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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백해일익]
때는 고등학교 3학년의 2학기, 9월, 내 인생에는 없을것 같았던 박지훈과의 접점이 생긴 날이었다.
‘아 망했다…..’
난 그냥 학원에 바로가려고 학교에서 조금 늦게나선것 뿐인데…..
“ 너 이름이 뭐야? 김여주? “
“ 야 이거 비밀이다? 김여주 비밀지켜라. 나 간다. ”
지름길로 가려고 뒷문 주차장쪽으로 왔을뿐인데…..
왜 박지훈이 여기서 담배를 피고있는거지????????
1.
고등학교내내 나는 미대입시를 준비했기때문에 항상 학교가 끝나고 나면 학원에가서 그림을 그리는게 일과였다.
그리고 학원이 끝나고서는 독서실 그 다음 집. 학교-학원-독서실-집만 오가던 나에게 갑자기 큰 시련이 닥친 느낌이었다.
그 일이있기 전날 그림이 유독 안그려졌던게 생각나서 학교를 마치자마자 미술학원에 갈 생각이었다.
빨리가서 연습해야지 생각하고있었는데, 바로 학원에 가니까 여유가 생겨서 아무도 없는 교실에 잠깐 앉아있다가 문을 잠구고 나왔었다.
열쇠를 맡기고 느릿느릿 뒷문 으로 나가는데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골목길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박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박지훈으로 말할것 같으면 외모수려하고 성적우수하고 성격완만하고 뭐하나 안빠지는 우리학교의 ‘자랑거리’ 라고나할까.
집도 부자라고 들었는데 왜 이런 동네애들이 오는 인문계고등학교에 왔는지 의문을 들게했던 남자애였다.
전교회장도 했었고 늘 전교1등이라 선생님들 사랑도 엄청받아서 아마 원서쓸때도 학교장추천정도는 따놓은 아이라고 할수있다.
근데 그런 박지훈이! 왜! 뭐때문에! 늦은 저녁 골목에서 담배를피고있는거냐고!
아니지 쟤가 담배를 피던말던 나랑 뭔상관이야. 이걸 왜 하필 내가 본걸까 하는 생각이 점점 나를 덮쳤다.
왜 그런 상황 한번쯤 상상해보지 않나, 아무도 모르던걸 나만 알게되는 스릴? 짜릿함? 가령 다음주의 로또번호같은거.
하지만 내가 나만이 알게된건 로또번호따위가 아닌 전교1등의 흡연사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수있었다. 봐서는 안될것을 본거라고.
‘제발 모른척 잘하고 그냥 지나가게 해주세요’
라며 속으로 염불을 외고있는데
“ 너 잠깐만 ”
박지훈이 나를 불러세웠다. 아 도망칠까? 어차피 내 얼굴 제대로 못봤을텐데.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꽉 차있는사이 그는 휘적휘적 걸어서 내 앞까지 와버렸다. 사실 조금 쫄아서 눈을 감고있었는데 훅 불어오는 담배냄새때문에 알수있었다.
‘ 아…. 담배냄새……’
습관적으로 숨을 들이쉬고는 가만히 땅만 보고있었는데
“ 너 우리학교지? 3학년인가? “
“ 너 이름이 뭐야? 김여주? “
“ 야 이거 비밀이다? 김여주 비밀지켜라. 나 간다. ”
박지훈은 내 명찰을 보고는 학년이랑 이름까지 알아내버렸다. 그러고는 비밀이라고 얘기하고는 먼저 반대편으로가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방금 일어난 일에대한 생각을 시작했다.
“ 내가 지금 뭘본거지….. “
곧 현실로 돌아왔고 나는 다시 학원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내 일상에 변한것은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기때문에 더이상 박지훈을 만날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일주일이 흐르고 오늘도 어김없이 학원이 끝난뒤 독서실로 갈 예정이었다.
같은학교에 학원도 같이다니는 유진이랑 항상 독서실을 같이같었기때문에 엘레베이터 앞에서 유진이를 기다리고 있는중이었다. 아 저기온다 근데 왜 뛰어오지? 독서실가는게 급한일도 아닌데.
“ 여주야! “
“ 재료정리 왜이렇게 늦게함! 빨리가자. “
“아니 여주야! 나 대박이야! 진짜 대박! “
“ 엥? 왜그래 “
“ 우리 00대 실기시험본거! 내가 1등이래! 원장님이 수상자 전형으로 수시로 갈수있대! “
“ 헐 미친 진짜?????? 와 김유진 성공했네. 겁나 축하해 진짜 우리학원 대자보에 걸리겠다.”
“ 아 고마워 여주야ㅠㅠㅠㅠㅠㅠ 너도 꼭 00대 와야해? 나랑같이 다녀줘ㅠㅠㅠㅠㅠ “
잠깐 설명하자면 00대는 내 성적으로는 갈수없는 학교였다. 미대에서도 알아주는 학교지만 일반계 네임이 워낙쎄서 공부도 빡세게 해야지 갈수있는 학교란 말이다.
“ 아무튼 그래서 가족들이 축하파티 열었다고 빨리 오래ㅠㅠㅠㅠㅠㅠ 나 독서실 못갈거같은데 너 독서실까지 데려다주려고 뛰어왔어! “
“ 아냐아냐 가족들 기다리는데 나 혼자 가도 돼! 빨리 가봐. “
“ 이제 같이 못가는데 오늘이라도…..! “
“ 아 진짜 고집쎄네. 빨리가! 아니다 그냥 나 먼저 간다? “
유진이 말을 끊어먹고는 내가 먼저 엘레베이터를 타버렸다. 고등학생이되고 처음 혼자가되어 가는 독서실이었다.
물론 꼭 둘이 같이간건 아니었지만 독서실을 같이 다니는 친구가있다는것 만으로도 만족이 되는거였다. 아 이제 밥도 혼자먹고 힘들때 얘기할 사람도 없겠구나. 싶어서 괜히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매일 학원에 가느라 저녁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서 독서실 가기전에 편의점에서 유진이랑 라면먹는게 내 하루의 낙이었다. 그것도 이제 혼자 해야한다. 배고프니까 밥은 먹어야지….
오늘은 우울한 날이니까 라면에 삼각김밥 음료수랑 후식으로 먹을 푸딩까지샀다. 친구의 일은 진심으로 기뻤지만 스스로에게 현타가 오는것은 막을수가 없었다.
여주도 같은 실기대회에 나갔지만 제일 작은 상도 받지 못했기때문일까, 아니면 앞으로 혼자 입시를 버텨야 한다는 다가올 외로움 때문일까.
멍하니 야외 테이블에 앉아 라면만 쳐다보고있는데 앞자리에 의자끄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박지훈이 의자를 뺀채로 잠깐 멈춰서 나를 쳐다보다니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뭐야 자리없나? 왜 여기앉아?
주위에는 빈 테이블이 많았다. 굳이 내자리에 앉은건 혼자 우울해하는 내가 불쌍해보였던건지 다시 입막음이라도 하려고 하는건지 알수없었다.
아니 실은 별로 생각하고싶지않았다. 당장 눈앞의 박지훈보다 지금 내 상황이 더 우울했으니까.
“ 너 맨날 친구랑 먹더니 오늘은 웬일로 혼자야? “
나 여기 맨날 오는거 알고있었구나. 나는 왜 못봤지? 박지훈이 눈에 안띌 애가 아닌데.
“ 유진이는 오늘 대학붙어서 이제 독서실 안다녀. “
“ ? 아직 수시 시작도안했는데 어떻게 대학에 붙을수가 있지? “
“ 그건……”
미술의 ㅁ자도 모르게생긴 애한테 실기대회부터 입시 시스템을 설명해주자니 갑자기 기운이빠져 말을 그만둬버렸다.
“ 뭐야 왜 말을 하다말아? 그건 뭐? “
“ 좀 복잡해. 아무튼 중요한건 유진이가 대학에 붙었다는거지. 근데 넌 왜 갑자기 아는척해? 나 알아? “
“ 응 김여주잖아. “
“ 그건 네가 담….. 아무튼 그날 내 명찰보고 안거고. 우리가 막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사이는 아니지 않냐? “
담배라는 단어를 꺼내려다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내 모습이 어이가 없는지 박지훈은 하하 거리며 웃었다.
“ 담배 얘기했는지 안했는지 감시하려고 말걸었다. 맨날 친구랑 같이있어서 말을 걸수가 있어야지. “
“ 야 나그런거 막 얘기하고 다니는애 아니야. 그리고 뭐 내가 말한다고 한들 누가 믿기나 하겠냐? 전교1등 박지훈이가 담배핀다는걸? 나만 미친년되는거야. 안말할테니까 걱정하지마. “
나는 말을 우다다 쏟아내고는 음료수와 푸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혼자 안먹어서 박지훈한테 고마웠다.
일부러인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울함을 날려주었고 밥도 잘 먹었고. 담배사건에대한 해명도 다 했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자 갑자기 박지훈이 되게 고맙게 느껴졌다. 사실 아까 내모습이 처량해보여 눈물이 좀 고일뻔했는데 울음을 싹 가시게 해줬으니. 그래 고마운거다 이건.
내가 일어서자 박지훈도 따라 일어났고 우리는 얼떨결에 같이 독서실에 가는 모양새가되었다.
계속 한걸음 뒤에서 걷는 박지훈을 내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자신도 같은 독서실에 다닌다고 말하고는 내 옆에 조금 떨어져 나란히 섰다.
그렇게 잠깐의 산책이 끝나고 독서실앞에 도착했다. 신발장으로 들어가려는 박지훈을 불러세워 손에있던 푸딩을 건냈다.
“ 실은 아까 좀 우울했는데 너랑 같이 밥먹어서 덜 우울했다. 고마워. “
“ 그럼 너 앞으로도 나랑 매일 밥먹어. 내가 시시껄렁한 얘기 많이해줄게. “
처음엔 놀란듯한 박지훈이 눈웃음을 보이며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다음날 부터 매일 박지훈과 10시에 편의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떼운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밥을먹고 항상 나를 먼저 들여보냈던 박지훈은 독서실에서 마주칠때마다 옅은 담배냄새를 풍겼다. 풍겨오는 담배냄새에 숨을 참았다가도 부모님한테 들킬텐데…. 걱정이 들었다.
이따금 그림이 안그려지는날엔 박지훈이 날 위로해주고 박지훈이 수시면접을 망친날에는 내가 한턱내며 서로를 응원했다.
나는 당연히 정시까지 봐야했고, 지훈은 높은 대학들의 최저를 맞추기위해 수능날까지 함께 독서실을 다녔다.
학교에서는 굳이 마주칠일이 없어 서로의 친구들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독서실 친구라고 여겼었다.
수능전날 서로 약국에서 청심환을 사주는걸 마지막으로 더이상 지훈이를 볼수없었다.
나는 수능을 보자마자 학원에서 하는 겨울특강을 들어야했기때문에 더이상 학교에 갈수없었고, 지훈이는 공부한다는 이유로 그 흔한 스마트폰도 쓰지않았기에 카톡으로 연락할수도 없었다.
두달여간 매일 밥을먹으면서 번호도 안물어봤다는걸 알게된건 수능다음날 선생님께 앞으로 못나온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학교에 갔을때였다.
너에게 수능을 잘봤는지 물으려 했지만 반에는 없었고 학교에서는 접점이 없는 사이였기때문에 누구에게 묻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전화를 해보려고 열어본 연락처목록에 너는 없었다. 마치 두달동안 밤마다 너와 만난게 환상처럼 느껴졌다. 혹은 망상일지도.
그렇게 내 고삼생활은 끝이났다. 나는 겨울특강때 실력이 물오른 덕분에 추가합격으로 00대에 들어갈수있었다. 가나다군중에 제일 높은곳인데 붙은게 기적이었다.
물론 나머지는 다 떨어졌지만 어차피 학교 하나밖에 못다니는데 많이붙어서 뭐해! 내가 00대에 추합되는날 유진이가 옆에있었다.
사실 난 재수를 마음먹은 상태여서 재수 시작전에 마지막으로 술한잔 하려고 만난거였는데, 홈페이지에 합격이라는 글씨를 보고는 둘이 얼싸안고 울었다.
포차 아저씨가 축하한다고 왕계란말이도 서비스로 줬었는데 거기에 흥이 올라서 그날 술값만 오만원을 넘게 썼던것같다.
과에 아는동기 하나있으니 나는 오티를 가지않았다. 어차피 그런거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안가도 다 친해진다길래 귀찮아서 그냥 빼먹었다.
하지만 중동오티는 가야만했다. 선배들도 처음 다 모이는 자리고 동기 애들도 온댔으니 빠지면 동아리하는 의미가없으니까.
개강을 하고 나는 영화동아리에 들어갔다. 전공에대해서 배울수도있고 대면식때만난 선배가 추천해주셔서 더 관심이갔다.
유진이는 독립영화에는 흥미가 없었는지 학교신문동아리에 들어간다고했다.
나는 적당히 외진 테이블에 앉아 동기들과 선배님들이 인사를 하고있었다. 모두 성격이 좋은 사람들인것같다.
술도 억지로 안먹이고 새내기들이 질문하는 방식으로 대화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실용음악과라는 얘가 핸드폰을 만지더니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따라 돌렸는데 맙소사 거기에 거의 반년만에 보는 박지훈이 서있었다.
“ 왔나. 과 오티중이라서 못온다더니 어떻게 왔는데. “
“ 1차끝났길래 몰래 나왔지. 야 박우진 넌 얘가 왜이렇게 핸드폰을 안보냐? “
“ 술마시는데 핸드폰 볼 일이 뭐가있냐. “
입구에서 걸어온 박지훈은 자연스레 내 대각선쪽에 앉았다. 그는 내앞에 앉은 실음과 남자애랑 얘기를하더니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아래로 깔고는 앞에 술잔만 계속 비워냈다. 잘 안취하지만 빨개지는 얼굴때문에 선배들이 다 나를걱정하며 말렸다. 되게 취한것처럼 보이려나?
아까부터 계속 박지훈의 시선이 느껴지는것도 같은데…. 너무 오랜만에 봐서 좀 놀랐다.
반년사이 박지훈은 키가조금컸고 검은머리가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눈은 여전히 예뻤고 스마트폰을 산 모양이었다.
동아리 부장선배가 2차에간다는 말을시작으로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박지훈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옆에있던 과 선배님께 차때문에 집에 간다는 말을 하고는 술집을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본게 박지훈이 맞는걸까? 박지훈이 계속 머리속을 빙빙 멤돌았다. 그리곤 술기운에 취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