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가 연애 또 하면.. 쓰레기다. 너네 집 강아지.. 이름 뭐지? 토비? 친구다... 흐끅.”
“우리 토리한테 왜 그러냐. 넌 이미 우리 토리만도 못한 존재지.”
“너는 친구가 차였는데... 몰라. 오늘은 진짜 퍼 마시고 기억도 다 잊어야지.”
“야, 내가 걔 별로 느낌 안 좋댔잖아. 딱 봐도 뺀질이었다고.”
“그래도 좋았단 말이야.. 흑흑..”
이런 나를 보며 혀를 차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예경이.
테이블 위로 하나 둘 소주병이 늘어나고, 정신도 그에 비례해 달아오르는 술자리 속에서 나는 점점 이성의 끈을 알코올과 맞바꾸고 있었다.
나는 오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것도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남자친구의 바람을 목격하고는 말이다. 평소 그렇게 친하지 않은 동기 다희가 전화를 해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받은 전화에 다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주야. 여주야. 내가 이런 말 전하는 거 잘못인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응?”
“나 너 남자친구가 어떤 예쁘장한 애랑 팔짱 끼고 코인노래방 들어가는 거 봤어. 지금 방금 사거리 코노. 그냥 간 거면 모르겠는데 팔짱도 끼고 둘이 분위기도 장난 아니어서...”
“...”
“혹시 모르니까 가 봐.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너한테 ..”
“고마워 다희야. 이만 끊을게.”
황급히 전화를 끊고 달려간 사거리 코인노래방. 마침 남자친구와 공강이 겹치는 시간이라 어디냐 물은 내 카톡에 아직 사라지지 않던 1이 달려가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워낙 좁은 노래방이라 방이 몇 개 없었는데, 다들 아직 점심을 먹고 있는 시간이라 노래방에 오지 않았는지 방 한 곳에서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죽일 놈이지 뭐, 우리가 어긋날 때면 .. ]
내가 모를 리 없는 목소리였다. 항상 노래방에 오면 그 애가 부르는 노래였으니까. 한 걸음 뗄 때마다 머리가 찡-해 오는 것을 느끼며 노랫소리가 들리는 3번방으로 한 발짝씩 걸음을 떼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방문 유리 너머를 안 들키려고 노력하며 보던 찰나, 갑자기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가 멈추고, 방 안에 있던 남녀가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
멈춘 노랫소리처럼 내 생각회로도 멈추어, 망설임 없이 노래방 문을 벌컥 열었다. 누군가가 방해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는지, 방 안의 남자와 여자, 다시 말하면 내 남자친구와 모르는 한 여자가 나를 앙칼지게 쳐다봤다. 물론 그 후 남자 쪽의 표정은 말도 안 되게 일그러졌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끝났음을 서로 알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방문을 세게 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눈물을 참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도 잠시, 누군가 내 팔목을 세게 붙잡았다.
“어.. 어. 여주야.”
“내 이름 부르지 마.”
“아니, 얘기 좀 들어봐.”
“듣고 할 게 뭐 있어? 끝난 거로 해. 헤어져.”
내 팔목을 잡은 손을 세게 내치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집으로 향했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에 전화번호를 지우고 스팸처리를 해둔 후, 카톡도 차단했다. 이렇게 대학 새내기때부터 시작해온 내 첫사랑은 아주 더럽게 끝났다. 항상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녀석이 권태기인지 나에게 소홀해져도, 17학번 신입생들이 들어와 그들에게 멋진 척 밥을 사느라 나와 데이트할 돈이 없다고 했을 때도 내가 더 잘하자는 생각뿐이었는데. 분노와 배신감이 뒤섞인 채 가장 친한 친구 예경이에게 전화를 걸어 자취방 근처 동네에서 술을 퍼붓기 시작했고, 덕분에 지금 아직 오후 8시, 취하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만취상태가 된 나였다.
아까의 기억을 다시금 되살리자 좋지 않아진 기분에 술집이 떠내려가라 소주 한 병 더를 외치는 나를 보며, 예경이가 입을 열었다.
“야, 남자는 남자로 잊는 거야.”
“개소리 하지 마.”
“그러지 말고, 소개팅 하자.”
“지랄.. 무슨 차이자마자 소개팅.”
“나 아는 오빠가 주변에 소개팅할 애 없냐고 했는데, 너 한다고 할게. 듣자마자 너 생각난게, 그 남자도 너네 학교래. 그래서 뭔가 너 생각났는데.. 이게 다 신의 계시인가봐.”
“몰라. 난 술 먹을래....”
“남자 진짜 잘생겼대. 이번에 군 복학해서 너랑 같은 2학년이고 경제학과.”
“...”
“야. 걔는 바람났는데 너는 걔 때문에 폐인생활 할거야? 그것만큼 멋 떨어지는거 없어.”
“그건.. 또 그래.”
평소 귀가 얇은 나는 점점 설득당하고 있었다.
“한다고 한다?”
“맘대로..”
아무 생각 없이 취해 말을 내뱉고는 쓴 술을 몇 잔을 더 들이켰다. 평소 내 주량인 한병을 훌쩍 뛰어넘어 나 혼자서만 두병 반은 넘게 마신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려 하자, 그 녀석과 둘이 찍은 사진이 눈치 없이 화면 속에 빛났다.
“이런 옘병할.”
“성질 하고는.. 그만 집 가자. 너 내일 수업도 있잖아.”
“그래.. 집.. 가야지.”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별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분을 내게 선사했다. 과한 술로 온 몸과 정신이 꼬이는 느낌이었지만 슬픔은 하나도 잊히지 않았다.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 뭐든 해서 내 첫사랑의 기억을 하루 빨리 잊는 수밖에.
* * *
어느덧 일주일이 흘러 소개팅 당일이 되었다. 내 나이 스물하나에 벌써 소개팅이라니.. 내년에는 선도 보게 생겼네, 하고 자조적으로 웃으며 입을 옷을 골랐다.
하얀 블라우스에 소라색 치마, 가벼운 숄더백을 메고는 집을 나섰다. 소개팅남은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만날 약속을 정하려고 주고받은 카톡에서 딱 선을 지키는 정도의 적당한 예의와 다정함이 말투에 벤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배경 사진이 영화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이었던 정도. 예경이 말로는 옵티머스 프라임인가, 그거라고 했다. 프로필 사진은 없어 아직 그의 생김새는 모른다. 원래 소개팅 하면 서로 사진 주고받고 그러던데, 워낙에 갑작스럽게 만나게 된지라 그 쪽에서도 연락처만 받고 나에게 연락한 듯 했다. 예경이가 프로필 사진이라도 좀 올려보라며 면박을 주었지만 영 사진을 찍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뭔가 그 사람만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거보단 서로 모르고 만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마침 같은 학교라 역 근처에서 만나기로 해서, 자취방에서 화장을 좀 고치고 머리도 매만지며 설렁설렁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6시 30분보다 2분 이른 28분이라 좀 기다리지 뭐, 하고 역으로 향하던 찰나 역 입구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눈에 들어왔다기보다는 그 누구라도 눈에 담지 않고는 못 배길 남자였다. 근처 꽃들과 나무들이 만든 향긋한 봄내음과 대조되는 차가운 페이스였지만 그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서 하마터면 넋 놓고 남자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뻔 했다.
남자는 연청색 청바지에 푸른색 셔츠를 멋스럽게 넣어 입고는 새하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라 캠퍼스 안에서 자주 마주치는 패션이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다리를 소유한 남자가 입으니 그 뻔한 패션도 달라보였다. 역 근처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은 사람은 그 남자뿐이었지만, 그래도 설마 저 사람일까 싶어 말 걸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내 핸드폰에서 ‘카톡!’ 소리가 났다. 귀도 밝아 카톡 알림의 주인공이 나라는 걸 바로 캐치했는지 남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소개팅남] 저 먼저 도착해서 역 근처에 서 있어요. 오시면 연락주세요!
미리보기로 내용을 잠시 확인하고 고개를 들자, 그 남자가 나에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워낙 다리가 길어 몇 걸음 만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와 나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김여주 씨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맞다는 내 대답에 올라간 눈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무표정일 때는 차갑고 도도하게 생긴 페이스인데, 웃는 모습은 흡사 강아지상이었다.
“반갑습니다. 황민현이라고 합니다.”
2017년 봄, 이것이 나와 황민현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