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미리 써놓은 게 있어서
이렇게 여유있게 오네요...^_^
이젠 분량도 쎄굿봐 ^_ㅠ
메리크리스마스, 여러분!
너를 보았고, 너는 모르고. |
“눈 봐. 눈이 장난 아니야.” “그렇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모습이였다. 느리게 내려오는 큼지막한 눈들을 멀거니 구경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후에 고생하겠네.” “그런 생각 밖에 없는 거야? 무드 없긴.” 샐쭉하게 웃어보이는 남자에 성규 또한 똑같이 웃음을 지었다. 남자한테 무슨 무드를 바라는 거야? 일부로 퉁명스럽게 되물으니 남자는 하긴, 그렇지ㅡ, 하는 반응을 보이며 찬찬히 성규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느낌이 좋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끝에 애정이 너무 가득해서 좋다. 좋을 수 밖에 없다. 성규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눈도 오고 그러니 빨리 헤어지기 싫은데.” 말꼬리를 길게 늘리는 말에 성규는 자못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씰룩였다. “그럼 영화라도 보던가.” “그게 좋겠다.”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영화 보지 않을래?”하고 권유하는 남자에 성규는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못 당하겠다. 안 잡을거야? 손을 뻗으며 낮게 말하자 성규는 그 손을 잡았다. 아, 따뜻해.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기대면 기댈수록 따뜻하고 포근한 남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규는 시선을 돌렸다. 옆에 있는 커다란 전신거울에 통해 보이는 것은 성규가 아니였다. ㅡ누구? 눈을 떴을 때, 성규는 미칠듯한 갈증을 느꼈다. 손끝을 더듬거리며 갈증을 해소시켜줄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소용 없다. 팍 상한 표정으로 느리게 몸을 일으켰을 때는 오전은 물론이고 오후 시간이 된지 한참이나 된 후였다. 엄청 잤구나. 몸에 뻐근함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을 때 성규는 부글부글 끓는 울렁거림에 입을 틀어막았다. 미치겠네. 기억 하나 받고 이렇게 고생하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거래에 응하는 게 아니였는데. 성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 엿 먹는 기분이네.” 작게 푸념한 성규는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침대 밖으로 나갔다. 일어나는 순간 눈 앞이 뿌옇게 변했다. 정신이 멍해지고 중심이 제대로 서질 못하자 기우뚱 뒤로 넘어간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성규는 일어서 있지 못했다. 뒤에 바로 침대가 있어서 다행이다. 후, 짧게 숨을 뱉은 성규는 또렷해진 정신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아, 이래서야 회사로도 가지 못하겠다. 꽤나 자유로운 회사여서 사원이 오는지 안 오는지야 신경을 안 쓰는 주의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냥 이렇게 쉴까. 하지만 또 기억을 오랫동안 갖고 있는 상태로 있긴 싫다. 이런 기억들이 머리에 가득하다면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 원래 못 자지만. 팔을 들어올려 두 눈을 가린다. 모든 게 어두워지면 편해져야 할텐데. 편해지기는 커녕 이상한 것들이 가득 지나간다. 이래서야 눈도 못 감겠다. 팔을 내려 다시 눈을 뜬 성규는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까부터 계속 한숨만 쉬는 것 같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한숨 쉬는 거 말고는 딱히 없다. 그나마 움직이는 게 나을텐데. 몸을 옆으로 돌린 성규는 협탁 위에 올려져 있는 제 핸드폰을 멍하니 응시했다. 미동도 없던 핸드폰이 아까부터 웅웅 울리고 있다. 전화 받을 힘도 없는데. 수신자는 한 번 끊겼음에도 포기 없이 또 전화를 건다. “무슨 이성열 같은……, 이호원이네.” 하긴 그 녀석이 끈질기게 전화를 걸 인물이 아니다. 액정에 또렷이 보이는 호원이란 이름에 눈썹을 꿈틀거린 성규는 느린 속도로 핸드폰을 집었다. “왜.” ‘오랜만에 회사에 오니 네가 안 보여서.’ 일주일만인가. 작게 중얼거린 성규는 입술을 씰룩였다. “내가 거기에 꿀 숨겨놓은 것도 아닌데 왜 있어?” ‘꿀 있는 것 마냥 회사에 왔었잖아, 너.’ 핸드폰 너머로 웃음기 서린 어조가 잘 들려온다. 그랬나ㅡ, 열심히 회사로 출근한 기억은 없었는데. ‘네 일은 잘 되어가?’ “일?” 그제서야 안부를 물어오는 호원에 성규는 삐딱한 어조를 내보였다. ‘안 되는구나.’ 성규의 기분을 바로 잡은 걸까. 금방 말을 내뱉는다. 호원의 재빠름에 입을 달싹이다가 만 성규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고생해라. 이만.’ 이런 재미 없는 새끼. 1분도 채 안 되는 대화를 하려고 그렇게 전화를 건 거야? 뚝, 끊겨버린 핸드폰을 매섭게 노려보던 성규는 이내 핸드폰을 멀리 던지고는 몸을 반대로 돌렸다. 또 잠들었나. 성규는 멍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몸도 마음도 피곤하니 도망치듯 잠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성규로서는 잠이라는 존재는 성규의 직업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신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흘러가듯 남의 공간에 온 것은 꽤나 뼈 아픈 실책이다. 성규는 작게 혀를 찼다. 여기는 어디야? 그렇게 주변을 둘러볼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성규의 몸이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은 나란히 서 있었다. 행복한 표정? 그들 주위로 흩날리던 따뜻한 기류? 성규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죽고는 못 살겠다던 그 표정?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바뀌었다. 성규를 괴롭히던 것들이 바뀌었다. 남자의 표정은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얼굴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남자, 여승우는 어리둥절한 표정. 거기에 경계심마저 더했다. 그 둘을 보고, 주변을 다시 한 번 보게 된 성규는 그제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긴 남의 꿈속이 아니다. 성규의 꿈이였고, 성규가 보는 미래였다. 남자는 승우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을수록 승우의 표정은 처참히 구겨진다. 종내에는 크게 충격 받은 표정. 그러자 남자는 상처 받은 얼굴이 되었다. 정말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은 얼굴에 그것을 지켜보던 성규는 가슴 한 쪽이 미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 남자보다 더 아픔을 느끼는 기분이다. 입술을 깨물고는 주먹으로 가슴을 작게 치던 성규는 무언가 부정하는 남자의 행동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승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러자 남자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승우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금방 뿌리쳐진다. 승우는 더러운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다가 도망치듯 뛰어간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승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성규는 느릿하게 남자 쪽으로 돌렸다. 남자는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우를 잡았던 손. 오히려 자신이 더 긴장되고 아픈 느낌이다. 남자는 이내 헛웃음을 내뱉는다. 전혀 유쾌하지 않은 미소. 마른 웃음을 내보이던 남자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성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저 힐끔 보고 말 남자를. 승우에게서 받은 기억 때문에 신경 쓰이고, 미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성규가 느리게 팔을 뻗었다. 제 손이 눈을 가리며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어깨에 닿았을 때, 성규는 눈을 부릅 떴다. 도심의 배경은 사라진다. 바로 앞에 있던 남자고 사라졌다. 튕겨졌다. 성규는 몸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쥐어짜듯, 성규를 괴롭히던 기분이 사라지자 다시 보이는 것은 문이였다. 갈색의 문. 단아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문은 상처라도 난 것처럼 긴 상흔이 그어져 있었다. 흰 공간에 유일한 통로. 망연한 기분을 느끼며 그 문을 응시하고 있던 성규는 이번엔 팔을 뻗을 수 없었다. 누구의 문인지 알 것 같아서 건들 수가 없다. 아까와는 정반대로 뒷걸음질을 치던 성규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벼락에 섞여들었다. “일어나, 김성규.” 물벼락은 현실이였구나. 정신 없는 가운데에서도 들려오는 목소리에 성규는 작게 입을 벌렸다. “……썩을 놈.”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온통 검은색으로 맞춰진 느낌의 야수 같은 남자였다. 어디서 깡패질이나 할 것 같은 무뚝뚝함을 보여주는 남자의 손에는 언밸런스하게 꽃모양의 컵이 들려져 있었다. 약간 기우뚱하게 되어있는 컵은 연신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르는 물은 성규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중이다. 성규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컵을 거두웠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갈라지는 성규의 음성을 묵묵히 듣고 있던 남자는 제 가죽재킷을 털어냈다. “나도 이런 실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남자의 검고 짙은 눈이 성규를 힐끔 보다가 사라진다. “내 감이 여기를 오라고 해서 말이지.” 아아, 그래. 남자, 이호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호원이라서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옳은 답을 내보이니까. “열쇠는 저번에 복제해놨어. 미안.” 전혀 미안함이 보이지 않는 어조였지만 성규는 어이 없는 기분보다 오히려 웃고 싶은 기분이 가득 들었다. 그리고 끝내 마른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건조한 그 웃음에 호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뭔가 있구나.” 나른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성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