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에 몇 번이고 기도했다. 오늘이 꿈이 아니기를 말이다.
왜 드라마를 열심히 보다가 결말 때문에 일주일 동안 마음을 졸였는데..! 결말이, 모든 것은 꿈이었다, 왜 그런 황당한 끝을 가진 드라마들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라고 확신하면서도 내가 너무 바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오히려 믿기 힘들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이루어져서, 너무 좋아서 오히려 무서웠다.
그래서 자꾸만 내일 아침에도 오늘밤과 같은 너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몇 시간 안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너무 크게 와 닿아서 아무리 양을 세어보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유투브에서 잠 오는 영상을 얼마나 찾아보았는지 모른다. 조용한 노래도 들어보고. 아무리 난리를 쳐도 오지 않는 잠에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시곗바늘은 숫자 1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 벌써 한 시네. 내일 학교 가야되는데 망했다.
황민현은 잘까? 집에 돌아온 뒤로 그러고 보니 연락을 안 한 게 생각나서 충전기에 꼽아놓은 핸드폰을 집었다. 카톡창을 열어서 뭐라고 보낼까 고민했다. 와, 내가 얘한테 카톡하면서 이렇게 고민을 하다니. 부끄러운데 이렇게 된 우리가 웃기기도 했다.
자? - 이건 너무 구질구질한 구남친 같고
민현아 – 이건 뭔가 낯간지럽고
뭐하냐 – 이건 또 너무 퉁명스러운 것 같고
ㅎㅇ – 이건 뭐 초딩도 아니고
고민 끝에 그냥 평소처럼 ‘야’라고 보내기로 했다.
-야
옆에 숫자 1이 거짓말 안하고 0.0005초만에 사라졌다. 뭐야, 왜 이리 빨라. 너도 안자고 있었네. 히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뭐야 근데 얘 왜 이렇게 답장을 빨리 안 해?
남사친과 이상형의 경계_11
1분 정도가 지났을까 갑자기 전화가 왔다. -황민현-에게서.
“여보..?
“네~ 여보 맞아요! 여보 여기 있어요!”
“뭐?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너 왜 그러냐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지금 빵 터졌다고.”
“왜 뭐가. 네 여보가 여보 맞다는데 뭐가!”
“아니 그런 거 하지 마ㅋㅋㅋㅋㅋㅋㅋㅋ 오글거린다고ㅋㅋㅋㅋㅋㅋ”
여보라니. 진짜 황민현 말하는 것 좀 봐. 여보래... 전화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전화 상으로는 웃기만 했지만, 나 지금 좀 부끄럽단 말이야. 나 얼굴 빨개진 거 같아. 덥기도 하고.
자꾸 여보!라는 말을 반복하며 장난을 치길래 그렇게 몇 분을 투닥거렸다. 부끄러워서 그래, 내가.
“근데 너 왜 안자고 있어. 카톡을 뭐 그렇게 빨리 확인해. 나 진짜 놀랐잖아.”
“그럼 넌 왜 안자고 있어.”
“몰라, 그냥 이상해서.”
“뭐가 이상한데?”
“음... 좀 실감이 안 나서.”
“나도. 좋은데, 좋아서 이게 다 꿈일까 봐 못 자겠다. 그치?”
“그니까. 나도 그래.”
너도 역시나 나랑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돌고 돌아서 마주한 우리 관계가 아직은 어벙벙해서, 자기가 두려웠나 보다.
어쩌면 잠이 안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영채야 빨리 자야지. 곧 두시 된다. 너 작은 키 더 작아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오 씨! 네가 왜 안 놀리나 했다.”
“핫하하하핫. 흠흠. 영채야.”
“뭐야 갑자기 왜 목소리를 깔고 그래. 뭔데 불안하게.”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 그러지 말자. 이거 꿈 아니잖아. 너도 알잖아. 행복한 날인데 빨리 자야지, 그래야 내일 보지.”
“응응. 그래. 나 진짜 잘게, 너도 잘 자.”
“그리고 말이야. 꿈이라면, 만약에 진짜로 우리한테 소설처럼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이게 꿈이라고 해도 말이야, 걱정하지 마. 그럼 그때는 내가 용기 낼게. 꿈이더라도 같은 마음인 거 알았으니까 다 된 거야. 그치?”
“야아-. 방금 좀 감동인데? 나 그냥 꿈인 것처럼 내일 행동해버릴까 보다.”
“하핫하하핫. 그럼 나 용기 좀 내게 하나만 도와줘라. 나한테 잘 자라고 이름 좀 불러줘.”
“야... 그게 무슨 소원...”
“너 아까도 막 카톡에서, 어? 야! 이랬잖아...”
눈치도 빨라 진짜 황민현. 내가 괜히 어색해서 부러 퉁명스럽게 ‘야’라고 보낸 걸 눈치 챘나 보다.
내가 먼저 다가간 것처럼 앞으로도 조금씩 내딛으면 된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네가 바뀐 우리 관계에 적응해오는 것처럼 나도 새로이 적응해가겠노라고. 나도 노력하겠다고.
“민현아, 잘자. 흠흠 황민현 잘자라! 끊는다!”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데 능력 있는 황민현 말대로 띄엄띄엄 겨우 잘자라는 말을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과거의 우리었다면 아마: 야, 나 자야 돼. 혹은 나 잔다. 뭐 이런 거였겠지만, 현재의 우리는 잘자,라고 속삭이고 있다. 기분 좋은 변화다.
11. 네가 내 지구에 들어온 이후에
그렇게 황민현과의 통화를 마친 뒤에는 거짓말처럼 잠에 들 수 있었다.
얼마나 잠이 잘 왔는지, 매일 잘만 듣던 알람 소리마저 듣지 못하는 바람에 엄마가 나를 깨워주었다. 이게 뭐야, 오늘은 내가 황민현보다 늦게 생겼네.
겨우 준비를 급히 마치고 집 앞에 나와 보니 황민현이 제 집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웬일이래, 얘가 이렇게 준비를 빨리 마치고 나와서 나를 기다리다니.
“야 뭐야, 웬일로 네가 나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냐? 해가 서쪽에서 뜨나 보다.”
“이영채.”
“왜 이래, 갑자기 그 진지함은 뭐냐. 어? 야, 너 땀 나! 황민현 왜, 뭐야, 너 긴장했어?”
오늘 별로 덥지도 않은데 쟤 왜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지. 쟤 땀 흘리면 안 좋은데. 염분 알러지라나 뭐라나, 무튼 생전 처음 들어본 알러지가 있어서 자기 땀에도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피부가 반응하기도 했다.
게다가 저 진지한 표정은 또 뭐고? 마치 중요한 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긴장한 사람 같았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걱정이 되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에 아직도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는 황민현에게 다가갔다.
너 땀 나, 내 가방에 손수건이 있을 리는 없고, 급한 대로 휴지라도 꺼내서 이마에 땀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며 제 땀을 닦아주는 나를 멍청하게 보고만 서 있더니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영채야. 흠흠. 나랑 사귀자.”
에에-? 갑작스러운 고백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벙찐 채로 녀석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뭐지 이 당황스러운 전개는? 분명 우리 다 된 거 아니었나? 아 설마, 어젯밤에 꿈 뭐시기 어쩌구 때문에 얘 지금 이러는 건가.
“어젯밤 통화 때문만은 아니고. 꿈 아니잖아 어제는. 어, 그니까...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어제 막 손도 잡고 그랬는데 막상 아무도 딱! 사귀자! 이런 걸 안 했더라고. 나는 너랑 이제는 완벽하게 확실해지고 싶어서 그래. 내가 너 남자친구 할게 이제.”
쿵. 정말로 심장이 이렇게 떨어진 것 같았다.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 잠도 아직 안 깼는데 그러면 어떡해. 긴장하면서, 그렇게 예쁜 얼굴로, 나만 바라보면서 말하면 나 어떡하라고 민현아. 나는 마치 갑작스럽게 프로포즈라도 받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괜스레 눈가에 물이 괴는 것도 같았다.
아, 나 진짜 너 이렇게 좋아해도 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마음이 생각보다 크네, 널 이렇게 좋아했구나, 하다가 진짜로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이 올까 봐 두려워진다.
“그래, 내 남자친구 해줘.”
너도 참 나 같다. 어젯밤에 손잡고 헤어졌던 우리인데, 넌 또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내가 대답을 하자 그제야 웃음을 띤다. 대답 전까지 꼼지락 거리는 두 손이 불안해보여서, 마치 어젯밤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가 떠올랐다.
어젯밤의 나와 오늘 아침의 너. 너나, 나나 똑같아 우리는.
황민현의 손을 내가 먼저 잡았다. 씽긋 올라가는 너의 입꼬리와 빨개지는 너의 귓불이 뒤따라오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뭐???????????”
데자부인가.
분명 어제 정수정이 이렇게 나한테 소리 질렀던 거 같은데. 수정이한테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자마자 황민현이랑 사귀게 되었다고 전했다. 돌아오는 반응은 역시나 그 누구보다도 나의 고막을 아프게 하기..
“와 진짜 대박. 나 돗자리 깔아야 돼. 진짜 나 촉 너무 좋아. 어떡해 영채야? 난 가끔 이런 내가 무서워...”
“그래 진짜 너 말이 다 맞다... 그리고 진정해...”
“내가 그~으~렇게 황민현이 너 좋아한다고 말할 때 아니라던 건 언제고, 와 대박. 황민현 모솔 탈출이냐? 진짜 축하해.”
“근데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종현 오빠한테도 말해야 되지 않겠어?”
“그..렇겠지?”
생각은 했다. 오빠한테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래야 오빠도 더 편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뭐든지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영채야!”
급식을 먹고 교실로 돌아오는데, 오랜만에 김종현이었다. 뭐든 결심한 일은 바로 실행하는 법이지. 아무래도 학교 끝나고 시간 있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시험은 잘 봤어요?”
“야, 고삼한테는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다? 그래서 너는 잘 봐써?”
“음.. 평소대로? 오빠한테 물어서 해결된 문제들도 꽤 많이 나왔어요. 진짜 고마워요.”
“오 진쨔? 다행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에는 제가 오빠한테 빙수 살게요! 할 말도 있구요..”
“데이트 신청이야?”
“아... 그런 건 아니구요.. 진짜 아니고.. 음..”
“알아, 알아. 다 알지, 장난친 거야 하핳. 그럼 오늘?”
“오빠 오늘 되시면 저는 좋아요!”
“그래, 그럼. 이따 보자.
김종현은 진짜로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뭔가. 내가 무슨 말을 할지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더욱 미안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고백-김종현이 내게 했던, 그리고 내가 황민현에게 했던-이 어떤 의미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미안해졌다. 내가 황민현 곁에 누가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그랬던 것처럼, 혹여나 김종현도 내가 바라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랬던 건 아닐까? 갑자기 든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
-민현아 오늘 집에 너 먼저 가야겠다
-????????????????
-오늘 갑자기 약속이 생겼어 미안.
-므잉?????뭔데 누군데 뭐야
-종현 오빠랑 잠깐 만나기로 했어 근데 진짜 별 일 아니고 진짜로 잠깐일거야
-알았어 그럼. 약속 끝나고 연락해. 알았지?
-웅웅
-근데..
-왱
-너 바람피는 거 아니지?그럼 민혀니 맘이 아플 거 같아,,
-민혀니 뭔뎈ㅋㅋㅋㅋㅋㅇㅇ맞음..잠깐 바람 피고 온다
-야 넌 말을 무슨 담배 피러 가는 사람처럼 하냐
-담배드립 안 받아준다
-그럼 바람피지마
아 귀여워, 황민현.
오보이입니다 |
서로에게 고백하는 둘을 보고 싶어서 한 번 더! 해투 출근길 교복 황민현 미친거 아닌가요..? 진지한 민현이의 그 표정을 생각하면서 읽어주세요.. 황민현 영국 사립학교적 모멘트......민현이 교복...박제... 오늘 주저리는 정말 쓸데 없네요^,,^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항상 댓글 다 읽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