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아파야만 할까 01
W.글쓰는걸사랑하는러브 "일어나, 김여주." "...." "못들은척 하지 말고 빨리." 아침부터 서늘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뜨였다. 못 들은척하고 이내 눈을 감았지만 귀신같은 그는 금세 눈치를 챘다. 10분만 더, 하며 투정을 부릴래도 냉기가 느껴지는 그의 손이 팔에 닿자 안 일어나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어젯 밤 의사 가운을 그대로 입고 들어온 황민현은 내게 이따금씩 이상한 잠꼬대를 했었다. "피를 보는게 너무 싫어...." 라면서. 아마 술을 진탕 마셨겠지 하는 생각에 내 방에 그를 눕히고 나는 급한대로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또한 그는 그것을 못마땅해했다. "너 진짜 바보구나." "...뭐가." "네 상황이 어떤 줄 알면서 몸을 함부로 다뤄." "....." "바로 죽고싶은거 아니면 조심하랬지." 민현은 항상 이런식이었다. 반협박같은 말투로 나에 대한 걱정을 대신했다. 물론 뭐 죽는다느니 그런 살벌한 어감의 단어를 사용하긴해도 내 손끝하나 막 다룬적이 없는 그런애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 살리는게 일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저런 딱딱한 말투도 아무렇지 않았다. 바닥에서 우선 몸을 일으키자 대리석처럼 몸이 굳어서 찌뿌둥하고 딱딱했다. "으.. 생각보다 괴롭긴하네." "뭐?" "황민현 때문에 더 일찍 죽는거 아닌가 몰라, 바닥에서 잠을 다 자고..." "하...너 진짜 내가..." 우습냐? 곧장 그렇게 말하려던 입술은 달싹거리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나는 그가 벗어둔 의사가운의 피를 가리키며 괜히 시덥잖은 농담이나 해보였다. "의사가 피를 싫어하면 어떡한담-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 "그래도 나 죽을 땐 피는 안 나와서 다행이겠네... 황민현." 나 죽어도 무섭진 않겠네. 그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사 가운을 확 낚아챘다. 뭐냐고, 무섭게. 내가 째진 눈을 만들어 그를 노려보자 그는 더하다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정도로 나를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듯한 방의 분위기가 못견디게 몸서리쳐졌다.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열자 민현은 내 뒤를 쫓아왔다.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그는 나지막히 경고했다. 다시는 예민하게 만들지 말라고. 나는 냉장고에 있던 토마토주스를 급히 뒤적거렸고 당당하게 손에 쥐며 흔들었다. 조금 엽기적이지만 이게, "오늘은 빨간색 토마토 주스를 먹어볼까...!~" 황민현과 내가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 "후~ 너무 더워~" "아까는 춥다며." "네가 뜨거운 그라탕해주니까 더워졌어. 지금 여름인데...." 황셰프는 역시 믿을게 못된단 말이지- 나는 얄밉게 훤히 다보이는 유리잔에 토마토 주스를 담아서 그의 앞에대고 벌컥벌컥 마셔보였다. 사실 그라탕은 아주 맛있었고 내몸은 오늘도 얼음장처럼 시렸다. 추워서 몸을 떨자 황민현은 저거, 거짓말 또 시작이네. 하는 얼굴로 깊은 숨을 뱉었다. 조금은 양심의 가책이 들어 가만히 눈치를 보던 찰나에 그는 내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야, 밥상에서..뭐하는거야, 나 밥먹잖아." "가만히 있어." 민현은 순간 내 옆에 도착해서 코앞까지 내 손목을 가져다댔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내 앞에 그가 더 낮은 자세로 앉아있는것은... 그리고 내 손목은 이내 힘 없이 떨구어졌다. 내가 봐도 파리한 손목은 민현의 얼굴에 깊은 근심을 가져다주었다. "너 이실직고 말해." "응..?" "이렇게 상태 악화될때까지 뭐했어?" 너 어제 뭐했냐고. 여린 듯 단단한 민현의 목소리는 나를 옥죄어왔다. 그라탕이 딱딱해져서 수저로 괜히 장난질을 해보았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빨리." "...." "...., 제발 좀 말해주라." 내가 네 전담의사잖아. 몇번이고 들었던 민현의 트레이드마크인 그 대사는 이제 지쳤는지 등장하지도 않았다. 나는 되려 당당하게 심장을 팡팡 두들겨보이며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나 어제 서점에 좀 놀러..." "미친다 내가 진짜.....,"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가 이렇게 망가진 모습은 오랜만인지라 손을 둥그렇게 말아 쥐고 킥킥, 대며 웃어댔다. 내가 심장 부근께에 가져다댔던 손을 그는 다시 저의 손 안에 넣으며 불쑥 나를 노려보았다. "네 심장을 하루라도 소중히 여겨 봐. 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소중히 여기냐!" "허...얘가 진짜..." 나름 논리적인 반박으로 말문이 막힌 그는 벙찐 얼굴로 내 손을 꽉 쥐어왔다. 아아...! 짧은 곡소리와 함께 발을 동동거리자 민현은 더 거세게 손을 가둬왔다. 야, 너 진짜! 소리를 빽- 질렀을 때 그는 벌개진 손을 펼치며 보여주었다. "보여? 심장색하고 똑같아졌지." ".....아파 죽겠어." "앞으로는 이 손을 네 심장이라고 생각해. 너는 몸이 불편하면 손부터 새파래지니까, 새파래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라고. 그럼 눈에 보이는 심장이 되잖아. 어?" ".....그게 뭐야. 이상해." 이상한데 또 틀린 말은 아니야. 곧바로 수긍하며 입술을 죽 내밀자 민현은 비식, 하고 웃었다. 그가 웃으면 내 몸이 더 아프다는게 문제였다. 아무리 매일 봐도 네 얼굴은 심장에 무리가.... 느끼한 대사를 치려다가도 민현은 매정하게 밥상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도 늦게와?" "상황 봐서." "아버지는 오늘 안들어오시지??" "응. 그러실거야." 짧게 대답을 하던 민현에게 나는 자연스레 다가가 안겼고 내 머리를 두어번 토닥여주던 그는 꼭 해야할 말도 잊지 않았다. "오늘은 나가면 안돼. 경고했어." 조금 무섭지만 오늘은 그의 그런 관심이, 싫지만은 않았다. ******* "원장님, 여주씨 오셨다고 합니다." "어. 그래. 들어오라고 해." 오늘은 민현이 몰래 병원으로 오는 날이었다. 민현이의 아버지, 그러니까 민현이가 다니는 이 병원의 원장님은 민현이의 아버지인 동시에 아들과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지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보통 민현이는 내게 조금이라도 무모한 짓을 시키는걸 싫어했고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해왔기에 이렇게 민현이가 바쁜 날에, 원장님은 날 몰래 불러내곤 하셨다. "요즘 몸 상태는 어떠냐?" "어..., 그냥.. 그저 그런 편이에요.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원장님과는 늘 그렇듯 형식적인 대화가 전부였다. 나보고 응급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늘 집안에 있는게 좋겠다면서 가둬두는것도 원장님이다. 물론 가둬둔다는 표현이 좋지는 않지만...., 어쨌든 황민현이 날 걱정하는 마음에서 무모한 외출을 삼가라고 하는것과는 꽤나 다른 뉘앙스다. 처음 봤을때부터 쭉 느꼈다. 날 치료해준다면서 동시에 마음대로 하려는듯한 이질감을. 그래서 후원받는 사람의 입장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거다. 결국 날 치료해주는것도, 생활비를 주는것도 이 병원이니까. 원장님은 심장이 아프다는 사람 앞에서 잘도 담배를 피우는게 특기였다. 조금 눈살을 찌푸리자 이내 불을 껐다. "아, 미안하다. 내가 까먹었구나." "괜찮습니다. 항상 그러시잖아요." 말도 안돼. 저렇게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 까먹을게 따로 있지. 그는 가끔 저런 정도가 지나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떠있는 담배연기에 거친 기침을 해대자 원장님은 간단한 검사만 하자며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더 물으셨다. "민현이는...." "....." "여전히 그 상태니?" 그 상태냐는건 어떤 말일까. 역시 그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인가. 요즘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으시던 원장님은 당연히 심해진 민현이의 증상을 모를것이 뻔했다. 하지만 뭔가 두려웠다. 내가 지금 사실대로 모든걸 고하면 나중에 민현이가 받게 될 응징이 무엇일지 몰랐다. 그래서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감을 없애듯 나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민현이는," "...." "아직 괜찮아요. 많이 호전됐습니다." 그럼 됐다. 숨 막히는 대화를 끝으로 검사를 한 뒤 원장님과의 만남은 끝이났다. 아직 담배연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뭔가 막힌듯 컥컥대자 나는 저사람이 내 괴로움을 즐기는건 아닐까, 그런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 민현이는 정말 괜찮을까. 원장님과의 만남은 늘 소름이 돋았다. 민현이가 어쩌다 그렇게 피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지는 모르지만... 내가 주제넘게 물어볼만한 문제가 아니라는것은 느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엘리베이터는... 원장님과 몇몇 분들 빼고는 탑승이 금지되어 있는데.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남자였다. "...." "안 내려요?" 잔뜩 예민해보이는 그 남자는 다짜고짜 안 내리냐며 문을 잡았다. 네? 재차 묻자 남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안 내리냐구요. 여기 1층인데." "아..., 1층.." 언제 여기까지 왔지. 머쓱해진 기분에 괜히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내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내리던 찰나에 그 남자와 어깨를 부딪혔고 나는 또, 고개를 숙였다. "아..죄송합니다." "너무 정신 팔고 다니지 마세요. 여기 위에서 일하는거면." 네? 지금 무슨 소릴...., 무어라 따지려고 하자 그 남자는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고 급하게도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고있는거같은데....., 억울하게도 하고 싶은 말은 다 마치지 못한 채 그 찰나에 그 남자의 명찰을 어렴풋이 훔쳐보았다.
"....김종현?"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그렇게 안일하게 그저 스쳐갈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