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에는 향기가 없었다. 운동하는 남자의 삶이 그러한걸 어찌하겠냐 말하기엔 여자들은 땀흘리는, 그것도 번듯한 외모의 그를 싫어할 리 없었다. 그 또한 곁을 내어주지 않은건 아니였다. 마음을 내어줄때마다 하늘이 장난치듯 온갖 타이밍을 망쳐놓았던게 문제였다. 그게 몇번이고 반복되니 주변에서 ‘너 좋다는 애 아무나 잡고 만나봐’ 라고 바람을 잡아도 그는 그저 씩 웃고 말 뿐이였다. 하늘은 왜 그의 기회를 망쳤을까? 아니, 하늘은 그의 기회를 망친 적 없다. 그저 새끼손가락에 묶인 인연의 실을 마구 헤집어 놓았을 뿐. 아주 오래전부터 엉켜온 인연의 실은 지독했으나 이제 풀릴 떄가 되었다. 신이 그들을 만나게 했으니까.
초등학교떄부터 민현의 인생은 야구를 빼면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큼 야구가 전부였던 삶이였다. 고등학교를 야구부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학교도 체육학부에 입학했다. 남들과 달리 입시 스트레스 대신 시합결과에 스트레스를 받던 민현은 대학 합격 발표날 이젠 야구와 자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체념했다. 그렇다고 야구가 싫은건 아니였다. 싫은걸 몇십년동안 하는 성격도 못되었다. 그저 유일하게 잘 할 줄 아는게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였다. 평소와 같이 3시 훈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곧장 5시 훈련이 있는 터라 발걸음이 바빴다. 학교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가 그의 동네였다. 초여름의 오후, 유독 그가 좋아하는 좁은 세탁소 골목을 지나고 있을 떄였다.
“아!”
“어!”
훈련복과 야구화, 수건이 들어있던 꽤 묵직한 민현의 가방에 여자의 허벅지 바깥이 부딫혔다. 새빨개진 다리를 문지르며 쪼그려앉은 여자의 얼굴이 머리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하필 맞은 부위가 다리이니 잘 보지도 못하겠고 그저 같이 쪼그려앉아 대답없는 사과만 계속했다. 으으- 얕은 신음을 내던 여자가 어느정도 괜찮아졌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그쪽은 다친 곳 없으세요?”
여자가 고개를 들어 제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민현의 눈에서 이유없는 눈물이 가득찼다. 분명 처음보는 얼굴인데도 오래도록 그리워한듯 사무쳤다. 스물 인생에 뜨거운 사랑을 해본 적 없지만 여자를 보는 제 감정이 애끓었다.
“허”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더없이 맥락없고 황당한 감정이였다. 그런데도 제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생판 처음보는 남자가 제 얼굴을 보고 눈물을 쏟는다. 어이없는게 당연한 상황인데 남자의 눈이 너무 애처로워서, 슬퍼서 여주는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젠 제 얼굴을 감싸쥐기까지 하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뜰 뿐이였다.
“쯧쯧, 그러게 내버려 둘 인연에 괜히 상관해서는”
그들 등뒤로 머리가 하얗게 샌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누구에게 말하는건지 눈에는 눈물을,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는 말이다.
“이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지”
작고 낮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조용한 골목 어귀를 잔잔히 울렸다. 이제라도 만나 다행인 내버려 뒀어야 할 인연, 가엾은 인연이 결국 제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