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대낮부터 수갑 난동으로 한 번 뒤집어졌지만 무한지구대는 오늘도 무사히 일과를 마쳤다. 시계 바늘이 일정한 시간을 넘기자 부스럭거리면서 하나 둘씩 퇴근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정시 이전에는 절대 퇴근할 준비하지 마세요. 엄연한 업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퇴근 준비는 정시를 넘기면 하세요.'
무한지구대에 발령받은 성규가 첫날부터 이렇게 단단히 못을 박아놨기 때문에 모두들 조기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긴, 칼퇴근도 못하는 마당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조기퇴근이라곤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오기 전의 지구대장은 너그러우신 분이라 그랬는지 이렇게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깐깐하게 행동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경찰대 출신 김성규는 달랐다. 그놈의 원리 원칙이 뭔지, 가끔가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다. 어쩌면 무한지구대 식구들이 타성에 흠뻑 젖어들어 나태해진 건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퇴근 시간을 5분 남겨놓고 애간장이 타들어감과 동시에 좀이 쑤셔서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김경위와 함께한지 어느덧 아홉 달이나 된 지금은 이런 상황이 익숙해져버렸는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벽 한 켠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잠시 다듬더니 모두에게 퇴근 인사를 하는 호원이었다. 그러자 빨간 패딩을 입은 동우가 자리에서 헐레벌떡 일어나더니, 같이 퇴근하자는 말과 함께 자신을 떼놓고 가지 못하도록 그의 소매를 움켜쥐고 쭉 늘어졌다.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본인의 소매 단추가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된 호원은 알았으니까 일단 놓고 얘기하자며 살살 달래본다. 으악, 이 코트가 얼마짜린데…. 하지만 동우는 그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몸을 반쯤 숙였다. 그러고는 발끝이 접힌 운동화를 반대편 손으로 올바르게 폈다.
"다 됐다! 이제 같이 나가요, 이순경~"
아랫니 두 개가 난 아기처럼 방글방글 웃으며 말하는 동우에게 '예, 예…. 그럽시다.'라고 뒤끝 있게 대답한 호원은 다시 한 번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 길로 곧장 퇴근했다.
이를 보며 성규도 슬슬 퇴근 준비를 하기 위해 책상 위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서류들을 한 곳으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 가지런히 정렬하기 위해 서류뭉치의 끄트머리를 책상에다가 툭툭 치자, 그 사이에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이 툭 삐져나왔다. 응? 이게 웬 종이지? 뭔가 싶어서 슬쩍 빼보니 휘갈기다시피 휴대폰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게 누구 번호일까 아리송하여 지나간 기억을 천천히 되짚던 성규는, 대낮에 장난전화를 걸어 버릇없이 굴었던 녀석을 떠올렸다. 이놈의 자식…. 퇴근하는 길에 전화해서 혼쭐을 내줘야지. 경찰들이 요 근래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하니까 아주 그냥 만만한 줄 알아! 으르렁거리면서 책상 한 켠에다가 종이를 조심스레 빼놓는 그 때, '먼저 퇴근할게요.'라는 소리에 고개를 드는 성규였다.
호원과 동우가 총대를 메고 제일 먼저 퇴근하자, 이 때다 싶었는지 가만히 앉아있던 경찰들이 너나할 것 없이 우수수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첫 번째로 퇴근하기가 눈치 보여서 계속 꾸물거렸던 게 분명했다. 다들 퇴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의경들도 자신들의 기동대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여미며 퇴근 준비를 했다.
"김경위님, 날도 추운데 얼른 퇴근하세요.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넨 명수는 성규가 잘 가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나간 동료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야근을 하기 위해 출근한 동료들이 근무지로 들어섰다.
"어? 김경위님! 다들 퇴근하던데 왜 아직도 사복으로 갈아입지 않으셨어요? 오늘도 제일 늦게 퇴근하시나 봐요."
"저번에 30분 일찍 조기 퇴근한 게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구대가 비면 안 되잖아요."
대답을 마친 성규는 사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다시 앉았다. 그러고는 방금 전 책상에 올려놓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흠…. 지금 한 번 전화해볼까? 당장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갈팡질팡 고민을 하는 그에게 '락커룸 안가세요?'라는 동료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전화 한 통만 하고 갈아입으러 갈 테니까 먼저 갈아입으세요!"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이내 마음을 굳혔는지, 의자 등받이에 걸려있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화면과 종이를 부지런히 번갈아보면서 손끝으로 전화번호를 입력해 나가기 시작했다. 010-1234-4885….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 대는 비장한 표정의 성규가 송곳니로 입술 끄트머리를 꾸욱 깨물었다. 확실히 젊은 놈이라 그런지 괴상망측한 통화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짜라빠빠, 그대는 아름다워. 짜, 짜라, 짜라 빠빠빠~♬ 짜라빠빠, 당신은 믿음직해. 짜, 짜라, 짜라 빠빠빠~♬]
뭐야, 이건 또…. 귓가를 때리는 이상한 노래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성규였다. 이 노래는 대체 트로트야, 아니면 동요야? 해괴하지만 나름 묘하게 중독성 있는 노래가 흐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안받는가보다 싶어서 끊으려던 찰나,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아까 낮에 전화 받았던 무한지구대 김성규입니다."
[어, 진짜로 전화 주셨네요?]
"처벌을 원한다면 전화 달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랬죠. 마침 처벌 받으려고 시간 맞춰서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네?"
그 순간 무한지구대 문을 한쪽 어깨로 밀면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우현! 전혀 예상치도 못한 놈의 등장에 깜짝 놀란 성규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무척이나 당황스럽지만 머리를 휘리릭 굴려서 얻어낸 건 이 모든 게 녀석의 계략이라는 결론뿐이었다. 성규는 휴대폰을 쥔 손으로 그를 지목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야, 4885!!!!!!!! 너지!!!!!!!!!!!!!!!!!!"
이를 보며 사람 좋아 보이는 특유의 미소를 서글서글하게 짓는 우현이었다.
*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원래는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같이 퇴근하자고 하니까 이상하네."
"엥? 그렇게 이상해 보였어? 우리는 비밀연애라서 그런지 함께 출근했다가 따로 들어가고, 퇴근할 때도 그러잖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함께 지구대를 나온 적이 없어서 한 번 해봤어."
"그래도 웬만하면 들키지 않게 서로 조심하자."
야속하리만큼 딱 잘라 말하는 호원이 때문에 동우는 그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시무룩해졌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저리 야속하게 말하는 연인에게 아무래도 많이 섭섭한 모양이다. 이런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렇게 말없이 앞만 보며 걷던 호원은, 옆에서 나란히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어야 할 동우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자 걱정이 들었는지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러자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 눈 쌓인 인도를 훑으면서 걸어오는 동우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섭섭했으면 일부러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걷고 있는 걸까 싶다.
사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다는 생각이 들자 꽤나 난감한지 애꿎은 뒷머리를 긁적이는 호원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남녀관계가 참 복잡하다고들 말하지만, 남남관계는 그보다 더 복잡하기만 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작은 오해'라고 불리던 것들도 남자와 남자 사이로 끌고 들어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작은 오해'라 부르기 힘들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남자 세계의 특성상, 사랑하는 사람에 관하여 친구들에게 허심탄회 털어놓고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에 당사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풀지 않는 이상 '작은 오해'는 그저 '작은 오해'로 존재할 수 없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인 듯하다. 오해라는 것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동우의 섭섭함을 풀어줘야겠다고 느낀 호원은 발걸음을 서서히 늦추더니 이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동우가 가까이 올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뭘 봐, 이순경…."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호원에게 잔뜩 심통이 난 것처럼 말을 하는 동우였다. 말끝에 '이순경'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걸 보아하니 마치 '나 지금 이만큼 삐졌어!'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본인의 기분을 좀 알아달라고 투정부리는 것 같다. 말을 마친 동우는 아랫입술을 삐죽이더니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깔아 발끝으로 나뭇가지를 비볐다. 동우의 독특한 하관 구조상, 툴툴대면서 입술을 삐죽이니까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나와 보인다. 뭐…, 그게 우리 장경장님의 매력 포인트긴 하지만.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은 호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뻔뻔스레 동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표정을 찬찬히 살피면서 물었다. 삐졌어? 그러자 그 말이 듣기도 싫은지 호원의 손을 떨어뜨리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튕기는 동우였다.
"됐네요~ 들키지 않게 서로 조심하자고? 누구는 어제 윙크 날리고 입모양으로 막…, 그 뭐냐…. 막….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흥분한 동우가 목소리를 높이자, 행여나 누가 들을까봐 겁이 났는지 주변을 재빨리 둘러본 뒤 그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는 호원이었다.
"쉿! 쉿! 요놈의 입!"
엄청나게 당황해하는 호원을 보고 기분이 풀어져 짓궂은 장난꾸러기 눈빛이 된 동우는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막고 있는 그의 손가락에 뽀뽀를 선사했다. 쪽! 예상치 못한 동우의 돌발행동에 화들짝 놀란 호원이는 재빨리 손가락을 뗐다. 이를 놓칠세라, 놀리는 듯한 앙큼한 눈빛을 뿅뿅뿅 발사하는 동우였다. 내 뽀뽀 싫어? 도발적인 그 말에 멋쩍은지 뒷목을 쓸면서 내심 슬쩍 웃는 호원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은 동우가 자신의 검지에 뽀뽀를 하더니 호원의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쉿! 요놈의 입!"
귀엽게 복수하는 그 모습에 양쪽 입꼬리를 올려 편안한 미소를 지은 호원이는 입술을 내밀어 뽀뽀를 했다. 쪽, 쪽, 쪽. 그러자 동우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하이톤으로 '꺄아~'하고 좋아하는 티를 냈다. 어이구, 귀엽기는…. 호원은 그의 검지를 잡고 질문을 던졌다.
"동우야, 우리 크리스마스 때 뭐할까?"
*
깜빡이를 키고 핸들을 휙휙 돌려서 멋들어지게 좌회전을 한 우현이는 깜빡이를 껐다. 그러고는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려, 앞차량 번호판을 뚫어버릴 듯이 바라보고 있는 뾰로통한 성규에게 말을 건넸다.
"봤어요? 간지나는 좌회전?"
참나,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우현의 말을 듣고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는지 성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우현이 능글맞게 '에이~ 봤구나?'라며 어깨를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들썩였다.
어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주치기 싫어서 홀랑 조기퇴근을 했더니, 약속대로 퇴근시간에 맞춰 남우현이 찾아왔나 보다. 그럼 무엇하리, 나는 이미 퇴근한 것을…. 놈은 아주 보기 좋게 허탕을 쳤다. 그리고 그 허탕 친 발걸음을 복수하는 차원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계략을 꾸민 것 같다. 역시 4885는 보통내기가 아니란 말이지….
오늘로써 폭설이 내린지 이틀째. 길이 꽁꽁 얼어버려서 오늘도 어김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 성규였기에, 난데없는 그의 등장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뜻대로 안되면 얌전히 포기할 줄 알았는데 기어코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상이 쩍, 하고 반으로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차를 몰고 나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이런 뭐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싫어도 보통 싫은 게 아닌 사람의 차를 얻어 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보란 듯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꼬투리만 여러 개 잡혔다.
'날도 추운데 왜 혼자 가겠다고 떼를 써요? 옷도 어제보다 얇게 입고 오셨구만….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차 안 가져오셨나봐요?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지금 퇴근시간이라서 대중교통 이용하면 죽어나는 거 알죠?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이 죽일 놈의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 남우현이 입 밖으로 던지는 모든 문장의 끝맺음은 '그러니까 데려다 줄게요.'였다. 이런 그에게 억지로 등 떠밀려서 아주 구겨지듯이 승차한 성규였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운전석에 앉아계신 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아참, 저 어제부로 종강했는데!"
성규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쉴 새 없이 입을 놀려대는 우현이었다. 지체 높으신 김경위께서 대답을 해줄 때까지 혼자서 열심히 떠들 심산이었다.
'저 이번에 김성균 교수님 A+ 맞았어요! 교수님이 절 좋아하시나봐요!'
'한 학기 동안 같은 프로젝트를 했던 여후배가 있었는데, 귀찮게 시리 얼마나 저를 쫓아다니던지….'
"그리고 얼마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있는데, 걔가 뭐라고 했ㄱ-"
으악!!!!!!!! 떠드느라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우현이가 앞차의 예고 없는 급정거에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그와 성규의 상체가 순식간에 앞으로 쏠렸다가 매고 있던 안전벨트 덕분에 원래 자세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동으로 인해 콩, 하고 뒤통수를 박은 성규는 아픈 곳을 매만지면서 운전석에 있는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째릿. 그리고 정신이 회까닥했는지 금방이라도 게거품을 물것처럼 난리법석을 떨며 경고를 외쳤다.
"차량 안전거리 확보!!! 운전 중 주의력분산행위 금지!!!!!"
그러자 우현이는 억울하다는 투로 말대꾸를 했다.
"그쪽이 대답할 때까지 생쇼하느라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 안전거리는 앞차가 갑자기 멈췄으니까 그런 거고!!"
"아니, 운전대는 남우현씨가 잡아놓고 왜 남의 탓으로 돌립니까? 엄연히 운전자 책임입니다!! 내가 근무복만 입고 있었으면 당신은 딱지감이네요, 딱.지.감!!! 운 좋은 줄 아세요!!!"
으르렁거리며 되도 않는 위협을 한 성규는 뒷목을 잡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초록불로 바뀌었으니까 출발하도록 합니다, 남우현씨.'라면서 말이다.
"뉘예, 뉘예~ 분부대로 합죠, 경찰관 나으리."
입가에 팔자주름이 걸리도록 입꼬리를 잔뜩 내린 우현이가 얄미운 간신배처럼 비아냥거리더니, 이내 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았다.
*
"다녀왔습니다!"
꽁꽁 언 발을 녹이기 위해 신발을 후다닥 벗고 집으로 들어서자 '아들, 저녁은 먹었어?'라는 엄마의 친근한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중인지 아주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빙글빙글 감싸고돈다. 더불어 보글보글 거리는 맛있는 소리 또한 들린다. 계란 후라이를 해서 따끈따끈한 된장찌개랑 같이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저녁을 먹고 싶지 않다.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새벽에 배고플 걸 대비하여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저녁을 거르겠다고 하면, 굶고 다닌다고 엄마가 생각할까봐 걱정이다. 밥을 먹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성열이는 바깥에서 먹고 왔다고 대충 둘러댄 뒤 피곤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쿵.
방문을 닫고 힘없이 등을 기댄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더니 잠시 후 옷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별다른 사건이나 사고 없이 평화롭기만 했는데 어째 좀도둑과 추격전을 한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어 직장에서의 하루를 되짚으며 옷가지들을 벽걸이 행거에 거는데, 기억 한 켠에서 문득 김명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고 버럭 신경질을 내면서도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집중하며 뒤적이던 모습과 여기에도 열쇠가 없다며 시선을 정면으로 맞추던 그의 모습….
응?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난데없이 머릿속에 불쑥 등장한 김명수 때문에 둥글게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힘껏 쥐어박으며 스스로 응징하는 성열이었다. 얼마나 세게 쥐어박았는지 눈물이 핑 돌만큼 아팠다. 하지만 아픔이 서서히 가시면서 그가 뿅, 하고 재등장하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때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뽀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말하는, 그 깨끗한 얼굴로 말이다.
'세상이 온통 하얗네요. 이따가 개인전으로 눈싸움 할래요?'
"끄앙!!!!!! 안 돼!!! 나 왜 이러는 거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힘껏 소리친 성열이는 정신을 차리자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양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으아아~ 헛것이 보인다, 헛것이 보여! 그리고 혹시나 했는지 이마에 조심스레 손을 얹어 체온을 쟀다. 다행히도 열은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배를 쓱쓱 어루만졌다. 원인은 이건가? 아무래도 갓 끓인 된장찌개를 마다했더니, 네가 뭔데 마음대로 마다하냐고 배가 심통 나서 이러는 것 같다.
"아아아~ 정신 차리자, 이성여얼~ 너는 지금 배가 고파서 이러는 거란다아~"
양손으로 자신의 배를 퉁퉁 때리면서 타령과 흡사한 주문을 건 성열이는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엄마!!!!! 나 그냥 밥 먹을래!!!!!!"
*
"김경위님은 이번 크리스마스 때 여자친구랑 보내세요?"
"알 거 없잖아요."
"에이~ 여자친구랑 데이트 하시는구나?"
마치 다 안다는 듯 음흉스러운 눈빛을 쏘는 우현의 말에 어이없어서 코웃음을 친 성규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기요, 제가 연애할 시간이 있어 보일만큼 한가해 보여요? 그러고는 이런 말을 내뱉은 자신에게 스스로 빈정이 상했는지, 입매에 힘을 주어 앙다물더니 차에서 내리기 위해 안전벨트를 푼다.
어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 우현이었다. 마냥 똑똑한 줄 알았는데 바보도 저런 바보가 없다. 여자친구랑 보내는 거냐고 물을 때는 알 거 없지 않냐며 까칠하게 나올 때는 언제고, 몰아가기 식으로 한 번 더 물어보니까 아무 생각 없이 사실을 토해냈다. 저 사람도 올 겨울엔 여자친구가 없구나….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왠지 모르게 동병상련의 기분이 들면서 짠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김경위는 성격이 뾰족한 사람인지라, 그나마 곁에 있던 여자들도 서두르듯 허겁지겁 도망갈 것 같다. 아니야, 혹시 모르지! 저런 사람이 의외로 순정파일지도…. 아무튼, 입이 가벼운 김경위 덕분에 크리스마스 때 그가 혼자 보낸다는 걸 알게 됐다.
김경위의 연애사에 구미가 당긴 우현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톡 두들겨가며 말했다. 연애는 퇴근하고 하면 되잖아요. 그러자 볼품없이 인상을 찡그린 성규가 한 마디 했다.
"뭔 개뼉다구 같은 소리랍니까, 남우현씨."
근데 이거 왜 안 열려요? 차에서 내리기 위해 조수석 손잡이를 연신 잡아당기는 성규에게 '그거 제가 강제 잠금 걸어놔서 안 열려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우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성규가 어깨를 들썩이며 헛웃음을 치더니 잽싸게 눈을 흘겼다. 왜 안 열어주는데요?
"주문을 외쳐야지 열어줄 거예요~"
실실 웃으면서 능청스레 말하는 우현이 때문에 화딱지가 한 단계 상승한 성규는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썩을 놈의 새끼…. 이건 엄연한 '반협박'이었다. 저걸 죽여, 아님 살려? 선택에 기로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성규의 마음은 '죽인다'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그의 마음을 읽은 것 마냥 엄청 쉬운 주문인데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는 우현이었다. '엄청' 쉽다는 말에 솔깃한 성규가 마지 못하는 척 대답을 했다.
"아, 진짜!!! 무슨 주문인데요."
"무슨 주문이냐면요, 일 더하기 일은 귀요-"
"안 내릴게요."
귀여운 율동으로 시범을 보이는 우현이를 보며 단칼에 딱 잘라 거절한 성규였다. 덕분에 차에서 내릴 마음이 싹 가셨는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댄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걸 주문이랍시고 해보라니…. 저 자식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 대체 언제부터 편한 사이였다고 서슴없이 서로의 안구를 위협하는 짓까지 해야 하나 싶다. 고작 남우현차에서 내리자고 귀요미 주문을 외칠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만약에 그가 원하는 대로 했다가는 매일 밤마다 이불을 뻥뻥 걷어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것은 마치 남우현에게 '여기 있습니다.'라면서 약점을 갖다 바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 자식이라면 분명 내가 정년퇴임할 때까지 평생 깐족깐족 거리면서 이걸로 놀려먹고 살겠지…. 삶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까짓것, 안하고 안 내리는 게 속 편하다!
머리로 복잡한 계산을 하느라 아무 말 않고 있는 성규를 넌지시 바라보던 우현이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왜요? 주문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감동 받았어요?"
그 말에 발끈한 성규가 운전석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미쳤어요?
"빨리해요. 안 그러면 진짜 안 열어줄거야."
"무력으로 제압하기 전에 순순히 여는 게 좋을걸요."
"그 몸으로 무력이 가당키나 해요?"
이 자식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아나! 한살 어린놈의 깐족거림을 참다못해 결국 뚜껑이 열린 성규가 재빠른 손짓으로 우현의 오른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신체접촉으로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우현이와 그의 손목을 반시계방향으로 인정사정없이 비트는 성규였다. 으아아악!! 단지 손목 하나를 꺾었을 뿐인데 아픔에 겨워 오징어처럼 몸을 뒤틀던 우현의 팔은 어느새 뒤로 꺾여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로 봤을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경찰에게 막상 당해보니 몸뚱이와 팔이 분리되는 듯한 희한한 고통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진다.
볼썽사납게 인상을 잔뜩 찡그린 그는 아프다는 말과 함께 반대편 손으로 핸들을 여러 번 두들겼다.
"아, 아파요, 아파!!!!! 팔 나가겠어요!!! 항복!!!!!!!!"
"그러니까 열어달랬잖아요."
"아, 알았어요! 열어줄게요!!!"
간곡함이 묻어나는 그의 항복 선언에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 성규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놔줬다. 이 비좁은 차안에서 무력으로 제압한다는 게 사실 뭐 별거 있겠나? 행동반경이 넓지 않은 탓에 가장 기본적인 호신술 외에는 딱히 써먹을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남우현은 분명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업어치기나 메치기 같은 '무력 제압'만을 생각하고 쉽게 덤빈 것 같다. 물론 바깥이었다면 방금 전처럼 이렇게 쉽게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업어치기? 메치기? 그런 기술은 물론이요, 후려차고 돌려 차고 또 옆으로 차고 마지막으로 거시기에다가 정권 찌르기까지 깔끔하게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빠샤! 상상의 나래가 자꾸 폭력적인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건 모두 저놈이 자초한 일이었다.
"대신! 주문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하면 열어줄게요."
아픔을 덜어내기 위해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하는 그에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면서 타박하는 성규였다. 이건 뭐 밉다고 해서 팔을 완전히 비틀어 부러뜨릴 수 없는 노릇이고…. 코앞이 집인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한 시라도 빨리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복잡한 전개가 펼쳐지면 안 되었기에, 그의 비위를 맞춰주자는 생각으로 하는 수 없이 질문하라고 대답한다. 물어볼 게 뭔데요.
"직급이 경위니까 주위에서 많이들 엮어주려 할 텐데, 왜 연애 안하세요?"
여자 관심 없어요. 주변을 알짱거리면서 성가시게 구는 파리를 훠이훠이 내쫓듯이, 손에 힘을 빼고 휘저으며 말하는 성규에게 우현은 왜 관심이 없는 거냐고 물었다. 어깨가 푹 쳐지도록 한숨을 내뱉은 그는 말을 이어갔다.
"경찰대 재학 시절에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근데-"
"못 잊었구나!!!"
아직 성규의 말이 끝나지고 않았는데 옳거니 싶어서 손뼉을 짝, 치며 말하는 우현이었다. 딱 봐도 사이즈 나오네…. 그 여인을 못 잊었네, 못 잊었어! 제 말 맞죠? 못 잊었죠? 마치 방정맞은 동네 아줌마처럼 조잘조잘 거리면서 한껏 바람을 잡는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성규는 어이가 없었는지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었다.
"죽을 만큼 사랑했는데 여자친구가 세상을 떠난 거죠, 크으…."
거창하게 써내려가고 있는 우현이의 소설을 한참이나 들어주던 성규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밤에는 술이나 팡팡 퍼먹고 낮에는 빈둥빈둥 거리는 것 외에는 집에서 할 짓이 없으니, 재방송으로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본 게 분명했다. 성규는 신나서 혼자 잘도 떠들어대는 잉여왕의 말을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들었는지 중간에 끼어들었다.
"뭐래….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요. 그 여자친구보다 나은 여자를 아직 만나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 그러니까…. 잊지 못한 거 맞잖아요."
"아뇨, 잊었어요. 다 잊었다고요. 다 잊었는데, 다만 여자를 보는 눈이 높아진 것뿐이에요."
참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저는 아직 제 마음속에서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했어요.'라고 아련하게 말하면 어디 덧나는가 보다.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듣고 있길래 진짜로 그런 건가 싶어서 순정남처럼 보였는데, 그럼 그렇지. 잠시나마 김경위를 멋지게 생각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우현이었다. 다 잊었는데 단지 여자 보는 눈이 높아진 거라니….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심을 살살 녹이는 로맨틱한 면모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다. 에라이, 저러니까 여자친구가 없지.
이마에 '흥미 잃음'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 마냥 김이 빠진 우현은, 약속대로 묻는 말에 대답을 했으니 이만 내려도 좋다며 잠금장치를 풀었다. 이에 얼씨구나 하며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여는 성규였다. 오예!! 문을 반쯤 열자 차안의 따뜻한 공기를 비집고 찬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그럼 저 이제 들어가 볼게요! 내리기 위해 바깥으로 한쪽 다리를 뺀 성규는 그 순간 문득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다리를 다시 집어넣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잡고 있던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우현이가 왜 내리다가 마는 거냐고 물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서요. 대답해주면 내릴게요. 그래도 되죠?"
"예, 예, 경찰관 나으리…. 그러시던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무더운 여름에 매일같이 술에 절어서 왔어요?"
질문을 한 뒤 그의 눈치를 슬슬 살피던 성규는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하다며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 순간 팔을 뻗어 성규가 내리지 못하도록 왼손을 덥석 잡은 우현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잠시 멈칫한 성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한 그의 눈빛과 차분하게 기다리는 성규의 눈빛이 오고 갔다.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우현이는 힘겹게 입을 뗐다.
"저는…. 아직 못 잊었거든요."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