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여덟은, 바다 빛을 담은 너를 사랑한 기억 뿐이었다.
나는 너의 짝이었다. 두번째 분단 뒤에서 두번째 자리. 3월의 그 어색한 풋내를 지닌 채 네 옆에 앉은 나는 묘하게도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너는 이미 인기 많은 걸로 유명한 애였고, 실은 나도 몇 번 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했었다. 왜 인기가 많은 지 알겠다고. 처음엔 정말 그게 다였다. 대단한 게 있진 않지만 모두에게 호감을 살만한, 착하고 순하게 생긴 인기 많은 남자애. 어쩌다 내가 너에게로 향한 화살표를 긋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표현대로, 그리고 네게 어울리는 그 말 그대로, 너는 어느새 내게 너의 빛을 물들이고 있었다. 쨍하게 빛나는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기엔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너와 짝이 된 이후로, 네가 나를 물들였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너와 나는 별 일은 없었다. 그냥, 나는 여전히 조용한 아이였고, 너는 여전히 인기 많은, 그리고 착한 그런 아이였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가끔 네가 건네는 의미 없는 말에도 의미를 부여했고, 예쁜 색을 정해주었다. 네가 가끔 시덥잖은 농담을 할 때는 푸른 빛을 띈 흰색, 가끔 나를 챙기는 별 거 아닌 말을 할 때는 연한 분홍색. 주로 진한 색은 아니었다. 진한 색의 말이 오가기엔 우린 그렇게 진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너의 목소리가 좋았다. 묘하게 따뜻한 느낌의 목소리가 좋았다.
5교시의 너에게선 짠내가 났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학생인 너는 점심 시간마다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기 때문이다. 점심 시간에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면 제일 밝은 빛을 띠고 운동장을 무표정으로 누비는 네가 보였다. 네가 공을 얼마나 잘 차는지, 얼마나 수비에 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었다. 저 많은 애들 사이에서도, 이 먼 거리에서도 너 하나는 선명하게 보이는 걸 보니, 내가 너를 좋아하기는 하는구나. 너는 그렇게 잔뜩 상기된 얼굴로 풀어헤친 교복을 입고 교실에 들어서곤 했다. 종이 치기 삼십초 전 즈음에 들어와선 발간 얼굴을 부채질하다 이내 곧 엎드려 잠을 청하곤 했다. 나는 이따금 너의 짠내마저 좋다고 생각했다. 네가 열심히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깨우지 않았다. 솔직하겐 별로 깨우고 싶지 않았다. 네가 엎드린 5교시 내내가, 내가 너를 마음껏 감상하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뻔한 사랑들이 있다. 인기 많은 남자와 조용한 여자. 여자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지 못한다. 남자에게 제 마음을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가 엎드려 잠을 청하는 그 순간에나 마음껏 그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살짝 보이는 남자의 하얗고 통통한 볼이 좋았지만, 가끔은 그곳에 살포시 입을 맞추는 그런 망측한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상상에, 생각에 그쳤다. 어디까지나 남자는 시끌벅적한 학교의 빛을 맡은 남자였고, 여자는 조용한 학교의 그림자를 맡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너에 대한 마음을 일방통행으로 두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처음으로 너를 바라볼 때의 나를 인정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차피 나의 마음은 너라는 빛에 대한 일방통행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음악 시간을 좋아했다. 음악이라고 해봤자 재미없는 뮤지컬 영화나 몇개 보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나는 음악 시간이 좋았다. 그 애가 흥얼거리는 허밍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애와 몇 마디 나누지 않는 조용한 짝이었고, 그래서 그 애는 나를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사도 들리지 않았고, 무슨 노래인지도 몰랐고, 알 수도 없었지만 그냥 나는 그 애의 목소리만으로 지루한 50분을 빛으로 꽉 채워 보냈다. 그 애의 목소리는 때론 따스했고, 때론 차가웠고, 때론 푹신했다. 대체로는 따스한 빛을 담는 일이 많았는데, 나는 그 애의 다정한 빛을 좋아했다. 나를 설레게 만드는 그 빛을 사랑했다.
가끔 너는 내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제게 축구가 더 잘 어울리는지, 노래가 잘 어울리는지.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거의 비슷하게 좋아했기 때문이다. 축구를 하며 많은 이들에게 둘러쌓인, 그 자체로도 반짝하고 빛나는 너도, 조용하게 내 옆 자리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수십개의 빛을 내뿜는 너도, 나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참을 뜸들여야만 했다. 너의 질문에 이렇게 오래 고민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기 때문에. 그럼에도 하나를 골라야 너와 조금이라도 더 말을 나눌 수 있기에, 너의 생각을,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그 때의 나는 둘의 너 중의 하나를 고르려 애를 썼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노래하는 너였다. 실은 난 네가 노래할 때에는 내게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노래하는 너를 골랐다. 축구하는 너는 내겐 너무도 멀어서, 이따금씩 축구하는 너를 볼 때는 내가 너에 비해 너무도 초라해보였기 때문에.
너는 진로를 정한 것 같았다. 노래와 축구 사이에서 오랜 시간을 고민하던 너는 결국 노래를 택했다. 그리고 난 후엔 야자도 조퇴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게 보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섭섭한 마음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어차피 야자시간에도 너를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신경은 온통 너였지만, 어쨌든 나는 시선만은 내 책으로 두었고, 당연하게도 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섭섭했다. 네시간 즈음 텅 비어있는 내 옆자리가 어색했다. 그럼에도 한 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네가 가수가 되면, 졸업하고서도 너를 실컷 볼 수 있겠다는, 너의 따스한 빛을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흘렀고, 너는 학교 일과 중에도 자주 나오지 않게 되었다. 점심 시간에도 더는 축구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넣어두었다. 연습생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게 된 네가 언제쯤 확인할 수 있을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네가 곧 전학을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서도 조용한 그림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 마음이었다. 네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시선으로 날 바라볼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지만, 나는 네 기억 속에 적어도 날 좋아했던 조용한 애1, 그런 미미한 엑스트라 정도로는 남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네게 남지 못할, 곧 스러질 미약한 시간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편지엔 별 게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네 흰 볼과, 동그란 뒷통수와, 미묘한 짠내, 네 목소리의 따뜻하고 몽글한 빛이 좋았다는, 그런 내용. 내가 그런 너와 사귀는 허상을 꿈꿔보기도 했다는 내용은 구태여 적지 않았다. 그런 내용을 썼다간, 난 엑스트라가 아니라 스토커 역을 맡은 조연8 정도로 남을 지도 몰랐으니까. 네 인생에서 내가 주연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엑스트라가 나았다. 아니, 이제 와 좀 더 솔직해지자면, 구차한 변명을 이제라도 그만둔다면, 나는 너에게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예쁘진 않았어도, 기억에 남지는 않았어도, 착한 애 즈음으론 남고 싶었다.
그대로 너와 나는 여름을 맞았다. 물론 나는 네가 나의 편지를 읽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너는 내게 아무 말이 없었고, 나도 구태여 상처 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학식, 왁자지껄한 애들 사이로 선생님이 너를 단상 앞으로 불러냈다. 그러고선 네가 결국 전학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예고 편입 시험에 붙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몰랐던 사실이었는지 몇몇 반 아이들의 표정에선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나는 그저 너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끄러운 1학기의 마지막, 그리고 너와의 마지막 종례를 마치고선, 나는 일부러 더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너와 함께했던 옆 자리가 나는 꽤 마음에 들었으니까, 아니 실은 아주 많이 좋았으니까. 그 때 네가 내 어깨를 톡톡, 하고 쳤다. 그러고선 작은 쪽지를 건넸다. 너는 씨익하고 웃었다. 그러고선 너의 친구들에게로 뛰었다.
말이 너무 예뻐서, 좋았어. 네 시선이 참 예뻐서, 좋았어. 고마워, 잘 지내.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조금은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네게 물들여져버린 마음을 들여다보며, 너의 짠내만큼이나 짠내나는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조금은 많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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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재환씨의 첫사랑은?
A. 몰랐는데, 세상엔 알지 못하는 사랑도 있어요. 제가 그 친구한테 가졌던 마음이 딱 그 사랑이었거든요. 사실 저 알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제가 엎드리면 그제서야 제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는 그 애의 시선을요. 아마 그 때의 저는 그 시선이 좋았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턴 잠이 오지 않아도 5교시엔 그냥 엎드리고 봤어요. 그 애가 나를 바라봐주는 그 시간이, 그 시선이 좋아서.
Q. 가수를 하는 데에도 첫사랑이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하던데.
A. 그렇긴 하죠. 제가 한 번 물어봤었거든요. 나 가수 할까, 축구 할까. 그 때 그 친구가 노래하는 네가 더 좋다고 말해줬던 것 같아요. 그것 덕분에 더 확신을 가지고 노래를 택했죠. 그리고 노래를 택하고서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또 하고 했었는데. 그 친구가 줬던 편지 덕분에 그 고민을 싹 다 잊었거든요.
Q. 편지의 내용이 어땠기에.
A. 음, 제 목소리가 몽글하다고, 또 따뜻하다고 했었어요. 다른 문장들도 많았지만, 그 말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아, 그리고 제게서 미묘한 짠내가 나기도 했다고. 그것도 기억에 남아요. 사실 그 편지 내용으로 곡을 써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아직은 제가 그 내용을 그 친구가 좋아했던 몽글한 목소리로 부를 자신이 없어요. 그 친구가 있어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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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환이 넘나 첫사랑 조작 상인 것.... 저의 글은 허접하지만 재환이는 완벽하잖아요ㅜㅠㅠㅠ 재화나 사랑해 데뷔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