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냥 망한 거다. 뭐든지 한 번 시작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었다. 나는 늘 그랬다.
그리고 그 대상이 황민현이 된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사친과 이상형의 경계_01
누구에게나 스스로 반드시 지키려는 약속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세가지 신조가 있었다.
첫째는 자기 전에 물 한 컵 떠서 책상에 올려두기. 둘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치하기. 셋째는 황민현에게는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운동회 날이었다. 나는 땡볕에서 몸을 움직이는 걸 정말 싫어했는데, 불행하게도 내 운동 신경은 나쁘지 않았다. (생긴 거와 다르게 달리기에소질이 없는 황민현이 제일 부러웠었는데.) 운동회 전 반 별로 계주를 뽑기 위해 달리기를 하고 보니 어느새 나는 계주가 되어 있었다. 그냥 달리기인 줄 알았는데, 이어달리기였다. 훌라후프 돌리기, 코끼리 코 10번돌기 등 고를 수 있는 종목이 정말 많았는데, 나는 밀리고 밀려서 앞구르기를 두 번이나 해야만 했다. 앞구르기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거였는데도, 그걸 맡으면서도 나는 연신 괜찮다고 했었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건지 어린 시절의 나는 무조건 ‘괜찮다’라는 말만 할 줄알았다. 아냐 괜찮아, 내가 앞구르기 할게 얘들아. 계주도 하기 싫었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앞구르기를 2번이나 하게 되었다.
“야 너 앞구르기 무서워하잖아. 다른거 하지 그랬어?”
“됐어, 다들 앞구르기 하기 싫어하는데 내가 앞구르기 하지 뭐. 괜찮아.”
“넌 뭘 맨날 괜찮대. 딴거 하지..”
“아 황민현 진짜! 내가그냥 한다니까 네가 웬 참견이야!”
더운 날씨에, 가장 싫어하는 종목을 맡아버린 어린 날의 나는 그렇게 황민현에게 또 화를 내고 말았다. 초딩 황민현은 내게 쫄아서 스탠드로 다시 돌아갔고, 나는 그렇게 짜증이 난 채로 이어달리기 계주 줄에 서 있었다.
“총 소리 듣고 뛸게요!”
옆 반 담임 선생님께서 달리기 출발 신호를 담당하고 계셨다. 탕!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고, 우리 반 첫 번째 주자가 뛰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주자여서 운동장 반대편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영채야!”
우리 반 세 번째 주자는 날 향해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왔다. 긴장되는 마음을 누르고 바통을 드디어 이어받았다. 우리 반은 2등이었고, 나는 반 아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최대한 열심히 달렸다. 그렇게 싫어하는 앞구르기 두 번도 꾹 참고 해내고, 나는 더 열심히 뛰었다. 결승선이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앞에서 달리고 있던 아이와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좀만 더 뛰면 우리 반이 일등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갔다.
결승선에서 열 걸음쯤 남았을 무렵 나는 1등으로 달리던 아이를 따라잡았다. 그때였다, 그 비열한 년이 팔꿈치로 내 이마를 친 것은. 나는 그 때 평균보다 훨씬 작았고, 그 1등으로 달리던 년은 평균보다 컸다. 그년은 팔꿈치를 휘둘렀고 나는 이마를 맞고 넘어졌다.
결과가 어땠냐고? 당연히 우리 반은 꼴지를 했다. 내가 넘어지는 순간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 나와서 나를 에워쌌다.
“영채야! 괜찮아?”
계주도, 앞구르기도 하기 싫었던 나는 그때도 괜찮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괜찮아. 미안, 우리 반이 꼴찌했네. 모래바닥에 휩쓸려 다 까져버린 무릎을 툭툭 털고 나는 그렇게 말했다. 영채야 아냐, 너 너무 잘했어. 쟤 뭐야 진짜?지금 너 일부로 민거지?
그 빌어먹을 년은 실수였다고 했다. 실수로 팔을 뻗었는데 내가 그렇게 작을 줄 몰랐다고 했다. 내가 이마를 부딪힐 줄은 전혀 몰랐다는 개소리만 해댔다. 쌤, 저는 괜찮아요. 라는 말로 나는 그년을 무의식적으로 옹호했고, 그렇게 체육대회는 내 맘 속에 빡침이 가득 찬 채로 끝났다.
교감선생님의 폐회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반 아이들과 헤어져서 황민현을 찾았다. 지금도 그렇듯이 우리는 늘 등교와 하교를 같이 했으니까.
"이영채!”
황민현은 땀 한 번 안 흘린 뽀송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고, 나는 내면의 빡침을 억누르고 먼저 교문으로 향했다.
그 날 집 가는 길은 유난히 조용했다. 황민현은 내가 화나 있다는걸 알았고, 그래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황민현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걸 신경 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영채, 그래서 아까 너 밀친 애한테 화는 냈어?”
“아니.”
“안 냈다고? 누가 봐도 너 일부로 밀친 상황이잖아. 왜 화를 안 내?”
그 순간 울음이 터져버렸다. 하루 종일 괜찮다고 했던 모든 일들이 안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난 또, 울면서도, 괜찮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뭐가 괜찮아. 누가 봐도 하나도 안 괜찮은데, 너.”
나는 그 말에 바닥에 쭈그려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고, 황민현은 막상 내가 우니까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늘 괜찮다고, 아무일 없다고 말하는 게 습관이었고 누구 앞에서도 큰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황민현은 내가 그렇게 크게 우는 걸 처음 봤을 거다.
“야 이영채. 왜 울어. 내가 미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미안해.”
우왕좌왕하던 황민현은 울 때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는 걸 드라마에서 봤는지, 내 머리를 작게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를 왜 두드려어-.”
“어? 미안 미안.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미안 안 할게. 아무것도 안 할게.”
그 이후로 황민현은 우는 날 가만히 지켜만 봤고, 나는 몇 분 후에 겨우 울음을 그쳤다.
“너 이거 못 본 걸로 해야 돼, 알았지?”
“알았어. 그 대신 너앞으로는 나한테는 그냥 화나면 화난다고 말해. 이 약속하면 방금 너 운 거 평생 못 본 걸로 할게.”
“너한테 화나는 일 있으면 다 말하라고?”
“응, 너 아무한테도 말 잘 안 하잖아.”
그렇게 나는 황민현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은 꼭 지켜야만 할 것 같았다.
1. 그럼 네 이상형은 뭔데?
야 그만해라, 그냥 쳐다봤다고. 라며 짜증을 내자 황민현은 그제서야 장난을 그쳤다.
하굣길은 평범했다. 우리는 늘 타던 버스에 같이 탔고, 황민현은 늘 그렇듯 자리가 생기자 나에게 양보했다. 황민현은 한손은 내 의자를 잡고 한 손으로는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어폰을 꺼내 노래를 들으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황민현은 늘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양보했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기다렸고, 아무렇지 않게 나와의 약속이 우선이었다. 싸우면 늘 먼저 사과를해왔다, 내가 잘못한 일이어도 말이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황민현에게 뭔가를 양보한 적이 없었고, 한번도 얘를 기다린적도 없었고, 먼저 얘랑 약속을 잡았어도 쉽게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고 파토내기 일수였다.
나는 아닌데, 황민현은 그랬다. 늘 내가 우선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
“야, 안 내리냐?”
또다. 오늘 두 번째다. 생각에 잠겨서 얘 목소리 듣고 화들짝 놀라는 거.
“너 오늘 무슨 일 있냐? 왜 자꾸 멍을 때려, 사람 걱정되게.”
“어? 아냐. 아무 일도 없어.”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지? 너또 옛날처럼…”
“진짜야, 진짜. 아무 일도 없어.”
“그럼 됐고. 야 맥날가서 소프트콘 먹고 가자. 더운데 내가 사줌.”
그렇게 우리는 맥도날드로 향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황민현이 주문하는걸 기다렸고, 황민현은 이내 자기 몫의 소프트콘과 내 몫의 오레오 맥플러리를 가져왔다.
왜 나는 오레오 맥플러리야?라는 물음에 황민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너 단 거 좋아하잖아. 라고 말하며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어줬다.
“너 근데 오늘 왜 이렇게 멍을 때리냐? 이상해, 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게 물어왔다.
“아냐. 그냥 더워서 그런가? 야, 근데 너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
“내 이상형? 이상형은왜? 뭐야, 나 여자 소개시켜주게? 나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아까 수정이랑 이상형 얘기 했거든.”
“음. 나 이상형 딱히 없는데? 그냥 내가 좋으면 좋은 거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애도 아니고.”
“야 너도 애거든? 무슨 누가 보면 너는 성인인 줄 알겠어.”
“에구, 땅에 붙어 다니는 영채는 몰라여~ 오빠는 이미 어른이지.”
황민현이 키가 나보다 커진 뒤에 생긴 안 좋은 습관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내 머리를 짓누르는 거였다. 쓰다듬는 거 절대 아님. 습관처럼 내 머리를 꾹- 누른 뒤에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아 근데, 나 응답하라 시리즈 좋아해.”
“뭐, 어쩌라고.”
“네가 이상형 물어봤잖아. 나 응답하라 시리즈 좋아한다고.”
“그게 뭔 상관인데, 나는이상형을..”
“야, 그니까 내 말은. 너 그거안 봤어? 거기 여주들 다 개 예뻐. 정은지랑, 고아라랑, 혜리랑. 주변에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람 없어. 오빠 눈 높다.”
얘가 진짜 답답하게 구네. 나는 네 이상형을 물어봤지, 좋아하는 드라마를 물어본 게 아니에요. 답답한 황민현아.
정말 답답하다는 내 표정에 황민현은 웃음을 터뜨리며 몇 초 뒤에 이렇게 말했다.
“그니까 나는 예쁜 여자 좋아한다고.”
아, 그러니까 네 이상형이 예쁜 여자라는 거구나. 왜 돌려서 말하고 지랄이야.
안녕하세요_작가의 말+암호닉 |
안녕하세요 어제 프롤로그를 올리고 오늘 1편을 가지고 온 오보이라고 합니다..! 제가 글잡이 처음이라서 아직 좀 어색해요,,ㅎㅎ 종강하고 너무 심심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제 암호닉 신청해주신 '오레오', '뿜뿜이'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민현이의 자상함+댕댕함 을 더 잘 보여드릴 수 있게 노력할게요!! 힛 그럼 안녕히계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