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나만 안 되는 연애
지독한 짝사랑
w. 댕댕민
*
지독한 짝사랑이였다.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서만 앓고 지나갈 그런 짝사랑. 그런데 생각보다 나는 무언가 숨기는 걸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쩌면 숨기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내가 짝사랑 하던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라는 그런 꿈 같은 이야기는 내게 해당되지 않았다.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
조별과제를 임영민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앞으로 더이상 바랄게 없어요, 라고 소원을 빌었던 게 될 줄은 몰랐다. 내 구질구질한 짝사랑을 유일하게 아는 동현이가 만들어 놓은 상황이긴 하지만. 내가 임영민을 좋아한다고 동현이한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냥, 가까운 사이니까, 어쩌다 보니 눈치를 챘던 것 같다. 따로 거기에 대한 말은 없었지만 김동현은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생긴 얼굴에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잘해 주는 매너에 재치있는 성격까지, 인싸의 대표적 인물인 김동현은 다 두루두루 친한 편이였고 임영민에게 같은 조를 하자고 말하는 것은 일도 아니였다. 임영민은 이미 어떤 여자 동기와 앉아서 알콩달콩 신나게 떠드는 중이였다. 둘이 친한가봐, 부럽다.
" 그럼 이렇게 넷으로 제출할게, 단톡에서 번호 교환하자. "
" 그래. "
임영민을 좋아하는 나를 도와 주려는 동현이의 모습에 괜히 씁쓸해졌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사실 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던 건 나지만, 예상치 못했던 주연이와의 꽁냥질을 볼 바엔 그냥 다른 조가 되는 게 나았을까 싶기도 하다. 둘의 번호를 받아내 단톡을 만든 동현이가 ㅡ나만ㅡ 어색해 하는 분위기에서 말을 꺼냈다. 아, 임영민 번호라니 괜히 좀 설렌다. 솔직히 나한테는 관심이 하나도 없어 보이긴 하지만.
*
그렇게 과제를 한답시고 단톡으로 몇번, 개인톡으로도 몇번 연락을 주고 받았을까. 일주일이 나에겐 꿈만 같았다. 동현이가 조심스럽게 말해 준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걔, 주연이랑 썸타는 거 같던데. 짧게 흘리듯 말해 준 동현이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지만, 여자 애들이 해 주는 말에는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임영민 걔 볼 때 눈에서 꿀 떨어지잖아. 술자리에서도 얼마나 걔 챙기는지 몰라, 맨날 데려다 주고.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다음 날에도, 나는 임영민을 찾았다. 임영민이 자주 가는 카페에 ㅡ주연이와 올 때가 대부분이지만ㅡ 나는 매일 같이 출석도장을 찍는다. 알바생은 내 얼굴을 외웠고 도장 쿠폰은 벌써 두 장째 완성이 됐다. 구석진 곳에 앉아 매번 다른 음료를 시도해 보며 임영민을 훔쳐보는 일이 일상이 됐다. 야속하게도 임영민은 주연이와 장난치고 사진 찍기 바쁘지만. 금요일엔 임영민은 항상 혼자 앉아 주연이의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이트를 하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솔직히 오늘은 한 번 미친 척 해보고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주문을 하러 카운터에 오는 임영민을 마주하고 걸어갔다. 나를 발견한 임영민이 먼저 웃어보이며 인사를 했다.
" 어, 여주네. 오랜만이다. 혼자 왔어? "
" 어? 아... 어, 어... 혼자 왔어. 너도? "
" 주연이랑 안 맞는 강의 시간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어. 나 주문해야겠다, 나중에 또 보자. "
" 저기, 영민아. "
" 어? "
" 너 있잖아, 혹시... 여자친구 있어? "
그냥 일상적인 말로 끝내거나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는 이야기를 해도 집에 가서 이불킥을 할 게 뻔한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내뱉고도 잠깐 어이가 없었다. 왜 물어본 건데? 누가 보면 금방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묻는다. 아니면, 마치 내가 임영민이랑 썸을 타는 사이인 것처럼.
" 있으면 어쩌고 없으면 어쩌게? "
갑자기 튀어나온 주연이의 말이 나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실감시켜 주었다. 아, 창피해.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별과제 이외엔 접점도 하나 없고, 연락도 한 적 없고.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도 사실 신기한 사이인데 우린. 주연이는 악의 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날카로운 말을 듣고 먼저 생각한 게 저거였다면 뒤에 생각한 건 혹시라도 이런 말에 임영민이 주연이에게 정이 떨어지진 않았을까 하는 최악의 기대감이였다. 아무말도 못하고 손만 만지작 거리다가 임영민의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당돌한 주연이가 귀엽고 질투하는 모습이 예뻐보인다. 이렇게 눈에 써있었다.
" 어... 그런 게 아니라, 아니야. 미안해. "
비참했다. 빠르게 둘을 지나쳐 구석진 자리로 가서 울었다. 소리를 죽여 조용히 울었다. 이 좆같은 짝사랑을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 둘 수가 없다.
" 저, 여주야. "
"..."
" ...너 울어? 미안해. 이거라도 먹어. 나 가볼게. "
이런 임영민 때문에.
*
그 날 받은 쿠키는 먹지 못했다. 기대를 갖을 법한 드라마 같은 스토리였지만 난 알았다. 이건 그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이에게 베푸는 호의나 최소한의 예의였기 때문에. 하루가 일주일 같았던 금요일을 보내고 주말동안 힐링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다운 받고 맥주를 잔뜩 사서 들어왔다. 핸드폰을 들면 맨날 들어가는 임영민 카톡 프로필, 페이스북이 진저리가 나 전원을 끄려고 핸드폰을 드는 순간,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 여주야, 바빠? 아니, 여기 학교 앞 주점인데 임영민이 취한 거 같아서. "
" 근데 왜 나한테 전화를 해? "
" 주연이가 전화를 안 받더라, 너 얘 집 알지 않아? 조별과제 같이 했잖아. 우선 좀 와 주라 미안해. "
" 거기 임영민 친구 없어? 남자도 많을 거 아니야... "
" 애들 다 곯아떨어져서 나랑 애들이 한 명씩 치우고 있어. 와 줘, 꼭! "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여기서 안 가자니 친구에게 미안했고 가자니 카페에서의 주연이의 멘트가 생각났다. 근데, 솔직히 가고 싶었다. 가서 취한 임영민을 여친인 것처럼 어르고 달래서 집에 데려다 주고 싶었다. 결국 급하게 옷을 챙겨입고 나와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얼굴을 계속 만졌다. 쌩얼인 얼굴이 걸려 간단하게 화장도 했다. 좀 웃기지만 설렜고 내리자마자 술집에 들어가 영민이를 부축해서 나왔다.
" 영민아, 일어나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
" 주연아..... "
" 저, 그게... 나 여주거든? 주연이가 연락이 안 ㄷ, "
" 너 뭐야? "
" 어, 주연아. 얘가 많이 취해서... 그 네가 연락이 안 된다고 그래서. "
순식간이였다.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하고선 내 뺨을 쳤다. 마치 내가 바람을 핀 것처럼 혐오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게. 그래도 이것 때문에 덜 비참했다면 덜 비참했을 수도 있다. 주연이가 나한테 위기 의식을 느낀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렇게라도 정신승리를 하고 싶었다. 얼얼한 볼에 잠깐 정신이 빠져 아무 말도 못했다.
" 저번부터 신경쓰이더니, 너 자꾸 왜 집적거려? "
" ...아니, 난 그냥. "
" 옷은 일부러 그렇게 입고 왔니? 진짜 별로다 너. "
" ... "
" 싸게 굴지 좀 마, 비참하지도 않니? "
급하게 나오느라 나시도 입지 않고 목이 늘어나 가슴골이 살짝 보이는 흰 티가 거슬렸나보다. 그 때, 내가 뺨을 맞았을 때처럼, 순식간에. 동현이가 뒤쪽에서 화난 얼굴로 걸어나와 나한테 기대있는 임영민의 멱살을 잡아 올려 주먹을 꽂아버렸다. 술에 제대로 취하긴 취했는지, 한 대 크게 맞고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나가 떨어졌다. 그와중에, 나는 걔가 걱정됐다. 임영민을 친 동현이는 그대로 뒤를 돌아 화난 얼굴로 놀라서 입을 막고 있는 주연이를 내려다 봤다.
" 너 대신 친 거야 저거. "
" ...야, 지금 누가 잘못한 건지나 알아? 저 년ㅇ, "
" 여기서 더하면 이번엔 진짜 너 칠 거 같은데. "
이렇게까지 화가 난 동현이는 처음이였다. 동현이의 어깨를 잡고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무표정으로 쳐다본 동현이는 가자며 내 손목을 잡았다. 눈물이 차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고 하니 눈에 가득 맺혔다. 나 아직 말 다 안 했는데.
" 주연아. 네 마음 다 알아, 집적대서 미안한데. "
" 뭐? "
" 근데,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
지독한 짝사랑이다.
*
그냥 다른 글들에 나오는 악녀 혹은 라이벌로 나오는 입장에서 한번 써보고 싶었던 나의 욕심...
영민이나 동현이와의 해피엔딩 외전이 아직 없긴한데 바라시면 들고 오겠습니당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