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자친구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사각거리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허공을 응시하며 소녀는 제 머릿속에 담긴 생각들을 계속해서 읊어나갔다.
"…그건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잖아요."
잠자코 소녀의 이야기를 옮겨 적던 여자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오마주라고 해요."
소녀는 질세라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아니, 그건 표절이야."
결과는 소녀의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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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는 너무나 연약했다. 앞으로의 비극을 암시라도 하듯 세 살 때 크게 열병을 앓은 이후론 앞을 보지 못했으며 그것은 앞으로 닥칠 고요한 폭풍의 서막에 불과했다. 색깔이 퍼져 있는 듯 초점도 잡히지 않고 사물을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 이건 이렇겠구나. 저건 또 그렇겠구나. 하고선 세 살의 기억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상상으로 그려나갔다.
소녀는 버림받았다. 그녀에게 장애가 있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 소녀의 부모는 무엇이 그리도 겁이 났는지 아이를 버리고 떠났고, 그 때문에 아이는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고야 말았다. 이른 시일 내에 대처를 했더라면 조금이라도 개선 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그때라는 것을 놓쳤기 때문에 소녀는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만 했다.
"상처가 조금 아물었네요."
"…왜 어제 안 왔어요?"
"환자들이 많아서요. 당신만 아픈 건 아니랍니다."
소녀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고, 사람들에게서 외면받을 때마다 자해를 했다. 그것이 소녀가 현재 정상적인 삶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정신 병원에 들어가 있는 이유였다.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사랑으로 보듬어 줘야 마땅했으나, 피폐한 정신병원의 삶이 으레 그러하듯 소녀는 의료진들에게서 별다른 관심을 받진 못했다.
소녀는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곤 했다. 그래서 소녀를 도우러 온 자원 봉사자들에게 의도치 않은 낯뜨거운 질문을 던질 때도 잦았다.
"꼭 사랑을 해야만 섹스를 할 수 있어요?"
모두가 시선을 회피했다. 소녀는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누가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자원 봉사자들은 그 점을 다행이라 여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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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녀를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개의치 않다는 듯 매일 밤 소녀에게 사랑을 속삭여 주었다. 소녀가 성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소녀를 유혹해 매일 밤 잠자리를 가졌다. 그래서 그때의 소녀는, 그게 사랑인 줄로만 알았다.
그 남자의 말만 믿고선 자기 자신을 모두 내주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소녀는 그것이 사람들이 으레 정상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사랑이 아니었을까?
소녀는 끝내 알지 못했다. 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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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색을 두 눈에 담아낼 순 없었지만 소녀는 책을 좋아했다. 물론 여건상 직접 책을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일주일에 한 번, 책 읽어주는 자원 봉사자들이 오는 날을 손을 꼽아 기다렸다. 좋아하는 책들은 미리 녹음해 두어 일주일 내내 그것만 죽으라고 듣곤 했다.
소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어찌나 오래 들었는지, 테이프가 늘어져 여기저기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소녀에게 있어서 그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녀는 이미 책의 모든 내용을 꿰뚫고 있었기에. 뫼르소가 진심을 담아 내뱉던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환기 좀 하고 살아요. 또 그 책 들어요? 정신병 걸리겠네, 나 원 참."
간호사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간과했던 것은, 소녀는 이미 정신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소녀에게 무신경했다.
소녀는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 소녀를 담당해주는 정신과 의사가 개인적인 일로 병원을 떠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신병원에 발을 들이려는 의사가 없어 소녀는 자그마치 한 달이나 사람을 기다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또 공감해줄 단 한 사람을.
"이쪽으로 오세요."
소녀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는 남자에 소녀는 깜짝 놀라며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소매가 긴 환자복으로 제 손목을 감췄다. 들키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기억. 남자는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며 소녀를 안심시켰다.
"온도는 어때요? 따뜻하니 괜찮죠?"
방 온도가 적절한지를 묻고, 혹시 추우면 덮으라며 직접 담요까지 내주었다. 제 마음을 간지럽히는 그 남자에 소녀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아, 제 이름이요? 김남준 이라고 해요. 이번에 새로 배정받았어요."
…김남준. 소녀는 소리 내 그 남자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그 포근한 이름 석 자가 자꾸만 제 머릿속에 박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소녀였다.
"편하게 남준 선생님이라 불러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저와 이야기를 나눌 거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다정한 사람. 소녀는 생각했다. 그를 직접 보고, 어루만질 수도 없었을뿐더러 그에게 눈코입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소녀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허공에 손짓해가며 남자에게 이야기했다. 소녀는 난생처음 부끄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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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상담 의사와는 다른 남준의 친절한 모습에 호감을 느낀 소녀였지만, 소녀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린 그 날 이후로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쁜 마음으로 찾아온 자원 봉사자들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휘갈겨 놓는 날도 더러 있었다.
소녀는 침묵을 고수했다. 남준은 지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그 자리에서 소녀가 먼저 이야기해주길 잠자코 기다렸다. 몇 주 동안이나 진전이 없던 제자리걸음 뿐인 상담이었지만 남준은 개의치 않고 기다렸다. 늘 기다렸다.
"오늘도 저랑 얘기 안 할 거예요?"
"……."
"그래요, 알았어요. 감기 조심하고, 다음 주에는 꼭 저랑 인사하기예요?"
배정된 상담 시간인 한 시간 동안 소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준은 혼자서 한 시간을 채우는 원맨쇼를 벌여야만 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기도 하고, 얼마 전 요리를 하다 화상을 입은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허나 소녀는 여전했다.
소녀를 담당하는 간호사가 소녀를 데리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이 있었는지 남준이 노트 한 권을 들며 말했다. 물론 소녀에게 그 노트가 보일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자원봉사 해주시는 분한테 받았어요. <알사탕>. 멋지던데요."
순간 소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글은, 표절이에요.
"에이, 이게 무슨 표절이에요. 오마주일 수도 있고, 습작일 수도 있죠. 아무렴 어때요? 저는 정말 재밌게 읽었는걸요. 글 정말 잘 쓰시던데요."
소녀의 가슴이 다시금 두근거렸다. 그렇게 병실로 돌아온 소녀는 난생처음으로 일주일에 단 한 번 있는 상담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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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한 번 감히 읽어봐도 괜찮죠? 여기 이 구절요."
"……."
"…일렁이는 파도는 남자의 숨을 옥죄였다. 남자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알사탕을 조심스레 삼켰다. 목구멍 너머로 질척이며 넘어가던 알사탕은 남자의 숨을 막아섰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아늑한 오후, 시계는 2시 45분을 가리켰다."
소녀는 부끄러웠다. 제가 썼던 글을 남준이 칭찬을 하며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단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어떻게 제 글을 다 읽어볼 생각을 하셨을까. 소녀는 제 글을 다시는 남준이 찾지 못하게 감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울하고 분명 위태로운 상황인데, 또 답지 않게 너무도 아늑해요. 남자가 숨을 거두는 그 장면이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순 없을 것 같아서, 저는 이 구절이 제일 좋았어요."
남준은 신이 나선 노트를 뒤적이며 제가 마음에 들어 했던 구절을 모조리 읊기 시작했다. 소녀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건 부끄러운 낙서예요, 라고.
"제 평생 이렇게 제 마음에 쏙 드는 낙서는 없었어요. 그리고 낙서면 또 어때요. 그것 또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는걸."
소녀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남준을 싫어할 수 있을까. 소녀는 가슴에 멍울이 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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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도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소녀를 돕고자 자원했던 봉사자들도 소녀를 두고선 '어딘가 이상한 아이'라며 가까이 가길 어려워했다. 그러나 남준은 달랐다. 소녀의 글을 무시하곤 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소녀의 글이 마음에 쏙 든다며 칭찬해 주었고, 단순히 칭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그런 심오한 얘기까지 나누기도 했다.
가방끈이 짧았던 소녀는 가끔 남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남준은 늘 소녀가 알기 쉽게 단어의 개념을 풀어서 설명해 주거나, 소녀가 모르는 작품이 나왔을 때는 아예 그 자리에서 전권을 읽어 내려가곤 했다. 소녀는 그 어떠한 개인 정보도, 자기가 느끼고 있는 심정도 남준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의 얼굴엔 어느덧 혈색이 돌기 시작했고, 해사한 미소를 짓는 일도 잦아졌다.
그렇게 소녀는,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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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밝은 글도 써 보는 건 어때요? 우울한 글도 괜찮지만, 그쪽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잖아요."
남준의 그 말이 소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 날 이후로 소녀는 남몰래 연애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자신과 남준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소녀는 남준의 이름을 남몰래 A로 바꿨다. 그리곤 한참을 고민하다, 제 이름을 B로 바꿨다.
소녀는 몰랐다. 소녀를 제외한 그 모두가 그 글이 연애 이야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소녀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자원봉사자도, 그 글을 이후에 접하게 된 남준도. 그렇게 남준은 소녀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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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남준에게 글을 보여주고 싶어 노트를 제 품에 꼭 안고선 간호사와 함께 상담실로 향한 소녀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음에도 남준은 소녀에게 왔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소녀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남준이 있어야 할 자리에선 낯선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163번 환자분 맞으시죠? 그쪽에 앉으세요."
소녀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남준은 정식 상담사가 아닌 임시로 발령받은 보조였던 터라 정식 의사가 구해지자마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는 것 말이다. 소녀는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진 남준을 그리워했다. 어찌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이제는 눈물이 흐르지도 않아 소리만 내어 울 뿐이었다. 간호사는 그런 소녀를 두고선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소녀는 고민했다. 그간 소중히 간직했던 남준과 자신의 이야기를 찢어 버릴 것인지, 혹은 저 어딘가에 남겨둘 것인지. 소녀는 이야기를 채 끝맺지 못한 채로 침대 옆 선반 위에 노트를 올려 두었다. 그리고 소녀는 두 번 다시 그 노트를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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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는 다른 아침을 맞이한 소녀였다.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귓불이 찢어질 듯이 추운 병실이었는데, 답지 않게 따뜻하고 아늑했다. 소녀는 이 온기를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그 자리에 누워 그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깼어요?"
그리운 그 목소리. 남준이었다.
남준은 그간 학교 실습과 과제, 세미나 따위에 치여 병원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일방적인 통보로 해임되었다며 병원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소녀는 그런 남준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빨리 찾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한 남준에 소녀는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모른다.
남준은 소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남준이었지만 소녀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소녀는 가끔 남준의 소매 단추가 엇갈렸다거나 넥타이가 비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남준은 바빴다. 그런 남준을 소녀는 볼 수 없었다.
허나 볼 수는 없어도 들을 수 있었다. 소녀는 그렇게 청각에 의존해 제 주위를 감싸고 도는 모든 소리에 반응하려 애썼다. 남준은 그런 소녀에게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물이 흐르는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또 어떤 날은 소녀를 거리로 이끌어 빵빵거리는 차 소리를 들려주며 사람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는지를 알려주었다.
둘은 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오래된 카페를 찾아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외출을 마무리하곤 했다. 남준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밤기운이 쌀쌀해지면 소녀는 눈에 띄게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녀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남준이 제 곁으로 돌아온 이후, 소녀는 그간 찾지 않았던 노트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전하게도 남준은 A, 소녀는 B였다. 끔찍한 정신병원이 아닌 남준과 함께 걷는 공원을 상상했다. 손목이 시큰하게 아려올 때쯤이면 간호사를 불러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 헛된 생각은 꿈에도 들지 않도록.
"얼굴 폈네요. 오늘도 남준 씨가 데리러 온대요?"
간호사였다. 늘 퉁명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간호사에 소녀 또한 무덤덤하게 반응하곤 했었다. 그러나 소녀는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은 남준과 함께 영화관에 가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괜찮겠냐는 남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그와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소녀의 바람이었다.
"혹시, 남준 씨 좋아하는 거 아니죠? 남준 씨 인기 많은 거야 당연히 알 테고. 그리고 남준 씨 여자친구 있잖아요. 아, 설마 모르고 있었어요?"
하늘을 향해 자꾸만 치솟던 입꼬리가 일순간 멈춰섰다. 경직 그 자체였다. 답지 않게 당황스러워하는 소녀의 표정을 본 간호사는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냐며 헛된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상처받지 않고 더 편할 거라며 저 나름의 조언을 건넸다.
"무슨 속상한 일 있었어요? 괜찮으니까 얘기해봐요."
그날 소녀는 아무런 말도 남준에게 건네지 않았다. 남준은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자신이 소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라 생각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영화를 보기엔 답답하고 무리가 있었을 텐데, 뭐든 해보고 싶다는 소녀의 말을 정말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녀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병원으로 돌아온 소녀는 문득 타인에게 비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소녀는 정신병자다. 손목 여기저기에 칼로 그은 흔적이 가득한. 앞을 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서 고립된 지 오래라 그들과의 공통점도 몇 없다. 남준은 그런 소녀를 치료해주는 정신과 의사다. 그럼 그렇지, 하고 소녀는 읊조렸다. 감히 정신과 의사를 홀로 사랑한 자신에게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
그 이후로도 소녀는 남준과 함께 종종 외출을 하곤 했다. 그러나 소녀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남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소녀에게 더 좋은 것을 먹여주고, 더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려 했으나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소녀에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는 더 이상 자신을 B에 대입하지 않았다. 남준과의 연락이 끊겼던 그 날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만질 수 없게 그 노트를 저 선반 높은 곳에 올려다 두었다. 소녀는 결심했다. 다음번 외출 때 제 모든 감정을 털어놓고, 상처받는 한이 있더라도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말이다. 그것이 성인이 된 소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이제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저 보러 먼 이곳까지 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소녀는 남준이 먼 거리를 운전해 매번 병원을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소녀를 위해서였다. 당황스러운 소녀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남준이었다. 그런 남준의 표정을 소녀는 알 리 없었다.
"병실은 갑갑하니까, 드넓은 세상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나도 모르게 기분을 상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사과할게요."
남준은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소녀와 처음 만난 이후로 여태껏 단 한 번도 소녀의 마음을 해한 적 없었다. 소녀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억지로 삼켜내며 말했다.
"여자친구분 있는지 모르고 좋아했어요. 남몰래 그랬어요. 왜 그렇게 저한테 잘해주셨어요?"
소녀는 순간 악에 받쳐 소리쳤다. 칼로 그은 자국이 수 놓인 손목이 다시금 시큰하게 아려왔다. 소녀는 눈에 띄게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준은 그제야 소녀가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소녀의 손목을 감싸 쥔 남준이었다.
"반년 전에 헤어졌던 여자친구가 느닷없이 연애 시절 때 선물해 줬었던 시계를 돌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차고 다니지도 않았던 터라 그를 전해주려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에요. 뭔가 오해가 있었다. 그렇죠?"
소녀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오해를 풀고 이해를 했지만, 바보같이 소녀는 이미 남준에게 제 모든 감정을 털어놓은 지 오래였다. 뒤늦게 부끄러워진 소녀는 몸 둘 바를 모르며 남준에게 오늘 일은 잊어달라고 말했다.
남준은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타이밍이 꼬여버렸다며 소녀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오돌토돌한 것이 손가락에 착 감겨오는 점자책이었다. 소녀는 기억을 더듬어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이방인 A'.
소녀는 깜짝 놀라 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를 놓칠세라 책을 받아낸 남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 한 장은 백지로 비워뒀어요."
소녀는 무작정 책을 펼쳐 다급하게 훑어 내려갔다. 남준의 말에 소녀는 왜 그렇게 했냐고 물었다. 남준은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직접 두 눈에 담을 수 없었지만, 남준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이제 이 이야기가 끝나게 될 테니까요."
손에 땀이 가득했던 터라 소녀는 다시금 책을 놓치고 말았다. 이번에도 충분히 책을 잡을 수 있었음에도 남준은 떨어지는 책을 잡지 않고서 소녀의 두 손을 맞잡았다. 남준은 소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아무런 잘못 없어요. 여기 갇혀야 했던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을 괴롭혔던 그 남자였으니까."
"……."
"꺼내줄게요, 내가."
결말을 내야겠어요.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소녀는 질세라 남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 소녀의 절박함에 웃음을 터뜨린 남준은 소녀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내가 당신의 A가 될게요.
그러니 부디, 나의 B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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