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뉴이스트 - ONEKIS2
최면술사(下)
"눈 감고, 셋만 세면 다 잊어버리는 거야."
w. 랑두
김종현이 아팠다. 그냥 몸이 안 좋다 정도가 아니라 꽤 심한 것 같아 보였다. 혹시 내가 비 쫄딱 맞고 감기를 옮겼나 했는데 언뜻 보기에도 일단 감기는 아닌 듯했다. 나도 며칠 전에 알았는데, 그것도 하교 후에 천막을 찾아갔는데 그가 피곤한 얼굴로 몸이 안 좋으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해서였다. 그답지 않게 흐트러진 차림새에 핏기가 가신 얼굴이 누가 봐도 '나 아프다'라며 광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프다고요? 죽이라도 사다줄까요?'
'괜찮아, 밥 대충 먹었어. 못 데려다줘서 미안.'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에는 늘 웃고 있던 김종현인데도 그 미소가 금세 사그라드는 걸 보니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싶어서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김종현도 사람인데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겠지 뭐. 그런 와중에도 혹시나 내가 귀찮아진 걸까 봐 못 보는 내내 마음을 졸였었다. 언제 찾아가야 되나. 일주일 좀 넘게 지났으니까 지금쯤 다 낫지 않았을까. 첫만남 때 받은 명함에 그의 전화번호 열한 자리가 떡하니 적혀 있음에도 소심해서 그런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다. 어차피 김종현은 땅끝까지 추락했던 2년 전 일도 전부 알고 있을 테니 딱히 자존심 세울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다.
다시 만난 건 2주쯤 뒤 학교에서였는데 하필 그것도 좆같은 재회였다. 몸이 다 나은 건지 저번에 비해 확실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교문 앞에서 캔커피 두 잔을 들고 기다리던 그는 양아치 새끼들한테 따박따박 말대꾸하다 결국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오는 날 발견했고, 놀라서 들고 있던 캔도 버려놓고 달려왔었다.
"뭐야, 누구야?"
"야, 너 아는 사람이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 녀석이 날 툭툭 치더니 물었다. 여전히 한손으론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코앞까지 다가온 김종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동안 나와 놈들을 번갈아 보더니, 상황파악을 끝내자마자 손을 뻗어 녀석의 이마에 딱 소리와 함께 엄청난 명중률의 딱밤을 날렸다.
"…"
"…"
믿기 힘들겠지만 여하튼 딱밤이었다. 죽빵을 날려도 모자랄 상황에. 문제는 그 딱밤이 주먹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불러왔다는 데 있었다. 녀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고, 그의 무리는 일제히 입을 딱 벌린 채 길바닥에 엎어진 녀석을 쳐다봤다. 와중에 잡혀 있던 머리채가 갑자기 놓이면서 그 애 위로 쓰러질 뻔한 나를 김종현이 잽싸게 잡더니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뭐야 미친, 쟤 기절한 거야? 딱밤 한 대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김종현에게 질질 끌려가던 나는 천막에 도착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와 대박. 그쪽 딱밤계의 신흥강자였어요?"
"잠깐 재운 거야. 지금쯤 깼을걸?"
"…어쩐지."
생각해보면 김종현은 마음만 먹으면 시도때도 없이 사람을 재웠다 깨웠다 할 수 있는 능력자다. 손가락 튕겨서 최면 거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때려서 재울 줄은 몰랐지.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 정도면 녀석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다. 쌤통이다, 뭐.
"커피 타 줄까?"
"좋죠."
찬장을 뒤적거리던 김종현이 믹스커피 두 개를 꺼내들고 흔들어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캔커피도 떨어뜨리고는 못 주워 왔다. 하긴 그거 주울 시간도 안 되긴 했다. 오랜만에 천막에 오니 아늑한 느낌이 너무 익숙하다. 언제 앉아도 푹신푹신한 소파에 폭 파묻혀 천막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 시선이 멈춘 곳은 그림 같은 것들이 쭉 진열돼 있던 곳이었는데, 모양이며 색감이 너무 특이해서 기억에 확실히 남았던 추상주의 미술작품이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팔았나."
아쉽다. 그거 진짜 예뻤는데. 뭐 사실 그게 있든 말든 천막의 아늑한 분위기는 전과 다를 게 없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 언젠가 그 작품 이름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소파로 파고들다가, 그 순간 뭔가 쨍그랑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 헐, 괜찮아요?!"
학교까지 찾아오길래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싱크대를 붙잡아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에 곧바로 다가갔다. 그런데 내가 그쪽으로 갈 동안 김종현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직 몸 안 좋은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떨어진 티스푼을 주워 대충 물에 헹구고는 괜찮다며 웃어보이기 전까지는, 당장 약국이라도 가서 온갖 종류의 약을 쓸어담아 올 기세였다.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응. 딴생각 하다가 잠깐 헛디뎠어."
"아 진짜, 놀랐잖아요…"
"놀랐어?"
그가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끝이 정말 평소와 다를 거 하나 없어서 겨우 안심이 됐다. 커피잔을 받아들고 먼저 소파로 가 앉으니 곧이어 맞은편에 앉은 김종현이 커피는 마시지도 않고 내려놓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너, 아까는…"
"괜찮아요. 일상인데 뭐."
"그렇다고 머리채를 잡아? 왜 그런 거야?"
"괜찮아요, 버틸만해요. 어차피 졸업하면 얼굴 안 볼 사인데."
"…"
"아 맞다, 나 아까부터 하고 싶은 거 있었어요."
내 말에 다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김종현이 비로소 고개를 든다. 사실 오랜만에 김종현이랑 같이 있어서인지 딱히 하고 싶은 게 더 있지도 않다. 학교라는 주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날 빤히 쳐다보았다. 괜히 시선을 피하면서 머릿속으로 뭘 하고 싶다고 말할지 궁리하다가, 진열장에 장식되어 있는 스노우볼까지 시선이 닿는다. 함박눈이 내리는 스노우볼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눈사람이 눈에 띄었다.
'엄마 언제 와요? 아빠가 눈 오면 셋이 같이 눈사람 만들러 가자고 약속했는데.'
'야, 눈사람이 뭐가 유치하냐… 그럼 너네 오늘 안 나올 거야?'
'…알았어, 노래방이나 가자.'
생각해보니 난 눈사람을 만들어본 기억도 없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맞벌이하시느라 너무 바빴고, 친구들은 저마다 스키장이나 썰매장 같은 곳으로 가족여행을 가느라 집에 있지도 않았다. 좀 커서는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친구들조차도 유치하게 눈사람이 뭐냐며 저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 눈덩이를 굴리고 있자니 괜히 우울해져서 다 만들지도 못하고 축 쳐진 상태로 집으로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 좀 유치하긴 한데."
"응."
"…눈사람 만들어보고 싶어요."
솔직히 인정한다. 열여덟살과 눈사람은 아무리 들어도 어딘가 이상한 조합이긴 했다. 적어도 내 주위 사람들은 18살 먹고 눈사람을 만든다는 거 자체를 유치한 행동으로 여겼다. 아니 그 이전에, 지금은 같이 눈밭을 뛰어다닐 친구 하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나도 눈사람 좋아해. 만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김종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더니 아까 봤던 스노우볼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그 주위로 눈사람이라던지 산타, 루돌프 같은 장식품들이 족히 열 개는 넘게 있는 것 같다. 아까는 미처 못 봤었는데. 자주 오면서도 여기 겨울 장식품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겨울 좋아해요?"
"겨울을 좋아한다기보다는… 겨울 풍경?"
잘 어울린다. 지금이야 가을이라 셔츠 차림이라지만 나중에 코트 같은 겨울옷 입어도 소화 잘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김종현은 저거보다 더 예쁘게 만들어보자, 라며 딱 손가락을 튕겼다.
***
바닥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피아노로 연주되며 배경음악 역할을 했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켜진 가지각색의 조명이 거리를 밝혔다. 갖가지 장식품들로 예쁘게 꾸며진 트리가 눈밭의 정가운데 위치했고, 곳곳에 커다란 눈사람들도 보인다. 어째서인지 집은 많으면서 나와서 노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 밟아 자국을 남긴다고 해도 금방 그 위로 흔적도 없이 쌓일 것처럼 눈이 펑펑 쏟아졌다.
"와, 여기 되게 예뻐요. 크리스마스 마을 같아."
"다행이다. 춥지는 않고?"
"네, 별로."
눈밭에 발을 디디자 선명한 발자국이 남았다. 날씨가 달라졌다고 옷차림까지 바꿔놓았는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꽤 두꺼워서 추운 것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도 김종현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공간일 테니 최면에서 깬다고 해도 똑같은 풍경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둘째치고 어차피 난 기억도 못할 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우울해졌다. 같이 만든 추억을 혼자만 간직한다는 게, 그의 입장에서 봐도 썩 기분 좋진 않을 것 같았다.
"…?"
그런데 정작 하고 싶었던 눈사람 만들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때, 별안간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트리에 장식된 꼬마전구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형광등까지, 그곳에 있는 조명이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당황한 눈으로 김종현을 쳐다봤는데,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내 팔을 꽉 붙잡고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그 예뻤던 눈밭의 조명이 모두 암전되고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고, 나는 내 팔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거 무슨, 뭔 일 났어요? 어떻게 좀…"
암흑 속에서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겨울 칼바람이 피부를 벨 듯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되니 점점 감각이 사라지면서 그가 내 팔을 놨는지 아니면 계속 잡고 있는 건지도 애매모호해졌다. 소복이 쌓이고 있던 눈도 공기가 변하면서 달라졌다. 칼바람에 걸맞게 눈보라로 변한 함박눈은 눈도 제대로 못 뜰 만큼 쏟아졌다.
눈을 꽉 감았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심한 눈보라는 못 봤단 말야. 쾅 하는 천둥소리도 들렸다. 난생 처음 보는 예쁜 풍경이 난생 처음 겪는 악천후로 바뀌어 버렸다. 적어도 그는 언제나 따뜻했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나한테까지 온기가 전달됐었는데, 대체 얼마나 추운 건지 암흑 속에서 그의 존재조차도 인식되지 않았다.
"00야, 눈 떠."
"…"
"나 옆에 있어. 일단 여기서 나가자. 괜찮으니까 눈 떠, 응?"
그의 말을 알아듣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래도 어둠에 어느 정도 적응한 모양인지 형태 정도는 인식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김종현은 정말 내 옆에 있었고, 그가 날 꼭 안음과 동시에 항상 그랬듯이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
확실히 최면에서 깨어난 직후는 개운하다. 오랜만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분 좋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앉아있는 김종현에게 다가가자 그제서야 내가 깬 걸 눈치챈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제 일어났냐고 물어온다. 최면 속에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던 건지 표정이 꽤 심각했다. 난 너무 기분 좋게 일어나서 당연히 최면 속에서의 일도 마냥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무슨 일 있었어요?"
"조금."
"뭔데요. 심각해요?"
당연히 심각하겠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날 아주 잠시 쳐다보던 김종현은 얼마 못 가 시선을 피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모습에 불안해지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단기간에 힘을 너무 많이 썼어."
"…"
"그러니까, 내 말은… 당분간 최면으로 어딜 데려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그래서 아파요?"
"뭐?"
"그쪽 요 며칠 아팠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그때 그의 상태가 꽤 심각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감기는 아닌 것 같고, 긴가민가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단기간에 힘을 너무 많이 썼다는 건 아무래도 건강과도 직결되는 문제인 것 같았다. 그거 때문에 아팠던 거냐고 물어봐놓고도 나는 그가 아니라고 말하기를 속으로 몇 번이나 빌었다.
"…그런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이 맞다는 걸 확실하게 단정지었다. 목 부근에서 뜨거운 게 울컥 차올랐다. 결국 난 폐만 끼친 거잖아.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받은 것만 많지 준 건 아무것도 없다. 볼에 난 상처를 소독해주던 김종현, 경쾌한 딱 소리와 함께 날 환상 속으로 데려가주던 김종현, 뜬소문은 안 믿는다면서 날 꽉 안아주던 김종현,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나한테 그렇게 많은 걸 주지만 않았어도 2주 동안이나 아플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쩌면 김종현은 나랑 같이 있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내가 필요 없으면 없었지 그닥 쓸모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어금니를 꽉 물어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터져나왔다. 당황한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고, 난 눈물 때문에 알아듣기도 힘든 목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갈래요. 갈 거예요."
"김00."
"나 더 이상 그쪽한테 폐 끼치기 싫어요."
가방을 챙겨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눈물이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다시 찾아오면 양심도 없는 거다 진짜. 눈물범벅이 되어 뛰어가고 있는 날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거렸다. 결국 나로서는 이렇게 그를 다시 안 보겠다는 폭탄발언을 던지고 온 거나 다름없었다.
*
"00야, 11월이다. 달력 찢어."
"…응."
달이 바뀌었다. 엄마 말에 달력을 찢으면서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뛰쳐나온 이후로 나도 찾아가지 않았고, 그도 찾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들어올 때까지도 울음이 멈추지 않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놀란 엄마한테는 상황설명도 해주지 않은 채, 그저 폭 안겨서 한참을 더 운 다음에야 겨우 그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에게 받은 연고랑 명함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일주일 전인가, 김종현이 없으니 양아치들의 괴롭힘을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양심 따위 집어던지고 명함에 쓰여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세요, 따위의 말을 내뱉는 건조한 음성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새 번호도 바꾼 건가, 씁쓸해지면서도 안 온다고 한 건 나였으니 그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달력을 찢은 날, 등교하면서 조금 당황스러웠었다. 평소에도 다들 날 손가락질하면서 쳐다보긴 했지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좀 다르다. 보통이라면 살인자 년이라며 비난해야 될 애들이 날 도저히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지나갔다. 뭔 일이지, 또 이상한 소문 났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항상 느끼지만 관심받는다는 건 꽤 거북한 일이다. 제발 나도 좀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은데.
"…00야, 우리랑 같이 매점 갈래?"
차이점을 깨달은 건 그때부터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날 누군가 톡톡 깨웠다. 내가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갈 때도, 모두가 날 욕하며 수군거릴 때도 나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여자애들이었다. 그냥 아, 우리 반에 저런 애가 있었구나, 정도로 인식되었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토끼눈을 뜨고 걔들을 쳐다봤고, 그 애가 한번 더 말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들은 심지어 매점에서 내 몫까지 계산해 줬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저기,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망설이자 크림빵이랑 초코우유를 계산하더니 내 손에 떠안긴 애들이 내 말에 동시에 뒤돌아봤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는 걸 보니 내가 꽤 난감한 질문을 했나 보다. 하지만 이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실이었다. 살인자라고 왕따당하는 애한테 갑자기 말을 거는 이유가 뭔데?
"너 사람 죽인 거 아니라며. 학교에 그거 오해라고 소문 쫙 났어."
"…"
"그동안 잘못 생각해서 미안하고… 괜찮으면 오늘부터 밥 같이 먹자."
꿈인가 싶었다. 진짜로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놓고 그 애들 몰래 손톱으로 허벅지를 꽉 꼬집었는데, 꽤 아픈 걸 보니 확실히 이게 실제 상황이긴 한가 보다. 대체 어쩌다 이런 소문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해는 풀렸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좋았다. 여전히 날 손가락질하면서 안 좋은 눈으로 쳐다보는 애들이 많았지만, 일단 혼자는 아니니까 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다.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오해가 풀려서 친구도 생겼다고 자랑하고, 축하도 받고. 그날 점심시간에는 애들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눴고, 평범하게 웃었고, 평범하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교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원했던 평범한 일상에 녹아들었으니 이제 평범과는 거리가 먼 김종현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천막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
"…뭐야."
조심스럽게 천막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흠칫했다. 천막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다. 3주만이었다. 그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꽉 차 있던 천막이 한눈에 보기에도 공허해 보였다. 벽지에 금색으로 새겨져 있던 고상한 무늬도, 촛불이 공기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며 기분 좋은 향을 퍼뜨리던 향초도, 금색 촛대와 앤티크한 서랍도 모두 사라졌다. 내가 다시 한 번 놀란 건, 그가 긴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또 아파요?! 눈 좀 떠 봐요…!"
내가 그의 어깨를 붙들고 몇 번이나 세게 흔든 다음에야 그는 눈을 떴다. 이제 눈치챘는데 호흡도 조금 거친 느낌이다. 열도 나나 싶어서 이마를 짚어봤는데 열은커녕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늘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던 그였기에 지금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게 뼈저리게 다가왔다. 병원이라도 데려가야 되나, 고민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그가 웃었다. 웃어? 지금 이 상황에?
"와, 오랜만이다."
"…"
"그래도 한 번쯤은 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웃는 얼굴에 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휙 고개를 돌렸다. 뭔가 했는데 진열장에 놓여 있던 스노우볼이 깨진 모양이다. 건들지도 않았는데 왜 깨져.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진 조각들이 파스스 모래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무슨…"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옆에 있던 다른 장식품이 톡톡 소리를 내며 갈라지더니, 얼마 안 있어 좀 전의 스노우볼처럼 와장창 깨졌다. 곧 그 장식품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그제서야 눈치챘다. 이 천막이 3주만에 이렇게 비어버린 이유, 그리고 조만간 이 천막 안의 모든 물건들이 이런 식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 아마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던 그 추상주의 미술도 이렇게 사라졌을 것이다.
천막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직감이었다. 아직도 진열장 쪽에서는 톡톡, 쨍그랑, 가지각색의 소리들이 앞다투어 나고 있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물론 오늘을 마지막으로 천막을 더 이상 찾지 않을 생각이긴 했지만, 그거랑 천막 자체가 사라지는 거랑은 좀 다른 문제잖아.
"00야."
"말하지 말고 그냥 자요. 몸 상태도 별로면서."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나도, 이 천막도."
"…무슨 미친 소리예요?"
여전히 웃고 있는 그를 쳐다본다. 올해 들은 소리 중에 제일 이상한 말이다. 그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친구 생겼잖아. 이제 네 인생에서 나 하나쯤은 없어져도 될 테니까."
"…친구 생긴 거 어떻게 알았어요?"
"…"
"그쪽이 학교에 소문냈어요? 나 사람 안 죽였다고?"
"…응."
진짜 미쳤나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내 눈을 김종현이 손으로 덮었다. 그러더니 조그맣게 말한다.
"눈 감고, 셋만 세면 다 잊어버리는 거야."
"싫어요. 맨날 올 거야. 내가 그쪽을 왜 잊어버려요."
씨발, 하지 말라고. 그놈의 최면 걸리기 싫다구요. 그쪽은 왜 하필 최면술사라서 이렇게 사람 기억 맘대로 갖고 노는 건데. 뚝뚝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이 어느새 주체할 수 없이 많아졌다. 그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내 기억을 말끔히 지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더 감정이 북받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던 그는 손을 옮겨 정확히 내 눈앞에서 딱 소리를 냈다.
'다음에 기회 되면 꼭 또 보자.'
정신없이 울면서도 조금씩 몽롱해지는 와중에,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
"00야!"
"뭐야. 김00 존나 늦어. 지각쟁이."
친구들은 저마다 예쁘게 꾸미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대놓고 엄청 튀는 색으로 염색한 애도 있다. 어차피 수능도 끝났으니 더 이상 선생님들의 지적은 없을 테지만 교복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머리였다. 와, 진짜 수능 끝났네. 그 애의 머리색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정말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날씨가 그닥 좋지는 않았음에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펑펑 놀았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난 날에도 학원에서 작년도 모의고사를 풀며 썩어야 했던 지난날들에 보상이라도 하는 듯, 하루종일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전부 사들였다. 해가 지고 컴컴해졌을 때에야 친구들과 헤어졌는데 대체 돈을 얼마나 써댄 건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려 보는 사치였다.
"…"
왠지 모르게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한 건 그 부근에서였다. 옛날에 뭔가 있던 곳인 것 같았고, 내가 그 장소를 꽤 좋아했던 건 확실한데 어딘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여길 지날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떠안고 가야 했다. 기억하고 싶은 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 안 난다는 건 꽤 찝찝하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마주한다. 3초만에 나는 손에 잔뜩 들린 쇼핑백을 바닥에 와르르 떨궜다. 안에 든 게 저만치 굴러가든 말든 전혀 상관없었다. 일단 달려가서 안기고 본다. 머릿속이 퍼즐이라면, 언제부턴가 한 조각이 빠진 듯 허전했었는데 왜인지 알 것 같다. 이 사람을 기억 못 해서. 김종현을 못 떠올려서. 이제서야 그 퍼즐조각이 맞춰진 듯했다. 최면술사, 천막, 깨지고 사라지던 그 안의 장식품들… 조금씩 돌아오는 기억에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요…"
"아, 왜 또 울어. 맨날 울어."
"…진짠데."
꼭 최면술사가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앞으로는 아프지 말고 옆에만 있어요. 그에게 폭 안긴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받기만 했으니까 이제 내가 돌려줄 차례다. 일 년만에 다시 안긴 김종현의 품에는 어느새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사실 원래는 새드엔딩으로 마무리짓고 싶었는데요... 제가 해피엔딩병이 있어서 실패해씀다 하핫 그래서 결말이 노잼이네요8ㅅ8 그래도 어찌저찌 완결은 내서 다행입니당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정말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