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오늘은 같이 못갈 것 같아ㅠㅠ」
「미안해...」
응? 뭐지? 퇴근 직전에 이러한 메시지를 받은 동우는 이유라도 직접 듣고 싶었는지 목을 길게 빼고 호원이 자리를 쳐다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한 표정의 호원이는 누군가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아, 이순경니임~ 이거 알려주세요~ 알려달란 말이에요~"
누구인지 궁금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해보니,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뭔가를 알려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실습생이 보였다. 아마 쟤 이름이…, 이성정이었던가? 동우는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록 이름은 정확히 모르지만 한 가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 마냥 온종일 호원이의 뒤를 졸졸졸 쫓아다녔던 아이라는 것. 근데 뭐 때문에 저렇게 매달려 있는 거지?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직 제대로 모르니, 우리의 장경장님은 우선 잠자코 지켜보기로 한다.
"이걸 대체 왜 알려달라는 건데…."
실습생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고 있던 호원이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이를 집더니, 쭈그려 앉아있는 실습생의 눈앞에다가 이리저리 흔들었다. 팔락, 팔락, 팔락…! 그러자 입을 삐죽이면서 새침하게 낚아채는 실습생이었다.
"치, 궁금하니까 물어보죠~! 실습생이란 말은 괜히 있는 줄 알아요? 아니, 모르니까 좀 알려달라고 사람이 부탁하면은…! 그 뭐냐, 그…그…. 아이, 참…. 단어가 생각 안 나네. 아무튼! 당연히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저런 맹랑한 꼬맹이를 보았나…!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고 있던 동우가 두 주먹을 슬며시 꽉 쥐었다. 고양이처럼 하늘하늘하게 생긴 실습생이 첫날부터 다짜고짜 버릇없이 구는 모습을 보니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화가 부글부글 치밀어 오른다. 우리 호원이한테 존댓말이랑 반말이랑 막 섞어 쓰고 말이야, 기본이 안됐네! 호원아, 어서 무찔러! 얍! 얍! 그러자 동우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호원이가 종이를 되낚아 채더니 한손으로 꼬깃꼬깃 구기려고 했다. 아, 그걸 왜 꾸겨요!!! 성정이라는 실습생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질을 버럭 내더니 이번에는 신경질적으로 빼앗았다. 그리고 살짝 구겨진 종이를 정성스레 쫙쫙 펴서 책상 위에다가 탁 올려놓고 퉁퉁 두들겼다.
"얼른!"
그걸 본 호원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간곡히 애원하는 것처럼 말했다.
"너 왜 이러냐, 진짜…."
종이에는 20대 초반 남자가 흔히 가질 법한 글씨체로 딱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집 주소」
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이쯤이면 나올 때가 됐는데…."
손목시계를 확인한 우현이는 까치발을 들어 건너편에 위치한 지구대를 바라보았다. 퇴근시간에서 대략 5분 정도 지났으니, 예정대로라면 의경이든 뭐든 간에 한 명이라도 나와야 할 텐데 아직 개미새끼 한 마리도 나오지 않는다. 뭐지….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는데, 하라는 대중교통은 이용 안하고 차 끌고 출근했나? 그래서 벌써 휭 가버렸나? 에이씨, 만약 그런 거라면 나 괜히 나온 건데…. 아! 아니면 혹시 김경위님이 출입문이라도 막았나?
'오늘 근무태도가 그게 뭐야!!! 아무도 못 나가!!!!! 다들 퇴근할 생각마!!!!!!!'
뿔 달린 악마 같은 성규의 모습을 한껏 상상한 우현이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된다고 느꼈는지 히죽 웃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김경위님이 성격적으로 좀 그런 게 없잖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암! 혼자서 흐뭇하게 웃은 그는 코를 훌쩍 들이키고 옷소매로 쓰윽 닦았다. 아아~ 춥다, 추워~ 그러고는 집업 모자에 달린 양쪽 끈을 쭉 잡아당겨 모자를 쫙 조이고 나비 모양으로 꽉 묶었다. 회색 트레이닝복을 세트로 갖춰 입은 우현이는 오로지 2013년! 첫날의! 성규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다 기억에 빼곡히 담아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보다시피 이렇게 사서 고생 중이었다. 누가 보면 김성규 경위의 직찍 사진만을 다루는 개인 홈페이지, '꼼짝말라규' 혹은 '몽땅 잡아갈거라규'의 마스터인 줄로만 알겠다.
사실 그놈의 성규가 뭐라고 지금 이러고 있는지 우현이 자신도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지만, 일단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르기로 했다.
'남우현, 너 어디 가길래 그렇게 입었어? 혹시 편의점 가냐? 그럼 가는 김에 참치마요 삼각김밥 좀 사다주라. 몇 개? 두 개!'
'뭐야…. 편의점 간단 소리도 안했는데 왜 김칫국부터 원샷하고 그래? 나 운동하고 올 거야~'
'뭐라고? 운동?'
'응, 운동!'
'그럼 잘 됐네. 운동하고 오는 길에 참치마요 삼각김밥 좀 사다주라. 몇 개? 두 개!'
'아, 나 운동하고 올 거라니까?'
'그러니까 운동하고 오는 길에 참치마요 삼각김밥 좀 사다주라. 몇 개? 두 개!'
'와…. 집요하다, 진짜…. 오는 길에 참치 한 캔 사올 테니까 밥 위에 얹어서 김이랑 곱게 싸말아 먹던가, 비벼 먹던가, 볶아 먹던가 마~음대로 하쇼.'
'하나 밖에 없는 형이 참치마요 삼각김밥 좀 드시고 싶다는데 동생인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내가 자칫 나쁜 마음먹으면 어떻게 할 건지 알아? 너 장가갈 때까지 평생 엄마 요리만 먹게 할 거야. 두고 봐. 나,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요리 안 해! 거짓말 같지? 진짜야. 이래도 안 사올 거야?'
형과 옥신각신 말다툼을 해가면서 운동한답시고 나온 게 고작 여기라니…. 아주 잠시였지만 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우현이었다. 그러다 뭔가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마치 스킨을 바르는 상남자처럼 자신의 양뺨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미쳤어!!! 내가 한심하다고?! 한심하다고 했냐, 지금? 김성규 경위를 보러 나온 이 순수한 마음을 감히 '한심'이라는 하찮은 단어로 평가절하 하는 거야? 쓸데없이 까칠하면서도 때론 엉성하고 무한대로 귀여운 김경위님을 위해서라면, 살을 에는 듯한 그 어떤 추위도 결코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트레이닝복만 입고 나오는 뜨거운 마음! 지금 이 마음이 한심해? 한심하냐고, 남우현!!!
"하…. 절대 아니지, 완~전 죽이지!"
뭔가에 홀려 저도 모르게 자문자답을 한 우현이가 '아차'하면서 입을 틀어막는 순간, 그 상황에 맞춰 옆을 지나가던 여자가 이상한 눈빛으로 힐끗 쳐다봤다. ……어? 저 여자가 내 말을 들은 건가? 긴가민가 궁금해서 곁눈질로 눈치를 슬슬 보다가 본의 아니게 눈이 마주쳐버린 그는 마음속으로 땅을 팡팡 치면서 통곡했다. 거참~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래놓고 마치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싹 돌변하여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후광이 번쩍번쩍 빛나네요! 덕분에 가로등이 따로 필요 없어서 밤길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러고는 가던 길이나 마저 가라는 의미로 공손하게 길안내를 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렇게 어영부영 넘긴 우현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와…. 하마터면 이 구역 미친놈 될 뻔 했네! 마구 벌렁벌렁 대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그는 왼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분침은 어느덧 숫자 10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뭐야, 아직도 안 나온 건가? 마침 등 뒤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통에 머리가 쭈뼛쭈뼛 선 우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인님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지구대를 바라보았다.
*
"아, 이게 뭐야…. 여기는 대장 되시는 분 때문에 칼퇴근도 못하네."
책상에 걸터앉은 성종이가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는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투덜거렸다.
"야, 너 거기서 내려와! 소파 놔두고 왜 거기 앉아 있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성종이의 행동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세용이가 목소리를 낮추며 채근했다. 퇴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간 경찰들과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몇몇 경찰들 덕분에 1층에는 성종이와 세용이 둘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싱긋 웃어 보인 뒤 옆자리를 탁탁 두들기는 성종이를 빤히 바라보던 세용이는 대체 뭐가 그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배우는 학생 입장이 되어 한 달 동안 교통실습을 하러 나온 건데 이렇듯 첫날부터 태도가 불량하면 다들 뭐라고 생각할지 슬며시 걱정이 된다. 얘를 책상에서 강제로 끌어내릴까 말까 하면서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려던 세용이는, 도저히 양심이 따라주지 않는지 문 쪽을 가리키며 한 마디 했다.
"야, 이성종. 너 거기 앉아있지 말고 저쪽에 있는 소파에 앉으면 되잖아."
"저기는 찬바람 들어오잖아. 추워~"
팔을 교차한 성종이가 팔뚝을 쓸어내리면서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는데, 마침 의경들이 퇴근하기 위해 우르르 내려왔다. 의경들은 자기네들끼리 시끌벅적 떠드느라 정신이 팔려 실습생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휭 나가버렸다.
"저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안 보이나봐."
"음, 그러게…."
의경들과 내심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실습생들의 대화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 그 때였다.
"저기, 학생들! 혹시 이순경님 어디 계신지 알아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지구대문을 살짝 연 명수가 얼굴만 빼꼼 내민 채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름 모를 잘생긴 의경이 입을 떼자,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낀 성종이와 세용이는 서로 마주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비록 그가 말하는 '이순경'이란 사람이 정확히 누굴 지칭하는 건지 모르는 실습생들이었지만, 일단은 천장을 가리키면서 무조건 대답하고 본다.
"옷 갈아입는다고 다들 올라갔어요!"
"네, 맞아요!"
아, 그래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간단히 인사를 마친 명수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실습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야, 야! 봤어? 저 사람?"
"어, 봤어! 내가 봤어!!"
"게임 캐릭터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명수의 외모를 보고 무진장 놀랬는지 성종이가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세용이가 뭔가 떠올랐는지 박수를 한 번 크게 쳤다.
"어어! 맞네, 맞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게임 속에서 봤다!! 요즘 나오는 고사양 게임 캐릭터 같이 생겼어!!!"
"와, 대박…. 저런 외모가 현실에서도 있다니…. 진짜 마구마구 신비롭다."
"하…, 나도 저런 얼굴 갖고 싶다…."
"오세용, 넌 귀엽게 생긴 걸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어? 저런 얼굴을 가져야 할 사람은 바로 나야. 나한테 필요해~"
"얼씨구? 할아버지 되서도 이런 얼굴일 바에야 저런 잘생긴 얼굴이 낫지! 너야 말로 그 얼굴에 만족해라."
"아, 그건 됐고! 근데 아까 그 사람 말이야…."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춘 성종이는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군부대에서 만든 CG인간인가?"
……으잉?
*
"근데 오늘 새해 첫날이고 실습생들도 왔으니까 한 번 달리는 게 어때요?"
"오, 회식!!!!!"
"저는 찬성."
"그거 좋죠! 김경위님 오신 이후로 회식한 기억이 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떠들던 동료 하나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옆에서 묵묵히 옷을 입고 있는 성규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물가물한데, 아무래도 우리는 민중을 위한 몸이니까 회식은 필수가 아닌 옵션이라 생각해요!"
이 배신자 새끼…. 앞서 찬성표를 던진 동료들이 그를 세차게 째려보더니, 자신의 편한 사회생활을 위하여 마지 못해 하나 둘씩 의견을 수정했다.
"예, 맞아요. 필수가 아닌 옵션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이 있는 경찰이라면 내일 업무를 위해, 되도록 음주를 삼가야 하죠."
지금껏 대장 되시는 분은 입 뻥끗도 안했는데 '회식합시다!'에서 '회식하지 맙시다!'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어 적막해진 그 때, 성규가 빨간색 스웨터에서 머리를 쏙 빼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요, 뭐. 오늘은 새해 첫날이라서 좀 그렇고, 조만간 회식 한 번 해요."
엥? 혹시나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던 그들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소리를 냅다 질렀다. 이예~에!!!!!!!!!!!!!!!!!! 대한민국 축구팀이 한 골을 넣은 것처럼 얼싸안고 방방 뛰는 그들의 열렬한 환호가 휴게실을 가득 메웠다. 이를 본 성규는 스웨터에 팔을 끼우면서 티가 나지 않게 슬며시 웃었다. 다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내심 흐뭇하면서도, 가만 생각해보면 그동안 동료들을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회식한다는 말 한 마디에 저렇게 좋아죽으려고 하니, 원….
"이왕 말 나온 김에 정해요. 언제가 좋을까요?"
그의 질문이 떨어지자 모두들 머리를 굴려 골똘히 생각해본다.
"음…. 글쎄요. 언제가 적당하려나?"
"급한 게 아니라면 일주일 뒤에 하는 건 어떨까요? 실습생들이 적응 좀 하면 그 때 해요."
"그래요, 그럼."
성규가 흔쾌히 말하자 모두들 뛸 듯이 기뻐한다.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길 잔뜩 기대하는 동료들처럼 성규의 얼굴빛도 작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가 옴짝달싹 거린다.
얼씨구…. 웃는 거 봐라, 저거. 그리도 좋냐, 김성규? 성규의 입매가 꿈틀대는 걸 본 성열이가 속으로 픽 비웃더니 신랄하게 비꼬았다. 먹거리 골목 쪽에 있는 지구대는 일상이 회식이라는데 우리들은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 분위기가 성열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무한지구대의 왕이신 김경위가 즉위한지도 어언 10개월 차에 접어들고 땡볕에 비쩍 말라 쩍쩍 갈라진 땅 마냥 회식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명, '회식가뭄'이라고 하면 쉽게 설명이 되겠다. 그런 김경위가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난데없이 회식을 선언했다. '회식'이라는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회식가뭄이 사그라진다는 게 참트루? 어쨌든 1년이 다 되어가는 회식가뭄에 이제는 그도 목이 마른가 보다. 어차피 할 거였으면 진작에 좀 그럴 것이지. 속으로 꿍얼꿍얼 거리면서 베이지색 니트를 주워 입는 성열이었다.
"근데 경위님은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호원이가 연보라색 가디건을 걸치며 묻자, 안 그래도 다들 궁금했는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성규를 바라봤다. 그러나 성규는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멋쩍게 웃으면서 말하길,
"저요? 취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예상 밖의 대답을 들은 동료들이 너도나도 엉큼한 표정으로 말끝을 늘리며 감탄사를 뱉었다. 오~올~ 김경위니임~ 그러면서 회식하자는 소리를 왜 진작에 하지 않은 거냐고 다그친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취할 만큼 많이 마셔보지 않았다고요. 제일 많이 마셔본 게 소주 두 잔?"
꽤나 난감했는지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는 성규였다. 그러자 김이 빠진 탄산음료처럼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에이…. 전 또 김경위님이 말술이라는 줄 알았잖아요."
"아, 저도요…."
"취해본 적 없다고 하시길래 주량이 엄청나다는 줄 알았네요."
"김경위님은 정신력이 강해보여서 잘 말아 드시게 생기셨는데…."
모두들 실망으로 얼룩져 한 마디씩 거들 때, 그 사이에서 얌전히 청바지를 꺼내고 있던 성열이는 성규를 슬쩍 바라보았다. 오호라…. 소주를 두 잔까지 마셔봤다 이거지? 거참 자~알 됐다. 얼른 회식하는 날이나 와라. 그 날은 원치 않아도 피자를 마음껏 굽게 해줄 테니까!!!!! 음하하하하하!!!!!!!! 매일 밤 복수의 칼날을 갈며 잠자리에 들던 성열이에게는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였다. 복수할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찬 성열이가 바지를 갈아입기 위해 진청색 바지를 벗었다. 그러자 아침에 등장했던 만원 팬티가 뿅,하고 다시 등장했다.
"어? 뭐야? 그거 돈 팬티야, 이순경?"
웃음을 유발하는 팬티 때문에 입이 귀에 걸리기 직전인 동우가 세종대왕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말에 다른 동료들도 옷을 갈아입다 말고 성열이의 팬티를 보더니 한바탕 웃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본인의 만원 팬티가 자랑스러운지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당당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바로 돈 팬티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양옆으로 흔들었다. 저번주 휴가 때 늦잠 좀 잤더니 한정판인 신사임당 팬티는 다 팔려버려서 이거 한 장 간신히 건진 거에요!!!!! 어때, 완~전 죽이죠? 돈 팬티의 기운 받고, 2013년도에는 무진장 많이 돈 벌거야!!!!!!! 음하하하하!!!!!!!!!! 자신의 포부를 패기 넘치게 외치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동료들은, '꿈은 깰 수 있을 때 얼른 깨어나는 게 좋다.'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덧붙이길,
"그렇게 앞으로 쭉 내밀고 자랑스럽게 흔들지 마라. 완전 저질스러워…. 저~기 봐라, 저기! 김의경 얼어있는 거."
뭣이라?! 눈이 휘둥그레진 성열이는 동료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두 다리가 굳은 채로 서있는 명수가 있었다. 굳어버린 건 성열이 또한 마찬가지. 아침에 겪었던 상황이 다시 한 번 그대로 펼쳐졌다. 둘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휴게실이 떠나갈 정도로 동시에 소리 질렀다.
"끼야아앙아아아ㅏ아아앙아ㅏ아아악!!!!!!!!!!!!!!!!"
"으아ㅏ아아아앙아아아아앙아앙ㅇ아아악!!!!!!!!!!!!!!!!!"
"낑야야ㅇ야야아아아!!!!! 당장 나가, 이 자식아!!!!!!!!!!!!!!!"
여기가 어디라고 또 쥐새끼 마냥 기어들어와!!!!!!!! 성열이는 바닥에 있는 자신의 바지를 주워들더니, 까딱하면 명수를 향해 집어던질 기세로 자세를 취했다. 좋을 말로 할 때 솔직히 말해!!! 너 관음증이지!!!!
"네? …니요?"
얼마나 화들짝 놀랐는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목이 턱 막히는 바람에 이상하게 대답한 명수였다. 그러자 옷을 거의 다 갈아입은 동료들이 깔깔 웃어젖히더니 성열이를 곱게 타일렀다. 야, 야, 이순경…. 남자끼리 뭐 어때서 그래? 진짜로 관음증이면 뭐가 아쉬워서 여길 훔쳐보겠어. 퇴근하고 기동대로 복귀하면 널리고 널린 게 남자들인데…. 안 그래요, 김의경?
명수는 자신을 대변해주는 듯한 그들의 말에 '제 말이 그 말이에요!'라며 마구 끄덕였다.
"사실 실습생들 빼고는 모두들 1층에 안 계시길래, 퇴근 인사하려고 올라온 거예요!"
아, 근데 아침에도 그러시더니 이순경님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어요! 명수가 손가락으로 그를 지목하면서 억울한 듯이 털어놓자, 듣다 못한 성열이가 야구공을 던지듯이 바지를 집어 던졌다. 그럼 곱게 퇴근hey새끼야!!!!!!!!!! 바지가 정면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걸 본 명수는 한 쪽으로 피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으로 덥석 잡아챘다.
"존엄한 세종대왕님 용안에다가 오줌방울이나 묻히지my순경아!!!!!!!"
그 말과 함께 오늘 아침에 성열이에게 당했던 대로 바지를 힘껏 던졌다. 윽…! 자신의 얼굴 한 가운데에 정확히 명중한 바지를 천천히 걷어낸 성열이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이를 악 물었다. 그는 명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욕을 한 바가지 해주거나 한 대 쥐어 팰 요량으로 옷소매를 팔꿈치 위로 접어 올리기 시작했다.
"김명수, 너 이리와 봐."
상의는 베이지색 니트, 하의는 만원 팬티만 달랑 걸친 성열이가 명령하는 말투와 함께 이리오라고 검지를 까딱거렸다. 화내기 전에 이리와. 그 모습을 본 명수의 등이 움찔 굳어졌다. 자신을 부르는 그의 등 뒤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짜로 공포감이란 게 스치는 걸 느꼈고 팔에는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 때, 성열이가 쫓아올 것처럼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 공포감에 못 이겨 전력질주로 미친 듯이 줄행랑을 치는 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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