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어언 6년. 이 동네가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찾아올 수 있을 정도이지만 우리 동네는 혼자 돌아다닐 수가 없다.
‘ 이번에도 브랜동 리니아파트 부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즘 이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 무서움에 떨고 있을 거 같은데요. 벌써 3번째 사건이 일어나는 거죠? ’
무서워서 틀어놓은 TV속에서는 더 두려움에 떨게 할 소식이 들려왔다. 아... 또 살인 사건이라니. 저번 주에 강간에 살인 미수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날 난 새벽 1시에 회식으로 술에 쩔어 들어오는 길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반긴 건 차가운 공기와 섬뜩한 빗소리였다. 그때 잘못 걸렸다면 내가 그 희생양이 되었을까. 혼자 사는 터라 이런 사건들이 일어날 때 마다 집을 이사해야하나. 호신술이라도 배워둬야 하나. 라는 생각에 둘러싸여 지레 겁을 먹고 회사도 못 갈 뻔 하고는 한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함께한 나는 대학교를 서울로 온 뒤 가족들과 떨어져 항상 혼자 지냈다. 친구들이랑 같이 자취를 하고 싶었지만 진짜 친하지 않으면 친구사이가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취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인 나에게 또 두려운 점이 있다면 우리 아파트에는 남자가 한명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을 아파트 청소부 아줌마에게 처음 들었을 때는 와 그러면 되게 편하겠다 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지만 지금은 그 점이 가장 무섭다. 우리아파트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날 구해줄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 무슨 일이 제일 잘 일어날 수 있는 곳이구나 싶었다.
“ 하... 맥주 먹고 싶은데 ”
안 그래도 쓸쓸한 집의 냉장고는 더 쓸쓸했다. 회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다 해결하는 터라 항상 먹을 게 맥주나 안주 조금 씩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맥주도 없네?
방금 들려온 뉴스가 신경 쓰였지만 어제 일어난 살인사건이 오늘 또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에 집 앞 편의점에 갔다 오기로 했다. 뭐 누가 날 어떻게 잡아 가겠어 라는 말을 뱉고 안심하려는데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잡혀갈 몸뚱아리... 키만 멀대같지 얇고 어릴 때부터 운동이라곤 손도 안대본 티가 나는 모습 딱 봐도 약한 여자였다. 나라도 나 잡아가겠네. 하지만 맥주가 너무 먹고 싶은걸.
가디건을 걸치려다 더워 나시 입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와 어떻게 이 밤에 이렇게나 덥냐. 살인 충동이 들기에도 적합한 날씨다. 아직 7월인데 이렇게 더우면 8월엔 어떻게 살라고... 궁시렁 궁시렁 화를 내며 엘리베이터를 기다 린지 3분이 지났는데도 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는 올라올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누구야 이 밤에... 볼일이 끝났는지 2층 3층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는 내가 서있는 7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면 왜 이렇게 엘리베이터를 오래 잡고 있냐. 따질려고 했던 나는 열리자마자 굳어버렸다.
남자다...
분명 남자다. 우리아파트에는 남자가 안 사는데... 검은 마스크를 쓰고 엘리베이터에 서있는 그 남자를 보곤 순간 ‘살인사건’ 한 단어가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 저기요? ”
눈을 꽉 감고 있었던 나에게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 저기 잠시만 비켜주실래요? ”
“ 아... 아 네 ”
무서웠던 나머지 길막이라는 것을 제대로 행동하고 있던 나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곤 비켜줬다. 그러자 감사합니다. 하고 나를 스쳐지나가는 그 남자를 두 눈으로 쫓아갔다. 응? 내 옆집? 그 남자가 지나가는 순간에도 뭐 여자친구나 엄마나 만나러 온 거 일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며칠 전 빈집이 되어버린 그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는 한순간에 머리가 새하얘지기 충분했다.
왜지? 왜 옆집인거지? 나를 목표로 삼은 건가? 별의 별 생각을 다하고 있던 사이 나는 편의점에 도착했고, 사기로 했던 맥주 앞에 서있었다. 맥주를 꺼내려 차가운 맥주에 손을 대곤 깨달았다. 아 그냥 이사 온 거일수도 있잖아? 라는 생각에 미치자 한결 마음이 편해진 채로 계산을 하고 나왔다.
서늘한 바람에 기분 좋게 다시 집으로 들어오고는 맥주를 따 쇼파에 누워 TV를 켰다.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예능 프로 ‘딴따유기 뽀’가 하고 있어 한창 웃으며 보고 있는데 쿵. 뭔가 벽을 치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윗집에서 뭐 떨어뜨렸겠지 생각하고 다시 TV에 집중하는데 이번에는 쿵쿵둥 지이익 하며 무언가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옆집...? TV를 끄고 벽에 귀를 기울여 소리에 집중하는데 역시나 옆집이었다. 저게 시체 끄는 소리는 아니겠지. 소름끼치는 생각이 계속 들자 옆집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내방에 들어가 이불을 덥고 잠을 청했다. 잠이 부족해서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점점 귀가 기울여지는 옆집과 붙어있는 벽이 신경 쓰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척이다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난 나는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문을 연 그때 내 앞에는 그 남자가 서있었다.
“ 아... 저기 ”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서움에 문을 닫아버린 나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하지 못하고 문 앞에 서있었다.
띵동-
그 남자다.
“ 저기 저 옆집으로 이사 왔는데요. 말씀드릴게 있어서요. ”
아 거봐, 이사 온 거 맞잖아. 안심이 되어 문을 열었다.
“ 저기 어젯밤에 혹시 많이 시끄러우셨으면 사과드리려구요... 이사가 처음이라 이것저것 만져본다고 가구위치를 옮기다보니 새벽이어서... 아차 싶어서 그만두긴 했지만 그래도 시끄러우셨을 거 같아서요... ”
고개를 숙인 채 오물조물 말을 꺼내는 그 남자의 모습에 무서움, 두려움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뭐야 왜 이렇게 귀엽지.
“ 아~ 그러셨구나. 저는 별로 신경 안쓰였어요! ”
“ 앗! 정말 다행이에요. 하핫. 걱정 되서 잠 한숨도 못 잤거든요... ”
왜 이렇게 귀엽지 이 남자 뭐야 갑자기 나타나선
“ 아 저 근데 이사오셨다구요? ”
와 이 아파트에 드디어 남자가 사는구나. 혼자 중얼거리는 나에게 그 남자는 네? 그럼 남자가 아무도 안 살아요? 라고 물어왔다.
“ 네. 제가 여기서 산지 6년이 되어 가는데 한 번도 남자가 사는 걸 본적이 없어요. 이제 살인사건 안날 수도 있겠네요. ”
내말에 놀라 토끼눈을 한 남자는 나를 쳐다보고 네?? 소리를 질렀다. 어느 대목에서 놀란 건지. 남자가 살지 않아서? 살인사건 때문에?
“ 살인사건이요?? ”
“ 아. 모르셨어요? 며칠 전에도 요 앞에서 살인사건이 나서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는데...
“ 와 나 다시 이사 가야 되나? 와 와 ”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 남자의 모습은 꽤 아니 너무나도 귀여웠다. 아참. 이럴 시간이 없는데.
“ 저 그럼 저 이제 출근해야 돼서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
내말에도 개의치 않고 흥분한 그의 모습은 내 눈 언저리에 깊이 남겨져 하루 종일 생각날 때마다 푸흐흡 웃었다. 아 왜 계속 생각나지. 집에 갈 때 또 마주쳤으면 하며 얼른 집에 가길 바라는 나였다.
저녁8시. 빼도 박도 못하게 야근할 줄 알았던 나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죽어라 일만 했고, 별로 늦지 않은 지금 이 시각 회사를 나와 밤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또 그 남자 만날 수 있을까? 하핫. 웃던 그 남자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피식 웃고 있던 그 순간. 어! 옆집 여자! 그 남자의 목소리다.
“ 여기서 또 보네요. 집 가는 길이세요? 저도 지금 맥주사서 집 가는 길인데. 같이 가요! ”
“ 아 정말요? 안 그래도 집 가는 길 무서웠는데 잘 됬네요! ”
“ 그럼 저도 무서워서 그러는데 항상 집 같이 가실래요? 아까 살인사건 때문에 충격 받아서 아직 무섭단 말이에요... 하핫. ”
말해놓곤 부끄러운지 쑥스러운 표정과 고개를 숙이며 눈웃음 짓는 그는 참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