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디 올림푸스
Hotel The Olympus
소네트 씀.
황민현은 나를 데리고 곧장 제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쉴 새 없이 슬롯이 돌아가고 더러는 잭팟이 터져 환호하는 것에 반하여 누군가는 절망감에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딜러의 손에 의해 카드가 나누어지고 베팅의 판이 커진다. 곧 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도 감소하기도 한다. 대화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란스러움. 황민현과 우리들은 카지노 안의 직원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뒷편으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앞 '직원전용'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다른 엘리베이터보다 협소했기 때문에 남자 다섯과 같이 타니 엘리베이터가 꽉 찼다. 제우스의 고층에 다다르자 낯선 공간이 나온다. 칼과 총을 쥐는 법을 연습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벽에 일렬종대로 수납되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칼과 총이 인상적인 곳이다.
"칼이나 총 한 번도 다뤄본 적 없어?'
"네."
"이상하네. 마약 파는 거, 길 걷다가 갑자기 뒷통수에 총알 박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게 이 곳 사람들의 주특기라고 생각했다. 황민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왼쪽 벽으로 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며 한참을 왔다갔다 거리다가 과도와 같은 작은 칼을 내밀었다. 나는 어색한 폼으로 잡았다. 어둑한 조명에 번쩍이는 서슬 퍼런 칼날이 제법 무서웠다. 황민현은 휘둘러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휘둘렀는데 다들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무식하게 휘두르면 같은 편도 뒤지거든! 팔을 엑스자로 해 제 어깨를 감싼 라이관린이 외쳤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칼을 황민현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음. 칼은 안되겠다. 칼 쥐는 법은 진영이랑 지훈이한테 배우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시 부산스레 걸음을 옮기는 황민현을 봤다. 이번엔 총기가 있는 쪽으로 가서 다시 한참을 고민한다. 데저트이글이라고, 조금 무거울거야. 나는 황민현한테 총을 건네받다가 깜짝 놀랐다. 작은 크기에 비해 무게가 꽤 나갔다. 총을 건네받는 것부터가 불안했는지 도로 거둬간 황민현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애써 웃는 듯 보였다.
"총은... 관린이한테 배우고. 다니엘이나 나한텐 둘 다 배워도 상관없어."
"우린 짬밥이 쫌 있그든."
"아. 네. 뭐... 언제부터 배울까요?"
"오늘은 피곤할테니까 일단 쉬고."
강다니엘은 짬이 좀 된다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린 기본적으로 생활은 다 헤라에서 해. 거기가 낮은 조용해서 잠 잘 오거든. 황민현은 총을 다시 수납하며 말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나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일층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라는 특이하게 건물이 멀리 떨어져 있다. 새벽 동이 틀 때라 그런지 하나 둘 셔터를 내리는 중이었다. 한없이 한산한 거리. 그 길목을 쭉 걷다보면 흔히들 말하는 텐프로가 있는, 텐프로에 의한 건물이 있다. 길목은 스트릿 헤라라고 불리우고 길목의 끝에 있는 높은 빌딩이 헤라라 불리운다. 헤라의 내부로 들어서고 나서야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주로 머무르는 층은 11층이야. 방은 일인당 하나씩."
"좋네요."
"너는 1104호. 불편한 건 따로 나한테 연락해."
아 잠깐. 넌 핸드폰이 없나? 황민현이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핸드폰은 나에겐 사치라도 같은 것이라 여겨져 있을리가 없었다. 물론 내가 있던 곳에서는 포주를 빼면 있는 사람이 없었다. 황민현은 자신은 따로 볼 일이 있으니 나머지 넷더러 같이 나가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주라고 말했다. 기다란 복도에서 룸은 딱 7개 뿐이었다. 홀의 맨 끝 걸어가는 방향과 마주한 황민현의 룸은 1107호. 다른 룸과 달리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것을 보아 방이 제일 클 것 같았다. 1107호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1106호에는 배진영, 오른쪽의 1105호에는 라이관린의 방이었다. 지그재그 형식으로 방을 나눠놨고 나의 양 옆 방은 배진영과 강다니엘이었고, 앞 방은 박지훈이었다. 자연스레 1101호는 빈방이다.
나는 룸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예상치못한 손님은 아니었는지 제법 깔끔한 내부와 여자란 것을 고려해 조금 작은 사이즈의 가운이 포개어져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챙겨오지 않은 상태라 씻고난 후 입을 옷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유독 길다고 느껴지는 오늘 하루에 피곤함을 느꼈고 옷가지를 훌훌 벗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꼭지 돌리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좋은 욕실이었다. 내가 살던 방을 두 개 정도는 합쳐놔야 얼추 맞을 것처럼 컸다. 욕조의 주변에는 갖가지 세면도구가 있었다. 나는 그 중 제일 작은 병 하나를 들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입욕제다. 로즈마리 향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나는 그걸 두 어번 펌핑했다. 욕조가 꽉 차도록 마저 물을 채우자 수북해진 거품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손이 약간은 쭈글쭈글해지고, 볼엔 홍조가 발그레하게 오를 때까지 샤워를 했다. 목욕 가운은 실크 소재로 된 것인지 속옷 차림 위로 닿는 감촉이 보들거려 수건으로 감싸 올린 젖은 머리가 도로 떨어질 정도로 얼굴을 부빗거렸다. 악몽을 자주 꾸기도 한다 나는. 어미가 사내 둘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울부짖으며 사라지는 장면. 그 장면이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꿈. 허나 이런 호화스러움이라면 오늘은 악몽이 아니라 길몽을 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룸 안의 화장대 앞에 있는 드라이기를 집은 나는 혹여나 밖으로 소리가 새나갈까 약풍에 맞추어놓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매만지며 말리고 있었을 때 문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마저 머리를 말렸다. 그러나 이번엔 쿵쿵, 거리며 정확히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쿵쿵거리는 소리는 곧이어 똑똑하며 노크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나는 방문의 의도가 명백한 행위에 급히 방문 쪽 신발장 맞은 편에 붙어있는 전신 거울로 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조금, 조금 부끄러운 옷차림이었으나 더는 지체하면 안될 것 같아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인영은 여전히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셔츠와 정장바지 차림인 강다니엘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나는 그냥, 니 약 발라줄라고 했는데."
다니엘은 난처하다는 듯 눈두덩이 살을 매만지며 나머지 한 손에 쥐여져 있는 하얀 봉지를 흔들어보였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내 옷차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운을 더 단단히 여며쥐었다. 나는 어색하게 문을 마저 열어 들어오라고 했다. 맨발바닥에 느껴지는 대리석 바닥이 조금은 차가워 급히 슬리퍼를 신었다. 그럼 실례. 주체 없는 인사를 남긴 다니엘이 조심스레 문을 닫고 들어왔다.
"씻었나보네."
"네. 근데 굳이 약 발라줄 정도로 심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나 때문에 맞은 거잖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테이블 위에 하얀 봉지를 내려놓은 다니엘은 그 안을 뒤적거리더니 연고를 꺼냈다. 이미 본인이 자주 쓰는 것인지 압력이 가해져 겉표면이 푹 들어가 있었다. 나는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다니엘이 하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다니엘은 연고를 짜려다 나를 한 번 보곤 테이블 위에 연고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침대쪽으로 가 베개 위에 있던 작은 쿠션을 하나 들고와 앉아있는 내 위로 올려놓았다. 나는 그제야 가운이 앉은 자세 때문에 많이 짧아져 올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물기가 가득한 머리카락 끝을 한움큼 쥐었다가 놓았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나 좀 봐봐."
"......"
"...따가우면 말하고."
다니엘은 내 턱을 조심스레 잡아선 연고가 짜낸 검지손가락을 조심스레 가져다댄다. 왼쪽 입꼬리부터 아래로 조금 찢어져 피딱지가 굳었는데 말을 해야하다 보니까 입꼬리는 피딱지가 얹힐 새도 없이 터지고 피나기를 반복했다. 조금 따갑긴 했지만 쓰윽 닦아내곤 했는데 그게 영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손가락을 입꼬리부터 가져다댄다. 따가우면 말하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안바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따가울 때 마다 미간이 찡긋거렸다. 다니엘은 그럼 덩달아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아랫 입술까지 연고를 마저 발라낸 다니엘은 잠시 쥐었던 턱을 놓고 다시 봉지를 뒤적거려 다른 연고를 꺼내 짜냈다. 나는 또 바를 때가 있나 싶어 다니엘을 올려다 보았다.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꾹꾹 누르며 망설이던 다니엘은 다시 허리를 숙이고 내 턱을 쥔 채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입 좀... 벌려봐."
"...뭐라구요?"
"입 벌려보라고. 안에 바르게."
나는 퍽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어째 연고라면서 입을 벌리자 터진 입꼬리가 따끔거렸다. 그래서 질끈 감은 눈 위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그보다는 입 안으로 쑥 들어온 손가락 때문일지도. 검지를 살짝 구부리고선 입꼬리 근처의 입 안속 살을 꼼꼼히 훑으며 발라낸다. 사실 남녀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해도 분위기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다. 이런 옷차림에 이런 자세에 이런 짓거리는, 위험했다. 서로의 리비도를 자극하는 그 무언가의 은밀한 행위같았다. 처음보다 훨씬 더뎌진 손가락의 움직임은 곧 멈췄다. 정확히는 멈추기만 했을 뿐 손가락이 빠져나가진 않았다. 나는 감긴 눈을 슬며시 떠내다가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한껏 들이마신 숨을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해 결국엔 내가 먼저 고개를 뒤로 빼는 것으로 그쳤다. 본인마저도 허둥대며 굽힌 허리를 곧추 세운다.
"어... 그럼. 나는 갈게."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내일 보자."
나는 일부러 약봉지를 챙겨서 밖으로 나가는 다니엘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로 폭삭 누워 괜히 소름이 돋아있는 다리를 이불로 덮었다. 맨살로 와닿는 실크의 감촉이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고요한 방 안에서 내 심장박동 소리만 엄청 크게 들리는 것 같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만 봤다. 아무도 없는 방, 나 혼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별안간에 쏟아지는 잠에 나는 수면을 청했다.
다음 날 오후 3시가 되고 나서야 우리는 시내로 향했다. 다니엘과는 왠지 어젯밤 이후로 도통 어색해져버려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옆에서 어설픈 발음으로 떠드는 관린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다들 그래도 제법 바닥에서 굴러 먹은건지 눈치가 빠른 것 같았다. 배진영이 몰래 내게 귓속말했다. 다니엘 형이랑 싸웠어? 왜 이렇게 어색해보이지. 막 놀린거면 내가 혼내줄까? 응? 장난기 다분한 말투였지만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 간지러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빼자 아 왜 빼, 하며 옆통수를 제쪽으로 더 가까이 대려고 한다. 스킨십이라거나 혹은 친화력이라던가 하여튼 둘 중 하나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
어쩔 수 없이 한 쪽 팔짱은 관린이에게 내어주고 한 쪽 어깨는 배진영에게 어깨동무를 당한 요상한 자세로 시내를 거닐었다. 강다니엘은 그런 둘을 보며 못말린다는 듯 환하게 웃었고 가끔 시시껄렁한 농담을 관린이 지훈에게 던지면 지훈은 어이없어 웃는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화 내용을 얼핏 엿들으니 저들끼리도 꽤나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라 들떠있는 듯 했다. 넷 중에 그나마 차분하게 있는 박지훈은 핸드폰을 개통시키고는 곧장 제 번호를 저장해준다. 사실 번호를 찍은 후에 제 이름을 두드릴 때 지훈 혹은 박지훈을 두어번 썼다 지웠다 망설이다 결국엔 지훈으로 해뒀지만.
"형. 번호 저장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죠."
관린은 그런 지훈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번호를 찍곤 제 핸드폰으로 벨이 울리게끔 했다. 그리곤 도로 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박지훈보다는 조금 더 정있는 모양새로 저장을 해놨다. 관린이. 그렇게 차례대로 번호를 저장한 후 마지막으로 다니엘이 민현의 번호까지 저장해두었다며 나에게 핸드폰을 넘겨줬다. 제법 좋은 폰이라 그런지 화면도 컸다. 한 손에 다 잡기에는 조금 버거운 크기라 행여 깨질까봐 주머니에 넣었다. 행선지를 옮겨 이번엔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옷 가게로 들어갔다. 다니엘과 지훈은 죽이 척척 맞아 편하게 최고라며 스판기가 좋은 바지와 얇은 티셔츠 몇 장을 집어와선 입어보라고 내밀었다.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어 피팅룸으로 들어와 후다닥 갈아입곤 나갔다.
"박지후이. 잘 골랐네. 니는 그래 못입어도 얘는 제대로 골라줬네."
"형. 칭찬 할 거면 제대로 해요."
그러나 배진영과 라이관린은 그런 취향이 아니라는 듯 인상을 있는대로 꾸기며 달려왔다. 둘의 양 쪽 팔에 들려있는 무수한 옷가지를 본 나는 손사레를 쳤으나 관린은 입어야한다며 꾸역꾸역 내 등을 피팅룸 안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결국에 한아름씩 들고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관린은 대체적으로 패피의 성향이 강했다. 계절에 맞지도 않게 원피스와 라이더를 들고왔으니 말 다했다. 그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의자에 쪼로록 앉아있던 세 명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관린만 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이후로 관린이 들고온 옷을 다 입었으나 줄줄이 퇴짜를 맞았고 진영이 가져온 새하얀 티셔츠와 찢어진 검은 바지, 목이 긴 워커를 신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나쁘지않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고갤 끄덕였다. 배진영은 뿌듯해하며 웃었다.
"거 봐. 내가 이쁠 거라고 했지."
그러나 결론은 전부 다 계산해주세요, 로 끝난 해프닝이었다. 양 손에 쇼핑백이 바리바리 쥐여져 있는 걸 본 박지훈이 자기가 들겠다며 오른쪽에 들린 걸 모두 가져갔다. 나는 짧게 아, 고마워. 하며 인사했다. 그러자 질세라 관린이 옆으로 따라붙어 왼손에 있는 걸 모두 가져 들었다. 매너가 좋은건지. 쓸데없는 승부욕이 있는 것인지. 알 바는 아니었으니까. 내 손에 들린 게 하나도 없어서 편할 뿐이었다. 헤라로 돌아오자 삐져나온 셔츠를 도로 바지 안에 집어넣고 있던 황민현을 마주쳤다. 황민현은 어제와 달리 사람다워진 내 행색에 위아래로 훑고선 만족스럽게 웃었다.
"쇼핑 예쁜 걸로 잘 했네."
"이런 옷 입어 본 적 없어서 조금 민망하긴 한데..."
"아냐 아냐. 음... 배고플테니까, 뭐 먹고 왔어?"
"네. 밖에서 대충."
"그럼 일단 조금 쉬고 저녁에 칼 쥐는 법부터 배우자. 누구한테 배울래?"
황민현은 배진영과 박지훈을 가리키며 누구에게 배우겠냐고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난처해져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박지훈은 더 잘 배우고 싶으면 당연히 나한테 배워야지, 하면서 으스댔다. 그에 배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지난 번 연습 때 칼 놓치고, 항복하셨던 게 어디 계신 누구였드라. 참 여러 번 느낀다. 이 곳 사람들은 쓸 데 없는데 열을 올리는 걸 잘했다. 나는 아무한테나 배우겠다며 대답했다. 그러자 황민현은 잠깐 고민하더니 진영이는 자기와 함께 할 일이 있을 것 같으니까 오늘은 지훈이한테 배우라고 하곤 사라졌다.
"지금 여섯시니까 아홉시에 제우스 그 때, 거기서 만나자. 알지?"
"어. 알지."
"찾아갈 수 있어?"
찾아가는 건 조금 그랬다. 왜냐하면 제우스 안에 있는 훈련 장소로 가려면 헤라를 빠져나와 길목을 건너야하는데 어디나 그렇겠지만 영업을 시작한 홍등가는 조금 무섭고 어쩌면 살벌한 분위기까지 풍기는 곳이었다. 보편적으로 뭣 모를 것 같은 남자가 지나갈 때보단 여자가 지나갈 때 눈에 더욱 쌍심지를 켜고 부라리는 그들이었다. 그걸 잘 아는 나기에 혼자 가기에는 그랬다. 헤라는 어떤 식일지 본 적은 없지만. 더군다나 제우스로 가려면 그 소란스러운 카지노를 지나쳐야 하는 것은 물론 줄줄이 서있는 직원들과 경호업체의 덩치들을 뚫고 가야했다. 나는 아직 그들에게 낯선 외부인이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박지훈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랑 같이 가자 그러면. 나 잘 것 같으니까 아홉시되면 내 방 좀 두드려줘."
"그래. 잘 자."
박지훈은 쿨하게 손을 흔들어보인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도 박지훈 방의 문이 닫히는 걸 보고나서야 내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나도 눈이 감기기에 설잠을 잤다. 께어나보니 8시가 넘어가고 있어서 낮에 산 옷들을 전부 꺼내 드레스룸 안의 옷장에 정리해 넣었다. 그리곤 도로 침대에 누워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홀드 버튼을 눌렀다. 어둑한 방 안에 핸드폰 액정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나는 밝기를 낮추고 단조로운 전화번호부를 들춰보다 인터넷을 켰다. 그래서 올림푸스에 대한 기사를 몇 개, 차례대로 헤라와 제우스, 하데스에 관한 기사도 찾아보다가 시간이 다 되어 방을 나섰다. 1103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으나 답이 없었다. 나는 조금의 텀을 두고 다시 힘을 주어 방문을 두들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와 잔뜩 감긴 눈의 박지훈이 나왔다.
"피곤한가보다."
"어... 조금?"
"그럼 오늘 하지마?"
"아니, 아니. 해야지. 기다려."
부스스한 머리를 털며 방 안으로 들어간 박지훈은 핸드폰과 방문을 여는 카드키를 챙기더니 입고 있던 집업을 턱 끝까지 올리곤 가자, 하며 앞장섰다. 여전히 잠이 덜 깼는지 엘리베이터에 기대서 고개를 한껏 숙였다. 헤라를 빠져나와 스트릿을 걸어다니니 아니나다를까 미심쩍은 시선이 끈덕지게 붙어온다. 박지훈도 모르진 않는지 바짝 붙으라고 당부했다. 나는 옆에 찰싹 붙어서 빠른 걸음으로 박지훈을 따라갔다. 밤만 되면 붐비는 곳이 카지노라 그런지 제우스는 건물 밖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결국 정문으로 진입하는 것은 포기하고 뒷문으로 향해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익숙한 24층에 다다르자 새벽에 보았던 공간이 다시 나타났다. 박지훈은 먼저 걸어가더니 칼 두 개를 집고서는 중앙으로 걸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박지훈을 따라 후다닥 중앙으로 향했다.
"나이프 잡는 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박지훈은 작은 단검을 가져왔다. 날이 휘어져 굽은 칼이었다. 인도네시아 단검인데, 카람빗이라고 해. 작아서 너가 쓰기 좋겠다. 사족을 덧붙인 박지훈은 먼저 잡는 법을 시범보였다. 그리곤 이렇게, 휘두르면 돼. 공중에 날이 썰려 휙 하는 바람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똑같이 따라하려고 애썼다. 조금 어설프긴 했으나 공중에 휘두르는 것까지 제법 흉내를 내보이자 박지훈은 잘하는데? 하며 웃었다. 나는 칭찬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치고는 잘 따라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김칫국을 더 마시자면 소질 있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도 했다. 박지훈은 내 손에 잡힌 칼을 빼내곤 조금 더 큰 나이프를 가져왔다.
"크기는 작은데 조금 무거워. 손목 힘이 많이 들어갈거야."
"응."
"잘 봐."
박지훈은 다시 편하게 칼 쥐는 법을 알려줬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어떻게 해야 공격하기 편한지 방어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 등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한 번에 다 깨우치기에는 머리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부터 제대로 해야겠다고 느꼈다. 사실 내 몸은 근육도 그렇다고 살집이 있는 몸도 아니었다. 밥은 제대로 못 먹고 하루의 절반은 퍼질러 자고, 나머지 절반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약을 팔아야 했기 때문에 식사량보다 활동량이 더 많아 그냥 볼 품 없이 마른 몸매였다. 그렇기에 내 손목보다 두깨가 두꺼운 칼을 계속 쥐니 손목에 확실히 무리가 가긴 했다. 박지훈의 주도 하에 열심히 칼을 휘둘러보지만 여전히 폼새가 어설펐다.
박지훈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곧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처져있는 내 손목을 바로 올려준 박지훈은 칼 배우기 전에 먼저 살부터 찌워야겠다면서 핀잔을 줬다. 나는 민망함에 소리없이 멋쩍게 웃기만 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자세를 교정해준 박지훈은 멀찌감치 떨어져 내 폼을 보곤 한 번 휘둘러보라고 했다. 나는 배운 자세 그대로 공중에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거린 박지훈은 다시 다가왔다.
"미안한데. 실례 좀."
"어? 뭐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박지훈은 곧장 내 대각선 뒤로 자리 잡았다. 왼손으로는 내 오른쪽 어깨를 잡곤 오른손은 내 팔 위로 뻗어 칼을 잡은 손을 감싸쥐였다. 그리곤 이리저리 방향을 돌리며 최대한 나에게 편한 방향을 맞추어주려고 했다. 내가 몸이라도 움직이려고 움찔거리면 왼손으로 어깨를 꾹 누르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제인지 느껴본 듯한 알 수 없는 묘한 감각. 옆구리부터 겨드랑이를 타고 올라왔다. 감각의 끝은 손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여전히 손목의 방향에 시선이 닿아있는 박지훈의 옆태를 흘깃거렸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가려는 고개에 재빠르게 나도 고개를 돌렸다.
"이제 좀 됐나..."
"어. 아마도."
대답을 하는 박지훈의 호흡이 어깨죽지 부근에 와닿았다. 그 낯선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하지만 아까의 인기척에 돌린 고개는 여전히 나를 향해 자리잡고 있었다. 발목 양말도 신고 긴 바지에 집업도 목까지 쭉 올린 더운 옷 차림새로 나를 가르친 박지훈은 착 가라앉은 생 앞머리 사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지훈은 이 곳에 들어서면서 냉방을 한다는 걸 까먹었는지 천장에 달린 에어컨은 전원이 꺼진 채로 계속 연습에 임했다.
"너가 이겼어."
"뭐?"
"너가 이겼다고."
속뜻을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한 번 더 물어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박지훈은 가정했다. 방금이 실전이었고, 너랑 내가 서로 적이었잖아? 그럼 난 너한테든 다른 사람한테든 찔려 죽었을거라고. 나는 머리가 멍청해서 빙빙 돌려말하는 걸 싫어한다. 내가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박지훈은 내 손을 겹쳐쥔 제 손을 빼낸 후 나에게서 일보 물러난 후 말을 이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방심하게 되잖아. 사람이."
나는 문득 귀 끝에 열이 몰려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박지훈을 보면서 느꼈는데 얘는 참 알 수 없다. 사람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타입인 듯 했다. 박지훈은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끝내자며 넋을 놓고 있는 나에게로 와 내 손 안에 있는 칼을 빼내곤 수납고로 가 원래 자리에 꽂아넣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박지훈을 바라보다 정신차리자 싶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오르려는 박지훈을 따라 후다닥 올라탔다. 박지훈은 정면을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만 돌려 박지훈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에 대뜸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덥다, 그치. 하며 웃는 박지훈을 보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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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 한 거 환장하는 사람 = 나. 이 글의 목적은 역하렘이므로 저는 서슴없이! 거침없이! 애들과의 썸씽을 넣을 겁니다. 본격 간재기. 히히히ㅣ.... 아 그리고 진짜 별 거 아닌 글에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에 봐용!
오타나 어색한 부분은 제가 다시 보면서 고칩니다! 이해해주세요ㅠㅠ
암호닉 실화냐ㅜㅁㅜ |
수 지 / 과자 / 괴물 / 망개몽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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