정 말고 계속 존댓말 쓰세요."
"근데 왜 제 나이를 알아요?"
"그럼 지갑 주인을 어떻게 찾아줄까?"
"아니 근데 술에 취한 여자가 있으면 집에 돌려보내줘야죠."
"아니 니가 쓰러졌다고. 완전 꽐라."
중앙도서관에서 사람들 다들리게 색마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이상한 놈을 데리고 ㅇㅇㅇ는 캠퍼스내카페에 왔다. 이야기의 진전이 없다.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질문과 대답의 반복이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긴 하는데 뭔가 발음이 어색하다. 약간 귀척하는거 같기도 하고. 뭐지? 얘 게이인가? 그래서 옷까지 벗겨놓고 아무짓도 안한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옆집에 살았던, 피 안 섞인 남자 생물체 중에서 제일 친한 민석오빠는 말했다. 자기빼고 남자는 전부 다 늑대라고. 다시보니 저 자식 곱상한게 여자같이 생기기도 했다. 정말 별꼴이야.
"아 됐고 빨리 핸드백이나 주세요."
"고맙다는 말 안해? 너 나 아니었으면 길거리 동사였어."
"성추행으로 고소 안하는 거 고마워하셔야 될 거 같은데요?"
"생명의 은인한테 지금 성추행?"
"아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됐죠? 저 점심 약속 있단 말이에요. 빨리 가야돼요."
"진심이 느껴질 때까지 인사 안하면 백 안 줘."
"아진짜 쯔즌흐..."
"방금 한 말 다시 말해봐."
"진짜 감사하고 죄송하다구요."
ㅇㅇㅇ는 일단 백부터 찾고 이 게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최대한 불쌍해보이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내리 깔았다. 저 색마 자식도 뭔가 흔들리는 눈빛이다. 나이스. 쫌만 더. 한창 표정 관리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그 변태가 갑자기 백을 테이블 위에 놓고 자리를 일어서더니만 계산서를 가져간다.
"저기요, 그냥 백 주시는거에요?"
"싫음 말고."
"아 그건 아니구요. 아 암튼 감사합니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됐다 꼬맹아. 꼬맹이는 점심에 친구나 만나세요."
계산까지 한다고 하니까 ㅇㅇㅇ는 괜히 미안해졌다. 생각보다 정신은 제대로 박힌 사람인가 보네. 어제 술값도 그 자식이 계산해줬던거 같은데. 떠나가는 그 자식을 보며 ㅇㅇㅇ는 이름조차 안 물어봤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뭐, 어쩌겠어 또 만날 사람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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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한은 이상형이 확고하다. 10살때 다국적 기업의 한국지사에 발령받으신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었다. 그 때 초등학교 체육 선생님은 외로운 한국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항상 싱그러운 미소로 루한을 대해주던 나의 첫사랑. 그녀는 입이 작았다. 루한은 입이 작은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ㅇㅇㅇ는 입이 작다.
카페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으며 올려다보는 ㅇㅇㅇ의 표정을 보고 루한은 어젯밤 의도치 않게 보게 된 그녀의 가슴이 생각났다. 아나 진짜 변태 맞나봐. 와 어떻게 거기서 그게 생각나지. 한창 혈기 왕성한 23살 루한은 더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얼른 핸드백을 주고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 생각난다. 와 그 표정. 그 입술. 그...... 가슴. 경제라고 했던 거 같은데. 거기 남자 완전 우글거리는데 누가 걔한테 찝적되는 거 아냐? 아 걔 남친 없어야 되는데. 오늘 점심에 남자 만나는거 아냐? 이건 절대로 내가 찌질한게 아니다. 솔직히 목숨을 구해줬는데 밥 한끼 정도는 같이 먹어야지. 점심 약속 정도는 펑크내라고 충분히 말할 권리가 있다. 아 근데 그럼 걔한테 사달라고 해야 되나. 그건 그림 안나오는데. 요리조리 생각하며 루한은 아까 그 카페로 돌아왔다. 근데 ㅇㅇㅇ는 이미 떠나고 없다. 시발. 좀 빨리 올걸. 나 걔 번호도 없는데. 와 어떻게 번호도 안 물어봤지. 빠가 루한. 나는 그냥 나가 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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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는 백을 받자 마자 헐레벌떡 민석과 약속했던 레스토랑으로 왔다.
"아 오빠는 왜 월요일 점심부터 불러내고 난리야."
"야 너 어제 외박했다며. 어떻게 된거야."
"오빠는 어떻게 알아? 우리 엄마가 벌써 말했어?"
"너네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안 말했겠냐."
"와 진짜. 사람들 너무하네."
"너 어디서 잤어. 설마 크리스? 야 그 새끼 쓰레기야. 만나지 말랬잖아."
"나 어제 크리스한테 차였어. 상기시켜줘서 고맙네. 그래서 내가 술 퍼마시다가 필름 끊겼는데 일어나보니 어떤 남자..."
"야 ㅇㅇㅇ! 미쳤어? 모르는 남자 집에서 잤다고?"
"아니 근데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잠만 잤어. 그리고 내 핸드백도 갖다주고 착한 사람 같아."
"한 80살 먹은 할아버지야? 널 왜 안 건드려."
"진짜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근데 내 생각에 그 사람 게이같아. 되게 착한 게이. 몸은 되게 좋은데 얼굴도 곱상하고 말투도 이상해."
"몸도 봤다고? ㅇㅇㅇ!"
"아니 그 사람이 자고 있었을 때 내가 깨어났거든. 근데 벗고 자더라. 아 당연히 속옷은 입고. 아 오빠도 그만해. 나 이미 엄마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그만 그만."
한없이 어린애로만 알았던 ㅇㅇ이가 이상한 외국 변태랑 사귀질 않나, 민석은 요즘 ㅇㅇ이가 점점 신경이 쓰인다. 쟤 저러다가 어디 이상한데로 빠지는 건 아닌지.
민석에게 ㅇㅇ는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이다. 애기때부터 알아왔던 ㅇㅇ이가 어느 순간부터 여자로 다가왔던게 고등학교 1학년때인가? 그때 ㅇㅇㅇ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열렬히 사랑했다보다는 그저 귀엽고, 사겨보고 싶다 정도였다. 어린 마음에 용기내서 한 고백이 나도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좋아! 라는 비극적 결말로 끝나긴 했지만. 그 뒤로 쭉 민석과 ㅇㅇㅇ의 관계는 친한 오빠 사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민석이 군대에서 열심히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 ㅇㅇㅇ는 벌써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이제 겨우 짬빱 티 벗고 제대로 대시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이상한 외국인이랑 사귀질 않나. 심지어 그 외국인이랑 쫑났다고 엄한 남자 집에서 외박을 하지 않나. 민석은 조바심이 났다. 올해 겨울이 가기 전에 쇼부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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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학교를 뒤지고 다녔음에도 루한은 ㅇㅇㅇ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 1주일 중 6일 동안 루한은 ㅇㅇㅇ의 꿈을 꿨고 그 중 4번은 ㅇㅇㅇ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내용이었다. 4일의 꿈속에서 ㅇㅇㅇ는 매번 색다른 모습으로 루한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느 날은 고등학생 코스프레, 어느 날은 토끼 분장, 아... 또 뭐 있었는데... 아 맞다, 그 조그만 입으로 사탕을 빨며 침대 위에 누워 있었지. 꿈을 꾸는 동안은 황홀했지만 루한은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속옷을 빨며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아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1주일 내내 낮에는 눈이 빠지도록 ㅇㅇㅇ를 찾아다니고, 저녁에는 술로 허전한 마음을 지새고, 밤에는 꿈속의 ㅇㅇㅇ와 함께 뜨겁게 보내다 보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루한은 일요일 저녁 자신에게 꽐톡을 하는 박찬열을 물리치지 못했고 동네 바에서 듣는 둥 마는 둥 박찬열을 상대하고 있다. 이 병신 같은 자식도 내 친구라고.
"아니, 내가 사과까지 했는데. 밤마다 집앞에서 기다리면 한번은 나와줘야 되는 거 아냐?"
"그치... 나와야지..."
"아니 근데 내가 이번에는 좀 잘못한 거 같기도 하고. 아 그럼 안 나올 수도 있나?"
"그치... 안 나올 수도 있지..."
"야 이 사슴새끼야 너 제대로 내 말 안 들을래?"
"이 병신아. 술먹을땐 곱게 혼자 마셔. 바쁜 사람 불러내......."
딱 1주일 전 ㅇㅇㅇ가 그 때 그 자리에서 처럼 술을 마시고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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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멸구님, 비타민님 감사합니다.
능글루한 때 암호닉을 받긴 받았었는데 새로운 시리즈니까 새롭게 할게요! ㅋㅋㅋ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댓글도 하루에 몇번이나 읽고, 다시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