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ROOKIE
네번째 손가락에서 반지를 뺀지 어림잡아 2년 반, 표지훈과 우지호는 연인사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 연락이 없었다. 둘만의 세계에 갇혀있던 그들에게는 사회에 적응하는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몇달 후, 먼저 연락이 온건 표지훈이었다. 너네 집으로 갈께.
* * *
"오랜만이네."
그러게, 우지호는 연신 술만 들이켰다. 넓은 거실바닥에 안주거리와 술병들이 널브러졌다. 어색한 기운이 가득했다. 빳빳히 다려진 하얀색 와이셔츠, 딱 맞는 검은색 정장자켓, 표지훈은 거리감이 들정도로 멋있어졌다. 우지호는 팔을 뻗어 병목을 잡고 잔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팔꿈치까지 오는 얇은 티셔츠에 드러난 팔뚝이 말랐다. 표지훈은 우지호의 손목을 잡았다.
"너, 이거 아직도 껴?"
우지호의 약지 손가락에 껴진 반지를 응시했다. 대학로 길거리에서 산 3000원 남짓한 반지, 이미 문양은 닳아 보이지도 않고 싸구려 도금은 벗겨져 흉했다. 표지훈은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지었다.
"……."
제 손을 빼내는 순간, 술잔을 건드려 잔이 엎어졌다. 알코올 향이 진동했다. 아, 닦을꺼 가져올께.
* * *
물을 틀었다. 제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존나 한심해보였겠지, 우지호는 허탈하게 웃었다. 마른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쓰레기통과 거실에 앉아있는 표지훈의 뒷모습을 흘겼다. 반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마른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표지훈은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우지호가 자리에 앉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어릴때 불장난 같은거잖아, 지난일에 그만 연연하자."
우지호는 마른 오징어를 씹었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했다. 질겅질겅, 찢어진 눈매가 표지훈을 향했다. 알아.
* * *
자정을 넘어서야 표지훈은 돌아갔다. 소꿉친구지만 엄밀히 따지면 전애인, 집에서 자고 가기도 껄끄럽다. 우지호는 형식적인 인삿말과 함께 표지훈을 보냈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뒷정리를 하는건 우지호의 몫이였다. 안주 부스러기들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을 치웠다.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우지호는 쇼파에 기대어 바닥에 앉았다. 아직도 술냄새가 올라온다.
"병신새끼."
우지호는 형광등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졸업 후에도 헤어진 후에도 잊은적 없었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려고 해도 표지훈에게 죄를 짓는 기분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표지훈에게는 한 순간의 충동적인 감정일지몰라도 우지호에게는 매워지지 않는 흔적이었다.
* * *
[우리집 올래?]
연락한번에 당장 집을 찾아갔다. 빈말이던 아니던 우지호에게 상관 없었다, 표지훈 얼굴 한번보는게 제 체면보다 우선이었으니까. 표지훈의 집은 컸다. 원래 집이 잘사는건 알고 있었지만 사귀던 시절에도 제 집에 데려온적은 없었다. 내가 쪽팔렸나…, 우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벨이 울리자 문이 열렸다. 하얀 얼굴의 쳐진 눈매, 선한 눈동자.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 젊은여자가 서있었다.
"아, 우지호씨세요?"
"네, 그런데요."
들어오세요, 여자는 눈고리를 접어 웃으며 문을 열었다. 우지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여자가 이끌어주는대로 들어갔다. 표지훈한테 여동생은 없었던것같은데…, 궁시렁 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주방에서 그릇에 사과와 과도를 들고 나왔다.
"앉으세요ㅡ."
"아,예."
우지호의 태도는 대놓고 언짢았다. 여자는 연연하지 않고 코랄색 매니큐어가 예쁘게 잘 발린 손으로 사과를 깎았다. 사과껍질에 살이 두둑두둑 붙어나왔다. 보다못한 우지호는 여자에게서 과도와 사과를 빼어들었다.
"제가 깎을께요."
우지호는 묵묵히 사과를 깎았다. 여자는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우지호를 바라보았다. 얇게 깎인 사과껍질은 또아리를 틀었다. 정확하게 사과는 8등분 되었다. 여자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지호씨, 잘하시네요! 하지만 우지호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그런데 누구세요?
"아, 지훈이한테 제 이야기 못들으셨구나."
여자는 또 눈고리를 접어 웃더니 우지호가 자른 사과 한조각을 제멋대로 입안에 넣었다. 조그마한 입술이 오물오물 거리며 사과를 씹어넘겼다.
"저 지훈이 여자친구예요, 지호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표지훈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이질감이 들었다. 적개심이 든것이 거의 육감적인 반응이였다는것에 우지호는 제 자신에게 소름이 돋았다. 여자 생겼다는 이야기는 안했잖아, 자신이 자른 사과를 집어먹는 여자가에 화가났다. 단지 그뿐이다. 아직도 표지훈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는 제 자신이 비참해졌다, 그들은 현실이였고 자신은 동떨어진 이상이다. 헤어진 전 애인에게 더이상 치졸한 감정을 느낄 필요없다. 어느새 여자는 지호가 깎인 사과를 다먹어 접시를 비웠다. 우지호는 여자를 째렸다. 하지만 여자는 멀뚱히 헤헤 하고 웃을뿐이었다. 우지호는 하나남은 사과를 마저깎았다.
"지훈이가 지호씨 이야기 진짜 많이해요."
"그래요."
"자기일 되게 열심히 하는 친구라고 그러더라구요."
네, 친구… 그렇죠. 그 단어가 왜 그렇게 우지호의 마음을 들쑤시는지. 표지훈한테 듣는것도, 이제는 제 옆자리를 대신한 여자의 입술에서 듣는것도 만만찮게 충격이었다. 사회가 우지호와 표지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지호는 이상안에서 발버둥쳤다, 하지만 이자리에서 현실로 처절하게 곤두박질쳤다. 친구, 작게 읖조렸다. 괴리감 속에 빠져있던 우지호의 정신이 든것은 과도가 그의 손바닥을 깊게 벤 후였다.
"지호씨, 괜찮아요?"
"아, 예. 괜찮습니다."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여자와는 달리 우지호는 침착했다. 다른손으로 흐르는 피를 억누르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손바닥을 대고 피를 씻어냈다. 아렸다. 피가 다 씻겨나가도 수돗꼭지를 잠그지 않았다. 화장실 문 밖으로 발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우지호의 손바닥은 세찬 물줄기에 더 찢겨졌다. 멍하니 물을 잠궜다. 화장실 문을 열자 밖에 있는건 표지훈이었다. 마치 화목한 부부 사이에 낀 내연녀 같네. 우지호는 허탈하게 웃었다.
"우지호 손 왜그래."
"좀 베였어."
표지훈의 시선은 여자에게 돌아갔다. 넌 손님한테 칼을 왜 맡겨,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여자는 한없이 작아졌다. 표지훈과 눈도 못마주치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사실상 칼을 잡은건 우지호의 자의니 이 자리를 중재하는것도 우지호의 몫이었다.
"내가 깎겠다고 한거야, 니 얼굴 보려고 온거니까 이만갈게."
표지훈의 손을 뿌리쳤다. 우지호, 낮은 음성이 자신을 불렀지만 서슴없이 집을 나갔다. 더이상 이 현실에 있고 싶지않았다. 단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에, 그 여자가 아닌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는 그 유치한 사실하나에 가슴이 뛰는 우지호는 아직도 물밑이었고, 이상이었다. 한없이 다 타없어질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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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실 피코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