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코]빼앗긴
W.지호야약먹자
몇 해전, 혹여나 독립군일까하는 일제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눈물을 머금고 잘라낸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깔끔히 다듬는다는 것을 근 몇 달간 상해로 충칭으로 왔다갔다를 반복하느라 대충 쳐내기만 했더니 또 어느새 뒷목을 덮으려한다.이제는 길어지는 머리가 더 어색하게 되어버린 지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언제부터 짧은 머리가 편해진 건지...아주 아이때부터 길러온 것이건만.
몇 해 전부터 더욱 심해진 일제의 탄압에 그리 굳건하시던 아버지는 당신의 머리를 자르시고 완강히 거부하던 지호의 머리 역시 잘라내셨다. 그럼에도 이듬해 여름, 안그래도 일제에게 눈엣가시셨던 아버지는 우리말을 사용했다는 시덥지않은 이유로 꼬투리가 잡혀 끌려가다싶이 들어간 감옥에서 어떤 모진 고문을 당하신 것인지, 풀려나자마자 급속히 나빠진 몸 상태에 눈을 감으셨다.
문득 떠오른 옛 생각에 눈을 지긋이 담았다 떴다. 겨우 흐르지 않고 매달려있던 물방울은 얄궂게도 눈을 찌르는 앞머리에 의해 눈꼬리에서 뚝뚝 떨어져내렸다.괜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고 눈을 비비고는 다시 들고있던 하얀 봉투로 눈을 내렸다.
zico
단 네글자에도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그의 어머니는 어느 돈많은 일본인을 따라 국적을 포기했던 한국인이라고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씁쓸해보였다. 그는 요즘 서양식이 유행이라며 자신에게 이름을 하나 추천해줬었다. 사실은 그냥 그가 불렀던 별명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지만, 얼마없는 자신들의 잘못을 제대로 알고 조선을 낮게 내려보는 것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봐주는 그가 좋아 그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했다. 지겹고 소름돋는 고향에서 몰래 빠져나와 경성으로 숨어들어온 것이라던 그는 결국 본가의 사람들에게 잡혀 그 곳으로 돌아갔다.오랜만의 서양식 이름에 그가 생각났다. 반쪽짜리지만 그래도 조선인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지었었지.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안재효, 였던 듯 싶다.
혹시나 그일까, 하는 마음으로 잠시 기대했지만 글씨체로 미루어보아 확실히 우리 단체에서 온 것이다. 이태일의 글씨겠지. 우리 단체에서건 어디서건 꽤나 알아주는 명필이니까. 하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혹여나 들킬까, 혹여나 비밀이 새어나갈까 인기척은 물론 개미 한마리도 없을 조용한 뒷골목에서 은밀히 정보를 주고받거나 누가 누군지 분간이 어려울만치 북새통인 시장바닥에서 스쳐가듯 전갈을 주고받던 그들인데 무슨 연유에선지 집 문짝의 우편물 투입구를 통해서 전갈을 전달했다...바쁜일인 건가. 아까 머리를 쓸어올리던 손길과는 달리 행여나 편지에 이상이 생길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투 끝을 찟었다. 내용은 이태일의 작품이 아닌 건지 악필은 아니지만 이태일과는 확실히 다른 글씨의 편지가 써져있었다.
-경성에 있을 우지호에게. 불같은 성격에 혼자 경성에 있는 네가 걱정된다. 외로움도 잘타는 성격이 양식의 커다란 집에 적응할까싶다. 혹여나 외로워도 이제 걱정 말아라. 곧 사람들로 붐빌테니. 그리고 그곳이 아무리 헐버트씨가 사들였다고는해도 요즘 일제의 동태로 봐서는 조심해야할 것이 분명하니 너는 혹여 일제가 집을 뒤지진 않는지 잘 알아둬. 우리가 회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이닥치면 우린 끝이나 다름 없을테니. 그리고 그 집엔 지하도 있다. 네 성격에 돌아다니지않았았을 것이니 몰랐겠지만, 그곳을 회의할 때 쓰려하니 정돈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김구선생께서 보내셨다는 젊은 친구가 하나 들어왔다. 두뇌가 명석한 게 행동파인 너와 잘 맞을 것 같아 데려갈 거다. 자세한 것은 다시 이런 식을 연락해서 알려주겠다. 그 때까지 몸 조심해라.
임성빈-
형의 편지다. 신민회가 사라지고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듯 싶었지만 성빈은 꽤 살던 친일파 가정에서 태어나 그 잔인함에 질려버려 돈을 모아 사회로 나와 신민회의 뜻을 이어 비밀리에 보민회를 만들었다. 규모가 제법 컸던 신민회와는 다르게 신뢰할 수 있는 젊은 친구들로 구성해서 규모를 작게 만들었지만 다른 여러 독립단체들과 긴밀하게 이어져 작은 규모의 단점을 커버했다. 현재까지는 보민회의 회원들은 물론 보민회의 존재조차 일본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이있는 거겠지...
성빈의 얼굴을 생각하니 갑작스레 외로움이 밀려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혼자있다보니 외로움을 타게된다. 진짜 친형같이 잘 대해주셨는데. 괜히 보고싶어져 다시 붉어지는 눈시울에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돌와왔을 때 방은 충분하겠지. 지하는 내일 내려가는 걸로 하자. 오늘은 늦었으니 눈을 좀 붙여야겠다. 하루종일 총독부의 낌새를 알아보려 신문사에도 가보고 몰래 심어놨다던 정보원도 만나느라 몸이 피곤하다. 갑갑하게 조여오는 양복의 넥타이를 끌러냈다. 단추를 두어개 푸니 그제야 숨이 트이는 듯 싶다.
똑똑
이제 막 자켓을 벗고 조끼를 벗으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현관을 쳐다봤다. 누구지, 여길 아는 사람은 단체 회원들 뿐이다. 발소리를 죽이고 항상 차고있던 총을 꺼내들어 장전했다. 문에 난 구멍으로 슬쩍보니 익숙한 얼굴, 박경이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헛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긴장감이 없지 너는?"
오랜만의 얼굴에 웃음기가 묻은 말투로 말하니 너 보러오는데 무슨 긴장감이 필요하냔다. 이렇게 생각없이 행동하는 듯 싶어도 차갑게 할땐 누구보다 차가워지고 일처리를 제대로 하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성빈이형한테 편지 안받았어?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거야."
"뭐야. 다 따로 와?"
아...내가 대답해도 바보같은 질문이였다. 지금이 어느 상황인데 광고하듯이 단체로 몰려오겠나...박경도 마찬가진지 허허, 웃다가 말을 잇는다.
"걸리잖아. 아무튼 성빈이형이랑 민혁이형. 김유권도 올 거야. 물론 다 따로따로 아, 이태일도."
"그래...아, 근데 나랑 같이 움직인다는 애는 누군데?"
"아아...표지훈? 나도 걔 봤어. 꽤 똑똑해 보이던데. 힘도 있을 것 같고. 지금은 일본에 스파이로 일한다던데? 걔는 성빈이형이 직접 데려온다더라."
표지훈?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리고 사격도 수준급이던데. 너랑 잘 맞겠어...어? 너 오른손에 그거 총이냐? 얼씨구? 장전까지?"
우리 처지에 집을 누가 두드리는데 긴장되지 않겠어? 니가 이상한거다. 일단 늦었으니까 아무데나 들어가 자라. 분명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잠시 생각하다가 곧 동료가 될 사람을 의심하면 안되지싶어 머리를 헤집으며 내 방으로 갔다. 뭘 주지도 않고 대접도 안한다며 투덜거리는 박경에게 여기가 니 집인데 뭔 대접이냐고 쏘아주고는 쏙 방으로 들어왔다. 방 구석에 걸려있는 거울을 슬쩍 보니 눈이 빨개져 울었다는 게 뻔히 보인다. 박경이 괜히 시덥잖은 소리를 한 건 아니었구나. 내 기분을 고려한 것이 분명하다. 더 이상 벗는 것도 힘에 부쳐 그냥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일주일 정도면 모두 도착할려나. 기대 속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차갑게 언 발이 아려올 때 쯤 겨우 눈을 떴다. 자고싶다는 욕망이 두 눈을 짓눌렀지만 이젠 이불 속의 몸까지 떨려와 몸을 일으켰다. 잠결에 덮은 건지 엉성하세 몸에 걸쳐져있던 이불이 맥없이 떨어졌다. 찬바람의 출처를 찾아 둘러보니 창문이 약간 열려있다. 더워서 창을 열려 눈을 뜬지 엊그제같은데 이젠 창을 닫으려 눈을 뜬다. 시간 참 빠르다. 엉크러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돈하며 창가에 다가갔다. 벌써 날이 밝아오는지 짙푸른 하늘이 시리게 아름답다. 그 아래에는 아름다운 하늘은 구경도 못한 채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만을 맞고있는 무채색의 사람들이 전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작게 한숨쉬며 문을 닫았다.
이 놈의 양식집은 그 흔한 온돌조차없어 싸늘하기만하다. 혼자라는 생각에 잠시 멈칫하다 아래층에서 자고있을 박경이 생각났다. 갑자기 들뜬 기분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봤음에도 아무도 없다. 꿈이라도 꾼건가, 허탈해지는 느낌에 한쪽 구석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제야 탁상 위에 올려진 쪽지가 보인다.
김유권이 여기 어딘지 모르겠다고 새벽에 오라고 했었어. 걱정말고있어.
맥이 탁 풀린다. 몇 개월을 혼자 있었는데 잠깐 사람이 없던 것에 이렇게 허탈해하다니. 내 자신이 너무 나약해진 것 같아 입술을 물었다. 이래서 언제 일본 놈들 몰아낼래. 이지긋지긋한 떠돌이 생활 끝내야지. 주먹을 꽉 쥐었다피며 마음을 다잡았다. 됐어,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방으로 들어와 멍하니 서있다 의자에 앉아 타자기를 꺼냈다. 막상 꺼내도 쓸 이야기가 생각이 안나 그간 써뒀던 종이들을 긁어모아서 다시 읽었다. 일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썼던 글이니만큼 시대적 배경이 철저히 배재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차마 친일적인 글은 쓰지 못하겠어서 선택한 내용이였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남자와 그걸 밀어내던 여자. 밀어내려는 마음이 강했던만큼 여자는 강하고 빠르게 남자에게 빠져든다. 결국은 둘이 사랑을 하게 될텐데. 왜 나는 그들의 끝맺음을 글로 표현하기 힘든지. 청혼을 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끝난 마지막 장을 내려다보다 봉투에 담았다. 더 이상은 못 쓰겠다. 타자기를 치우고 봉투를 책상위에 올렸다. 왠지 몸이 나른한게 신문사까지 가려니 막막하다. 왜 이러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조선 땅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과거에는 그래, 잠시나마 조선인들을 인정했었고 조선인들을 핍박하는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다르다. 어찌됐든 나에겐 소중한 분들이였던 부모님은 조선인들의 의거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테러에 목숨을 잃으셨다. 물론 그 때 그 건물에 있던 사람들 모두. 복수심에 휩싸였다. 그들의 상황이 어떻든 내가 알 바가 아니였다. 그대로 부모님들의 권력을 이용해 이 곳까지 왔다.
"그럼...이 조선인을 쓰는 게 어떻겠소?"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사이에 얘기가 어디로 흘러간건지 다 날 바라본다. 흘끗 쳐다보니 한 신문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설명을 하라는 눈으로 옆에있던 자를 봤다.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진뜩 위축되 더듬더듬 말을 하는 꼴이 웃기다.
"아, 그러니까...이 소설이 조선인들에게 인기가 있으니 이 작자를 꼬셔내어 천왕을 찬양하는 글을 쓰게 함이 어떠냐는 얘기요. 안경부...아니, 쇼경부보는 어떠한지..."
안경부보라는 말에 움찔했다. 지금은 굽신대도 뒤에선 반쪽 일본인이라고 안경부보,안경부보 하던 버릇때문에 튀어나온 거겠지만 화가 나기보다는 우지호 생각이났다. 복수하자고 온 와중에도 생각나는 얼굴이 조선인이라니...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보고싶다. 항상 재효형, 재효형 하면서 날 따르던 우지호가.
"괜찮습니다. 그냥 안경부라고하세요 쇼보다는 안재효가 편하신것 같은데. 그리고 그 조선인 작가는 제가 만나겠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대한 객기인지, 아니면 내 기억 한 편을 떠나질 못하는 우지호 생각에 생겨난 객기인지는 몰라도 그 조선인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실행에 옮기기라도 하려는건지 재효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뜰 때까지 그 공간의 모든 이들은 말이 없었다. 하-. 망할, 반쪽 일본인 주제에...한참 정적이 흐르다 말실수를 한 일본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다들 동조하지만서도 그 뒤로도 한참을 가슴만 쓸어내린다. 계급으로만 봐서는 다들 재효의 상관들이지만 실제적으론 재효의 돌아가신 부모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에 알아서 꼬리를 내린다.
이 상황이 뻔히 예상되어 재효는 차에 몸을 실으면서 아직 건물에 있을 자들을 비웃었다. 저런 자들만 이 곳에 있으니 아직까지도 멍청한 조선인들 하나 제대로 집압하지 못하는게지. 신문사에 미리 연락해뒀어야하는데. 아니면 우연인 척 만나야했었나. 가까운 곳이였는지 금세 신문사다.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얘기로는 신문사 자체는 친일성을 띄고있다던데. 신문사로 향하려는데 눈을 끄는 이가 먼저 지나가 들어간다. 뭔가 익숙한 느낌에 서둘러 따라갔다. 최대한 들키지않으려 태연한 척, 벽에 기대어 지켜보니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는 가까이 있는 여자를 붙잡고 서류를 주고는 뭐가 그리 바쁜지 나타났을 때처럼 휙 하고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다시 쫒았다. 혹시 집이라도 알아낼까 골목길을 몇번이나 지나가는 남자의 뒤를 밟았다. 하지만 남자는 골목길이 한번 더 꺽여진 길에서 사라졌다. 알고있었나, 허탈함에 주위를 둘러봤다.
"누구야"
익숙한 음성이다. 금방이라도 재효형, 이라고 불러줄 것같아 몇번이고 환청을 들었었다. 상상해본 목소리와 놀랍게 똑같다. 일이 쉬워질 것같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호야."
내 옷차림은 양복이다. 조금씩만 마음을 돌리면 금방 성공할거야. 의심은 하지않겠지. 우지호고 안재횬데. 자신의 이름이 불려서 그런지 당황한 게 느껴졌다. 궁금한 건 많겠지만 섣불리 말하면 들키니까 말을 아끼는 거겠지. 긴장하지마. 넌 그냥 나에게 다시 재효형이라 부르고 날 위해 글 하나만 써주면 돼. 몸을 천천히 돌려 뒤에있던 지호와 얼굴을 대면했다. 당황할 때 입술을 깨무는 건 고치지 못했는지 입술을 깨물고는 잔뜩 긴장한 눈빛이 상상하던 모습과 꼭 닮았다. 날 알아봤는지 점점 커지는 눈마저도 똑같다.
"재효...형?"
느릿하게 내밷어지는 이름. 나도 모르게 갈망하던 내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벅차오르는 희열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지호를 안았다. 반가워 우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