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죄인 루한을,"
준면이 문서를 읽다가 중간에 쉬고 옆을 바라보았다. 민석이 신하의 부축을 받아 겨우 서서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안돼요, 아버지, 아닌걸 아시잖아요, 안돼요. 민석이 눈으로 외치고있었다. 준면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사형에 처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석은 소리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옆에서 그를 부축하고있던 신하가 황급히 그를 들어올려 의원을 부르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피에 물들어 붉게 변한 소복을 입고 묶여있던 루한은 그의 모습을 보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준면은 거칠게 문서를 한손으로 구겨잡고 자리를 뜨자 옆에 서있던 군관들이 루한을 일으켜세워 끌고나갔다. 피딱지가 눌러붙은 그의 코에 눈송이가 내려녹았다. 겨울이구나. 루한이 실없이 웃었다.
"루한! 루한!"
민석의 외침에 그의 주위에 숨어있던 루한이 재빠르게 그의 옆에 섰다. 무슨일이신지요, 하고 묻는 루한에게 민석은 활짝 웃어보였다.
"손!"
네? 루한이 그에게 묻자 민석은 칼을 집고있던 루한의 손을 잡았다. 손 펴! 루한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민석의 말이니 온 힘을 다해 쭉 폈다. 그게 무엇이 웃긴지 민석이 힘주어 피고있는 루한의 손을 보고 히히하며 웃다가 루한의 손가락에 토끼풀로 만든 반지를 쏙 하고 끼워주었다.
"내가 만든 것이니라!"
그 조그만 손을 한참을 꼼지락거리더니 만든 것이 이것이구나. 루한이 생각했다. 민석이 루한의 소매를 밑으로 살짝 잡아댕기자 루한은 허리를 약간 숙여 민석에게 귀를 가져다대었다. 예쁘지? 민석이 조심스레 귓속말을 하고 떨어져 루한을 보고 기대가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루한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눈에 잘 띄지않게 끄덕였다. 루한의 대답을 듣고 민석은 볼이 빨개져서는 뒤를 돌아 저쪽으로 달려갔다. 루한은 잠시 그가 준 토끼풀반지를 만지작대다가 민석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저, 저기."
루한이 민석의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앳되어 보이는 궁녀 한명이 서있었다. 루한이 무슨일인가 싶어 다가가자 그녀는 바들거리는 손과는 다르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내일 이시간에 기다리고있겠습니다, 하고는 품에서 편지하나를 꺼내 루한에게 쥐어주고는 자리에서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민석이 잠들고 루한이 넣어두었던 편지를 주섬주섬 꺼내어 펼쳤다. 편지에는 그녀의 구구절절한 사랑이야기가 가득하였다. 루한을 어디서 보았는지, 자신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는 그런이야기. 루한은 편지를 읽다가말고 방에서 빠져나가 횃불에 편지를 태워버렸다. 그녀를 위해서였다. 궁녀는 궁녀가 되는 순간 왕의 여자가 되기때문에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은 것이 발각되는 순간 그녀는 물론 사내까지 사형이었다. 물론 많은 궁녀들이 실제로 왕의 여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편지가 다 탄것을 확인, 또 확인하고나서야 다시 방으로 들어와 루한은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루한의 답변은 간단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루한이 편지를 다 쓰고 품에 넣자 민석이 부스스 일어났다. 루한은 흠칫 놀라 잠을 깨워 죄송하다는 말을 올렸다.
"꽃밭에 가고싶어."
민석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도 민석은 꽃을 좋아했다. 한두송이가 예쁘게 피어있는 것도 좋아했지만 여러꽃들이 만개한 꽃밭을 유난히도 좋아했다.
"겨울이라 꽃이 지었습니다."
루한이 민석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민석은 루한이 손을 잡아주자 기분이 좋은지 빙그레 웃었다. 루한의 말에 민석이 응 하고 대답하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잠에 든 모양이었다. 루한은 잠에 든 민석의 손을 한참동안이나 잡고있다가 밤이 깊었다는 북소리를 듣고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한."
민석의 목소리에 루한이 대답을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루한, 네가 꽃해."
"꽃이 그리도 좋으신지요."
"응, 좋아. 맨날 봤으면 좋겠어."
민석이 히히하고 웃었다. 루한도 그를 따라 웃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민석이 루한의 손을 다시 잡자 루한은 그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루한이 세자저하를 죽이려했습니다. 증거로는 친구에게 보낸 세자를 죽이겠다는 내용이 담긴 그의 친필편지였다. 민석은 믿지않았다. 어떤 바보가 살인의 내용을 저렇게 대놓고 쓰겠는가. 하지만 필체는 영락없는 그의 글씨체였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리가 없다. 루한이, 그럴리가 없었다.
"못가! 루한 풀어주기전에는 절대 못가!"
루한을 데려가는 군사들앞에 민석이 서서 소리를 질러댔다. 저하, 다치십니다, 길을 비켜주십시요. 그럴리가 없잖아! 니네들도 알잖아! 루한이 그럴리가 없잖아! 민석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장군은 눈을 꾹 감았다.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장군의 말이 끝나자 뒤에 서있던 군사들이 민석에게 다가가 민석을 뒤로 이끌어냈다.
"이거놔! 니네 누구한테 손대는거야! 놓으라고! 루한! 루한!!"
민석의 비명소리가 아득해졌다. 루한은 두눈을 꾹 감았다. 그 편지가 어디서 나온것인지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편지를 쓰는게 아니었다. 그 궁녀에게 편지가 아니라 말로 직접 이야기했다면 이런일이 벌어지지않았을것이다. 처음부터 그 궁녀는 루한에게 마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루한은 힘없이 웃었다. 마지막. 그 단어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꽃밭,"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나왔다. 입을 열자 루한의 입술이 퍼석하고 튿어져 피가 몽골하게 고였다.
"꽃밭에 꼭 가시라고, 전해주십시요."
루한이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기침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저하. 루한이 그를 불렀다. 말하지마, 얘기하지마. 민석의 눈에서 눈물이 비내리듯하였다. 만수무강하십시요. 그만해. 제발 그만해. 꽃밭에 꼭,
민석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비명을 질러댔다. 무슨일인지도 모른채 시녀와 내시들은 분주할뿐이었다. 의원을 데려와!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게 아니야. 의원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민석은 속으로 그렇게 얘기했다.
루한이 죽는 모습을 민석은 보지 못했다. 그가 기절하고나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루한은 죽어있었다. 그는 루한의 사망소식을 듣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루한이 옆에 없다는 것이 현실도 다가오지않았다. 그럴리가 없어. 루한은 항상 내 옆에 있는데. 루한. 루한. 나와 어서. 니가 숨어있으니까 다들 니가 죽었다고 생각하잖아. 루한, 숨어있지말고 나와 어서. 민석은 그렇게 루한을 한참동안이나 불러댔다. 내가 나오라잖아. 왜 그래? 내 말이 말같지 않아? 나오라고! 너 내 명령 무시하는거야? 루한. 루한.왜 나오질 않아. 왜 숨어있어. 내가 뭘 잘못한거야? 내가 널 아프게 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루한. 제발 나와. 민석은 결국 오열을 하며 루한을 불러댔다. 그러나 루한은 끝내 그의 옆에 와서 손을 잡아주지 못하였다. 그의 옆에 오는것조차도 못하였다.
그날 이후로 민석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그저 자리에 누워있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는 준면의 뒤에는 두세명의 시중만 뒤따를 뿐이었다. 준면은 민석의 방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방안에도 역시 두명의 시중만 있을 뿐이었다. 아. 준면은 세상이 도는 듯 싶었다. 그의 눈 앞에는 허공에 떠있는 민석의 작은 두 발이 있었다. 전하. 방안에 있던 시중들이 그를 부축하였다.
"이 사실을 누가 아느냐."
"이 방에 있는 자들이 전부이옵니다, 전하."
방안의 시녀 한명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나가거라. 준면의 명령에 방안에 있던 자들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처리하였느냐. 그의 호위무사인 세훈이 짧게 네, 하고 대답하였다. 내려라. 준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목을 매 자살한 민석을 내려 침상에 뉘였다. 자고 있는 게 아니냐. 그의 물음에 세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못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준면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놓여있는 종이를 쥐었다. 민석의 마지막 편지였다.
'꽃을 잃은 나비는 갈 곳이 없네'
식음을 전폐하여 아사한 세자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그 누구도 사라진 네명의 시중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준면은 눈을 감았다.
'루한, 네가 꽃해.'
'꽃이 그리도 좋으신지요.'
'응, 좋아. 맨날 봤으면 좋겠어.'
'그래도 니가 더 좋아, 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