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의 법칙
민윤기의 얼굴이 완성한 하이틴 로맨스에 잠시 허우적거리다가 정신이 든 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아까 대화를 하면서 본 일본어 연구실로 뛰었다.
그리고 문 앞에 도착해서야 민윤기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남준쌤이 우릴 불러서 여기까지 왔다는 걸 떠올린 거지만.
“너무 오래 서있던 것 같아서. 빨리 들어가자.”
목소리가 덜덜 떨리지 않길 바라며 민윤기에게 이야기하니 날 어이없단 듯 바라보던 민윤기는 잠시 헛웃음을 짓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도 난 민윤기가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민윤기한테 빠져서 우리 집 기둥을 뿌리채 뽑아 바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민윤기의 웃음이 내게 미친 파장을 고민하는 사이에 문 앞에선 민윤기는 대충 노크하더니 금세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왜 저러는 거야. 진짜"
다른 애들이 들으면 도끼병 같다고 하겠지만, 지난 1년간 들려온 소문이나 봐온 모습들을 보면 민윤기는 어떤 여자에게도 제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민윤기가 웃는 모습을 직접 본 여자애도 우리 학교에는 없었다.
그런데 민윤기는 오늘 아침부터 너무 많은 예외를 나한테 허용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워도 화내지 않고, 자신의 걸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나에게 맞춰 걷는 것, 환한 웃음까지.
이 모든 예외 속에서 난 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다 못해서 걸음을 옮기는 내내 팔에 스치는 민윤기의 팔과 가까이서 들려오는 숨소리까지 의식해야 했다고! 도대체 이 모든 예외가 나한테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도, 그냥 단순한 호감도 나한테 결코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울리고 있었으니까.
"우리 탄소 안 들어오고 뭐 해?"
민윤기가 들어가고도 머리를 쥐어짜가며 이 모든 상황이 오해일 확률따위를 점치고 있었을까, 남준쌤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민윤기가 들어가고도 들어오지 않는 내가 이상했나보다.
“아, 뭐 좀 생각할게 있어서.”
“무슨 생각? 선생님 생각했어?”
연구실 안에서 민윤기가 들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 심정에 대해 토로할 순 없는 노릇이라 대충 생각할게 있다고 둘러대니 남준쌤은 건수 하나를 잡았다는 듯, 능글맞게 굴어왔다. 평소라면 같이 받아쳤을지도 모르지만 민윤기로 인한 심력소모가 컸던 난 차갑게 쌤을 쳐냈다.
“쌤, 장난으로도 그런 말 하지마세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 없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탄소 네가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는 나한테 아주 깊이 감사하는 날이 있을 거야.”
“아뇨. 없는데요.”
능글맞기 그지없는 선생님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더 상대하지 않고 연구실로 들어서니 언제 웃었냐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우릴 바라보고 있는 민윤기가 눈에 들어왔고 잠시 쫄아서 쭈구리가 될 뻔 했던 난,
"윤기 넌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니면 표정 좀 풀어라. 탄소 겁먹겠다."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남준쌤의 목소리에 짜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계속될수록 차가워진느 민윤기의 표정을 보고 저런 장난이라니. 물론 난 진짜 겁먹었지만. 남준쌤의 표정을 놀림이 가득해서 누가봐도 장난이었다.
그런 쌤과 대답하지 않는 민윤기를 관찰하면서 선생님이 그만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의 시선이 날 향해왔다.
“왜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으라고, 할 일 있거든.”
할 일? 새학기 첫 날 아침부터 할 일이 뭐가 있는지 고민하면서 민윤기의 맞은편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어어어. 거기 말고, 윤기 옆에 앉아. 같이 할 일 있어.”
그렇지 않아도 어색한데 나란히 앉으라는 말에 이번엔 내 표정이 굳는 느낌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민윤기의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남준쌤은 분명 전생에 내 원수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할 일이 뭔데요.”
내가 옆자리에 앉아마자 이제껏 말없이 앉아있던 민윤기의 입이 열렸다. 의문문인데도 물음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만약 할 일이 없다면 선생님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만 같은 서늘함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서늘함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선생님은 오히려 해사하게 웃으면서,
"우선 사물함에 넣을 이름표부터 자를래? 오늘부터 쓸려면 그렇게 해야 되니까."
사물함에 넣을 이름표를 자르라고 넘겨왔다. 이상한데서 부지런한 선생님의 모습과 첫 날부터 나온 노동거리에 한숨을 삼키며 종이와 가위를 받으려 하는 순간
“아, 이것도 있다. 3월에 앉을 자리 뽑을 건데. 난 제비 등교 순서대로 뽑거든. 두 사람은 배정해준 대로 앉고, 이거 자르고 올라가서 등교하는 순으로 뽑아서 바로 앉게 해. 결과는 칠판에 바로 적고, 난 조회시간에 확인할 거니까. 별로 안 어렵지?”
폭탄과 함께 바로 숫자가 적힌 용지와 반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용지를 나눠서 우리 품에 안겨준 선생님은 선도를 서야 한다며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선생님이 그렇게 떠나고도 잠시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우리는 한숨과 함께 종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애초에 호전고에서 마이페이스로 제일 유명한, 포기하면 편한 선생님인 남준쌤을 상대로 화내는 건 소용없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끝내는 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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