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겨울.
"민현이 oo고 붙었다더라"
"알고 있어."
"아유 둘이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이제 고등학교는 따로 가서 어떡해"
"집이 바로 옆인데 또 지겹도록 보겠지 뭐!"
안타까워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서도, 은근히 마음 속 가득 섭섭함이 묻어 있었던 16살의 나.
황민현은 나한테 그런 존재였다. 곁에 있는 게 당연하고, 없어지면 조금은 허전하고 섭섭한.
그냥 평범한 친구 같은 존재. 이성친구였지만, 단 한번도 그런 걸 의식해본 적은 없었다.
내 곁엔 늘 황민현이 있었고, 황민현의 곁에도 늘 내가 있었다. 그게 당연했고, 아무렇지 않았다.
마냥 작아보였던 황민현이 갑자기 키가 크기 시작했고, 우리의 눈높이의 차이도 점점 벌어졌던 그 시기.
그 때에 우리는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2011년 봄.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하자마자 야자라는 걸 시작했고, 중학교 때는 생각도 못했던 깜깜한 밤에 집으로 하교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여자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 나는 금방 적응해서 친구들과 거의 학교에서 하루의 반 이상을 지내게 되었다.
꽤 공부로 이름을 날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황민현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 둘은 점점 매일 얼굴을 보던 익숙함에서 한발짝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2011년 겨울.
언니가 대학에 합격했다.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손에 꼽히는 대학에 안정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 가족보다도, 황민현네 가족이 더 기뻐하며 축하를 해줬고, 우리는 집에서 작게 축하파티를 하게 되었다.
오며가며 그냥 인사만 해서 약간 데면데면 해졌던 나와 황민현은 오랜만에 긴 시간동안 함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우리는 금방 다시 익숙해져서 장난을 치며 간만에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난 조금 커진 황민현의 손 빼고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왜 알아챘던 걸까. 나와 장난치고 얘기하면서도 자꾸만 우리 언니 쪽을 향하는 민현이의 시선을.
아니, 왜 이제서야 알아챘던 걸까. 언제부터 황민현의 시선은 그 쪽을 향하고 있었던 걸까.
그걸 이제서야 의식해버린 내 시선의 끝은 왜 또 황민현에게 닿아있는건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감정의 소용돌이에 17살의 나는 이게 나의 첫사랑이라고, 그리고 아마 실패할 첫사랑이라고 단정짓고 말았다.
*
"아, 피곤해 죽겠다.."
"너 야간 알바 한다더니, 그거 땜에 그래?"
오랜만에 밤을 새서 그런지, 아침 수업에서 정신없이 졸아버렸다.
3시간 내내 헤드뱅잉을 해서 그런가 목도 뻐근한 거 같고.
'커피라도 사다줄까?' 걱정스레 물어오는 유진이의 말에 괜찮다며 손을 젓고는 동아리방 쇼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쓰고는 눈을 감았다. 1시간만 자야지.
"나 1시간 뒤에 좀 깨워줘.."
"얘가 뭐래. 나 10분 뒤에 수업인데요?"
"..아씨.. 그럼."
가방에 있는 공책에서 대충 종이를 찍 찢어서 '1시간 뒤에 깨워주셈' 이라고 끄적이고는 내 머리맡에 두었다.
이러면 동아리방에 들어오는 천사 한 명은 날 깨워주겠지.
맘 편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내 모습을 보고 혀를 찬 유진이가 동아리방을 나갔다.
끼익-
10분쯤 지났을까. 이제 막 잠으로 빠져들려고 하던 때쯤, 동아리방 문이 열렸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내 잠을 방해한 사람에게 굳이 다시 일어나 인사를 하기는 귀찮아서 그냥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잠시 멈춰있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쪽으로 점점 크게 들려왔다.
황민현 향수 냄새다.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 심장소리가 황민현한테 들킬까 싶어서 긴장해버렸다.
누구보다 깊이 잠에 빠져든 척 숨소리까지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황민현이 내 앞에 서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씨, 빨리 좀 가라.. 나 자는 얼굴 존나 못생겨서 쳐다보는 건가.
"..못난이"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머릿속으로 혼란을 느낄 때쯤,
황민현이저 한마디와 함께 의자를 끌고 와서 쇼파 앞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못난이라니. 얼마나 못난이길래 의자까지 들고와서 앉아서 관찰을 하려는거야..
두근두근,
좁은 공간에 나와 황민현 둘의 숨소리만 들리는 이 상황이, 내 건강에는 전혀 좋지가 못했다.
그리고 황민현이 내 뺨에 손을 대는 순간, 내 모든 정신 회로는 멈춰 버렸고.
"..."
"...야, 안.. 야 안 잤ㄴ..냐?"
미쳤지. 내 뺨을 쓰다듬는 황민현의 손길에 깜짝 놀라서 그만 눈을 번쩍 떠 버렸다.
그리고는 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던 황민현의 눈과 곧바로 마주쳤고.
황민현은 놀란 건지 눈을 크게 뜨더니 한참을 어버버 거리다가 뒤늦게 내 뺨에서 손을 거두고는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깨워서 미안. 더 자"
"...좋아해."
급하게 동아리방을 나가려는 황민현의 손목을 붙잡고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황민현은 제 손목을 붙잡은 내 손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
그리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하긴, 이게 첫번째 고백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너무 뜬금없이 두번째 고백을 하게 된 것 같아 나 자신도 좀 황당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대로 황민현이 방을 나가버리면 또 예전과 똑같이 황민현을 대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 아직도 너 좋아해."
"...그렇구나."
그렇구나.
황민현이 그 말을 뱉고 우리 사이에는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황민현은 나를 쳐다봤고, 나는 바닥만 쳐다봤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뜨린건 동아리방으로 몰려들어오던 후배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둘을 향해 인사하는 후배들. 그리고 그런 후배들에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웃어주는 황민현을 보니 괜히 또 짜증이 나서,
그만 성큼성큼 걸어서 방을 나왔다.
'좋아해.'
'뭐?'
'내가, 너, 조아한다고..'
우리가 처음 20살이 되서, 같이 편의점 앞에서 처음 맥주를 마시던 그 날.
내가 했던 첫 번째 고백은, 결국 너의 답을 듣지도 못한 채 술기운에 쓰러져버린 너를 데려다 주는 걸로 끝났고.
이번에도 아마 흐지부지 똑같이 끝나게 될 거라는 느낌이 왔다.
싫으면 싫다고, 넌 여자로 안 느껴진다고, 그 한마디만 해주면 될 걸.
맨날 황민현은 저런 식이다.
애매한 감정. 항상 조금씩 남아있는 기대.
그리고 난 또 내일부터 황민현을 똑같이 친구로 대하겠지.
*
"안녕하세요!"
9시 50분. 정확하게 10분 전에 도착해 자랑스러운 미소를 띄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를 보고 무심하게 목례를 하는 남자의 모습.
낯을 많이 가리는건지, 원래 저렇게 무심한 성격인건지. 어쨌든 참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다, 라고 느꼈다.
어제는 미처 확인을 하지 못했는데, 남자가 입고 있는 조끼의 명찰에 '김종현'이라는 글자를 확인했다.
"저는 김수민. 이라고 합니다!"
"김 종현이요."
오! 내 말에 대답을 해줬다.
게다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에 나는 괜시리 들떠서 그만,
"그..! 웃는 게 예쁘시네요! 자주 웃으세요"
"..."
내 발언에 당황한 건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남자의 모습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옷을 갈아입으러 자리를 피했다.
나도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저렇게 나보다 더 낯을 가리는 사람을 보면 괜히 평소보다 나대는 성향이 있다.
어쨌든, 남자의 황당한 표정을 다시 떠올리니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일시적인 기대는 다시 접게 되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다시 목례를 하고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왠지 한 발짝 더 멀어져버린 느낌이었다.
*
"..어서오세요!"
새벽 2시가 다 되 가는 시간. 점점 졸음이 몰려와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한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확 풍기는 술냄새에 잠시 코를 막았다.
취객인가보다 싶은 마음에 살짝 긴장을 하며 남자를 살폈다.
비틀비틀 자기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남자는 물건을 고르는 듯 하더니 이내 나를 쳐다보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 풀린 눈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급히 휴대폰을 손에 쥐고 계산대 밑으로 감췄다.
"야 ㅆ발.. 뭘 쳐다봐.."
"...네? ㅇ, 안 쳐다봤는..데요."
"니ㄴ이 존나 기분 나쁘게 쳐다봤잖아!!! ㅆ발!!! 너도 나 무시하냐?"
쾅!
계산대 위를 퍽 내려치는 남자의 행동에 놀라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트려 버렸다.
이럴 때는 크게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청하라고 들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놀라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으려고 하는데,
"..악!"
"야 너 일로 나와봐. 니 ㄴ 오늘 잘 걸렸다 ㅆ발..!"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아채는 남자의 손길에, 나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고.
멍청하게도 그 순간까지 머릿속에는 내 알바를 걱정하던 황민현의 얼굴만이 가득 채워졌다.
Rrrrrr-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 때즘,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까만 화면에 [황미년] 이라는 익숙한 글씨가 뜨자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고,
최대한 저항하며 바닥에서 울리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려 하던 그 때.
딸랑-
"ㅆ발 뭐야!!! 이거 안 놔?!!!"
"신고할 수 있겠어요? 힘들면 핸드폰 줘요."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취객의 팔을 잡아 힘으로 제압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몇 시간전 떠났던 알바생이었다.
취객를 잡고 있는 와중에 내 쪽을 바라보며 걱정해주는 듯한 남자의 물음에,
나는 눈물을 닦고 애써 정신을 차리면서 휴대폰으로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금방 편의점에 도착했고, 아직도 난동을 부리고 있는 취객을 데리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해 가까스로 벽에 기댔고, 남자는 그런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다가왔다.
"..괜찮아요?"
"네, 감사해요 진짜... 너무 놀라서..."
소매로 대충 남아있는 눈물을 닦고 남자에게 꾸벅 꾸벅 인사를 했다.
정말로,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남자형제나 남자친구.. 없어요?"
"..네?"
"아니.. 이 근처에 취객이 많아서 새벽에 위험하거든요. 전에 알바생도 그것 때문에 그만 둔거에요. 남자형제나 남자친구 있으면 새벽에 부를 수라도 있는데.."
"...둘 다 없네요."
순간 황민현이 잠깐 생각나긴 했지만, 남자형제도 남자친구도 아니라서 그냥 넣어뒀다.
남자는 내 대답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갑자기 내 앞으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의 손만 멀뚱멀뚱 바라보는데,
"휴대폰 줘요. 번호 찍어줄게요. 나 이 근처 사니까, 혹시 위험한 일 생기면 이 쪽으로 전화줘요."
"..네?! 그건.. 너무 죄송한데..."
"괜찮으니까 줘요. 어차피 새벽에 거의 깨있거든요."
너무 민폐를 끼치는게 아닌가 싶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휴대폰을 건네줬다.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김종현'이라는 세 글자까지 입력한 남자는 다시 내게 폰을 건넸다.
생각보다 엄청 친절한.. 아니, 다정한 사람이구나.
"감사해요.. 매번 신세만 지네요."
"그럼, 나중에 밥 한번 사주세요."
"..녜?"
"하핳.."
*
분량조절 실패..
부기의 하핳에서 이상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네요오..
갈수록 이상해지는 거 같은 스토리.. 졔송하빈다
그래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분들 감사해여!!
더 글 다듬어서 올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