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아파야만 할까 02 W.글쓰는걸사랑하는러브 "안녕하세요, 원장님." 민현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높다란 키가 무색하게 몸이 반쯤 접힌 그의 모습은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 안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들 중 누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 황원장이 중요한 수술을 보러 오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던 일이기에 수술실은 특유의 긴장감이 흘렀다. 황원장은 이번 수술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과 한 번씩 인사를 나누고 민현과도 모르는 척 악수를 했다. 민현은 황원장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마치 처음보는 사이처럼. 황원장은 그대로 수술실 전체가 보이는 위쪽으로 올라가서 투명한 유리창으로, 민현을 내려다보듯이 눈을 깔았다. "잘해라." 황원장의 입모양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라서 모두 황원장이 자기를 눈여겨봐서 보러온 게 아니냐며, 대수술이니까 잘 해야 한다는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민현은 극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얼마전 수술에서 튀어오른 피에 공포를 느꼈던건 바보같은 행동이었다. 이제 피에 대한 트라우마는 거의 없어졌어야 했다. 민현은 아버지가 모든걸 꿰뚫어 보고 찾아온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작하지." 집도의의 주도로 수술은 시작되었고 민현은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뒤에 한 가지를 떠올렸다. 자신이 여기서 수술을 잘 해내지 못 한다면....., 여주.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거지. 그 아이의 전담의사인 주제에 트라우마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민현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주...." 민현은 나지막하게 마스크 사이로 그 이름을 부른 뒤 수술에 집중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아버지에 대한 부담감도 아닌, 어느새 스며들어온 그 아이였다. ****** "나 왔어." 민현이 목소리다! 나는 곧장 현관으로 뛰어갔다. 나는 이제 귀신같이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오늘은 술을 마셨는지, 아닌지, 기분이 좋은 날인지 아니면 나쁜 날인지 ...또는 그것도 아니면, 슬프지만 나랑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인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의사가운을 깨끗하게 빨아주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는지 그는 몇 벌의 의사가운을 가져왔다. "우와- 이게 뭐야. 되게 많이 가져왔네?" "응. 미안해." "아니, 미안해하라는건 아니고...." 그냥, 네가 피를 보기 싫어하길래....깨끗하게 해주고싶어서 그랬지... 속으로 그 말을 삼키며 시무룩해있자 민현은 다시 내게 다가왔다. "나 내일은 더 늦게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왜? 많이 바쁜가보네" "이번에 수술 잘 끝냈다고 회식 잡혀서 그래. 걱정하지 마." 그래? 잘됐다! 민현이가 드디어 제 실력을 발휘한 것 같아 내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의사가운을 들고 발을 구르자 민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구석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의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억지로 입꼬리를 더 올리며 입고 있던 새로 산 원피스를 자랑했다. "이것 봐라! 얼마전에 샀던 옷 왔어. 진짜 잘어울리지?" "......" "아, 왜! 빨리 어떤지 말해봐. 많이 이상해?" 괜히 내가 귀찮게했나. 힘 없이 늘어진 그의 모습이 조금은 보기 힘들정도로 괴로워보여서, 혹시 병원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나는 그의 시선을 좇았다. 핑그르르 돌며 치마를 보여주자 그의 초점 없던 눈은 점차 총기를 찾았고, 부끄러울 정도로 그의 모든 신경은 나에게만 집중했다. "잘 어울리는데,.." "..." "소매가 너무 길어서 네 손이 잘 안보이잖아." "...." "내가 잘 보라고.. 그랬잖아." 민현은 느릿느릿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가느다란 내 손목을 가득 채워 한 손으로 잡더니 손가락을 천천히 내 손목에 감아왔다. 다섯손가락이 전부 내 손에 감겼을 때 그는 반대쪽 손으로 내 소매를 올려주기 시작했다. 민현은 그저 의사로서 나한테 잘해 줄 뿐일텐데, 나는 그와 닿을때마다 이상하게 둥둥 뜨는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어서 심장이 저렸다. 정말 이상했다. 그가 내 양쪽 소매를 전부 걷어 올렸을 때 내 손은 평소보다 분홍빛을 띠었다. "오늘은 혈색이 좋네." "...." ".....다행이다.." 민현은 몇번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더니 그의 열려있던 입술과 함께 완전히, 눈을 닫았다. 나른하던 그의 말투는 전부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그래서 평소보다 상냥해진 그의 말투 때문에 설레하던 자신이 조금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저 피곤했던 것이였을까. 몸이 내쪽으로 기울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같은 민현을 나는 황급히 몸으로 지탱했다. "어, 어어!" 조금 방심해서 민현의 손을 놓쳐버리자 나는 그의 넓다란 몸 안에 순식간에 파묻혔다. 그대로 소파로 몸이 돌진하게 되자 손 쓸 새도 없이 그의 아래로 깔려서 소파 위에 몸을 뉘였다. 퍽 자연스럽지 못한 모양새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건 좀.... 그렇잖아. 당황스러워서 힘껏 그의 몸을 들어올리자 내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왜 여태 몰랐을까. 내 생각보다 민현이의 얼굴은 많이 지쳐보인다는걸. 나는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죽지 마......" 민현이는 이상한 소리를 늘어 놓았다. 설마 나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아닐것이다. 나한테 저렇게 애절할정도로 애원하듯이 말하는 그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몇번 움직이더니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엄마...." 민현이의 마지막 잠꼬대였다. 그는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마침내 편안해진 표정으로 잠을 청했다. 불편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아서, 조용히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으으..." 아침이 되고 저절로 눈이 뜨였다. 소파에는 민현이가 이미 없어진 뒤였다. 그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시간은 아침 8시였다. 한창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거라 생각해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민현이가 일어난 뒤에 날 제대로 눕혀줬을것이다.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병원장 될 애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그 때였다. 갑자기 안쪽 방에서 큰 소리가 난건. 보통 아침에 들어오신 적은 별로 없는데...일찍부터 날벼락을 맞은듯 매서운 그의 목소리만이 집 안을 채웠다. 나는 조용히 숨어서 다음 반응만을 기다렸다. 내 다리가 덜덜 떨려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었다. 거실바닥에 앉아서 민현이의 두려움을 같이 느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민현이를 끌고 나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건 주제넘는 짓이니까. 불안함에 혀를 꽉 깨물자 쓰라린 통증이 전해졌다. 민현이는 태연한듯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 항상 말이면 다야? 고작 이정도 일 가지고 힘들어할거면 당장 때려쳐!" "...죄송합니다." 민현이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의 자존심이 바닥까지 추락하는것같아서 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책상을 쾅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그 아이랑 있는게 정말 괜찮은거냐?" "...." "그 아이랑 있어서 네 정신이 더 흐트러지는건 아니고?"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민현이가 나 때문에 저런 소리를 듣고있다. 분명 나때문에. 내 탓이 분명한데, 민현이는 가만히 그의 타박을 듣고만 있었다. 어째서... 그냥 내가 방해된다고 말해. 그럼 내가 쫓겨날수도 있는거잖아. 나는 속으로 애원했지만 그는 끝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화장실에서 씻고나온 척을 했다. "...어? 원장님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왔다. 어차피 조만간 말하려했는데.." "...." "여주 너는 나랑 같이 병원에 좀 가야겠구나." 네? 병원에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민현이를 쳐다보자 그는 조금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나에게 시선을 두었다. 원장님께서 굳이 함께 병원에 가자고 한 적은...별로 없었다. 대부분 내가 몰래 찾아갔을 뿐.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일이 분명 일어날듯한 예감에 나는 손을 꽉 쥐었다. 민현은 여전히 날 보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 준비하고 나오라는 말씀에 나는 황급히 대답했고 민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민현이는 이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원장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데려다주면 안되는겁니까?" "..뭐?" "꼭 아버지랑 같이 가야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원장님께선 기가 찬 듯이 웃어보였다. 민현이는 이를 악물고 있는게 여기까지 느껴졌고 그의 아버지는 같잖다는듯 민현이를 지나쳤다. 그리고 남은건, 집 안의 침묵이었다.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아주 큰 개인 병실에 와 있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직원의 말에 눈을 꿈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침대 옆 서랍장 위에는 크리스탈 꽃병 안에 장미가 담겨있었다. 굉장히 색깔이 신비로운 장미라서 그만 정신을 팔고 말았다. "김여주씨?" "네, 네?!" 굉장히 소란스럽게 놀라버렸다. 덩달아 날 불렀던 직원분도 적잖이 놀란 눈치로 병실에 들어왔다. 어쩐지 오라고 해서 오긴했지만.... 왠지 모를 위협적인 느낌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온통 하얀색인 이 병실에 있기란 조금 고역이었다. 자세히 보니 직원은 환자복을 들고 내게 오고 있었다. "입으세요." "이걸요?" "네. 지금 바로 입어주셨으면 합니다만..." "저 환자 아닌데요." 내가 환자복이라니. 나로써는 가장 거부감 드는 옷이 환자복이었다. 나는 지금 긴급 환자로 이송된것도 아니고 장기간 입원해야 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저 민현이랑 집에서, 민현이가 해주는 밥도 먹고, 내가 몸 관리 잘 하면서, 민현이와 원장님께서 해주시는 검사만 잘 받으면 앞으로 잘 살아갈수도 있는 몸이었다. 물론 고작 연명하는 수준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저 옷이 싫었다. 가뜩이나 아픈 내가 더 아파 보였기 때문에. 환자복은 내 마른 손목을 좀 더 부각시켜주는 옷일 뿐이었다. 내게 환자복을 들이미는 직원에게 힘껏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저 안아프다니까요." "엄청 아프시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걸 굳이 입어야 하는...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건...." "그쵸. 없죠? 그러니까 원장님한테 물어봐주세요. 저 어차피 금방 다시 나가는거 아니냐구, 그래서 이거 입을 필요 없지 않냐구 그렇게 물어봐주세요." 제발요. 나는 최대한 불쌍한 눈빛을 보냈다. 직원은 곤란하다는 낯빛이었고 나는 거의 다 됐다는 생각에 "네? 네?" 하며 부탁했다. 직원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고 나는 병실 문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저기요! 거기 밖에 계신 분! 원장님한테 대신 물어봐주실 수 있나요? 부탁드릴게 있어요!" 손까지 크게 흔들면서 소리치자 그 사람은 병실 문 앞을 서성였다. 이내 문을 서서히 열고 나온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고 조금 뜻밖의 인물이라서 나를 당황시켰다. "어라...?" 저 사람은.. 그 때..., 기억을 더듬자 금방 이름이 생각났다. 아. 맞다. 그 엘리베이터남. 내가 이 곳 직원이라고 오해했었지. 나는 이렇게 일찍 재회할 줄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예의를 차리고 꾸벅 인사를 했고 입가엔, 그만의 여유로운 미소가 걸쳐있었다. "안녕하세요." "...."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김여주씨의 새로운 전담 의사인," "...." "김종현이라고 합니다." 그는 생각보다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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