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년시대
아. 또 바보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벙 쪄 있는 여주를 보던 영민은 살풋 웃고서 대충 정리하였던 머리칼을 바로 정리했다. 내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야? 영민이 제 정곡을 찌르고 말았다. 장난으로 툭 내뱉는 말인 듯 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다고. 여주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좀 재미가 없긴 하다. 할 만한 것도 없고."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영민은 지금 굉장히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혹여나 여주가 이곳이 재미가 없다고 가버릴까 봐. 그렇게 되면, 무슨 구실을 갖다 대며 붙잡아야하나. 괜히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었다. 영민은 힐끗 여주의 눈치를 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여주의 두 뺨은 예쁘게 물들어 있었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은, 참 맑다.
"그냥, 이렇게 앉아 있을까?"
영민이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머뭇거리던 여주도 곧 영민의 옆에 따라 앉았다. 영민이 더울까 싶어, 가까이 붙어 앉지는 못했다.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었다. 결국은 부끄러움 탓인 걸. 손가락만 꼼지락댈 수밖에 없었다. 아, 어색하다. 몸이 배배 꼬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안 더워."
"아,"
"옆으로 더 와도 된다는 소리."
웃음을 터트린 영민이 그렇게 말했다. 제 마음을 읽은 걸까. 그럼에도 여주는 꼼짝없이 앉아있었다. 그게, 나도 가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원래 그렇게 수줍음이 많았냐? 세연의 목소리가 문득 스쳤다. 그러니까. 나 원래 이랬던가. 여주는 지금이라도 당장 쥐구멍으로 달려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먹이듯 인상이 찌푸려진 여주를 가만히 보던 영민이 몸을 움직였다.
"내가 가면 되지, 뭐."
"..."
"어떻게든 가까워지기만 하면 상관없잖아."
누가 먼저 가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영민은 벤치에 손을 짚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화 영화에 나오는 하늘과 별 다를게 없다, 오늘 하늘은. 영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너무 오글거렸나. 사실 이런 멘트와 거리가 먼 영민은, 제 자신에 가끔씩 소름이 돋곤 했다. 여주 앞에서기만 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오글 대사에 저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아마 세운이 엿듣기라도 하면, 놀라 기절할 지도 모르겠다. 임영민이 저런 말을? 말도 안 돼. 듣고서도 믿지 못할 지도 모르지.
"오, 오늘 날씨 진짜 좋다!"
이런 시답잖은 멘트 날릴 거면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나을 지도 몰라. 여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을 뱉고서 속으로 한숨을 푸욱 쉬었다. 어떻게 발전이란 게 없어. 쟤를 좋아한 지가 몇 개월이 다 되가는데. 여주의 날씨 멘트에 고개를 돌린 영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귀여..."
습관처럼 나오려던 말을 잽싸게 집어넣었다. 다행이도 여주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영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큰일 날 뻔했네. 늘 능청스러운 척 하지만, 영민도 그다지 그런 편이 되지는 못했다. 맞아, 오늘 날씨 진짜 좋다. 말을 그대로 맞받아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둘 사이에는 햇살을 가득 품은 공기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마저도 둘을 응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구경이라도 좀 하러 다닐까?"
"응, 좋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 선 영민이 자연스레 여주에게 손을 뻗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에 영민도 스스로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을 거뒀다.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손을 붙잡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여주는 당황으로 가득 물든 영민의 뒤통수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나 나나, 비슷한 것 같아. 내 걸음이 조금 더 더디지만.
솜사탕이다. 빙글빙글 잘만 돌아가는 나무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놀이동산에서 보았던 솜사탕 기계. 감회가 새로웠다. 영민도 여주의 옆에 서서 솜사탕이 만들어 지는 과정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둘은 많이 닮아있다. 저들은 모르는 듯하지만. 솜사탕을 만들고 있던 학생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주문할거야?"
당황한 학생은 잠깐의 뜸을 들인 뒤 입을 뗐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동심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걸까. 달콤한 솜사탕을 한 입 베어보고 싶은 충동이 마구마구 들었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민이 미소 지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한 영민은, 다시 여주를 돌아보았다. 솜사탕이 만들어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예쁘다. 영민은 옅은 분홍색을 띠는 솜사탕과 여주가 다를 것이 없다 생각했다. 예쁜 건, 똑같이 다 예쁜 거다.
"우와, 감사합니다!"
"고마워."
솜사탕을 받아 든 여주는 왠지 신이 나있었다. 방방 뛰지 않아서 그렇지, 얼굴 가득 퍼진 미소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애 데리고 놀이동산 온 기분이네. 조그만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솜사탕을 떼어먹는 작은 손이, 또 귀여웠다. 맛있어! 갑자기 뒤를 휙 돈 여주가 활짝 웃었다.
"맛있어?"
"아, 나, 솜사탕 하나에 너무 신났나...?"
"아니야, 나도 신나."
솜사탕을 흔들어 보인 영민이 여주를 따라 활짝 웃었다. 그랬기에 여주는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조금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달콤한 솜사탕도, 옆에서 함께 웃어주는 영민도. 용기가 생겼다. 그만 부끄러워할 수 있는, 용기. 이상했다. 몇 개월을 거쳐도 마음처럼 되지 않던 일이, 이렇게 한 순간에. 모든 건 영민의 환한 미소 덕분이었다.
솜사탕을 해치우고서 시원한 스무디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분식도 먹었다. 축제는 먹는 날과 다름이 없었기에 주구장창 먹기만 해댔던 것 같다. 배부르니까 좀 쉴까? 영민의 제안에 따라 다시 벤치로 나왔다. 같이 웃고 떠들며 교실을 누비고 다니기 전, 그러니까 아까 전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은, 아주 달랐다. 적어도 여주에게는 그랬다. 없던 용기가 생겨버렸으니. 신발 앞코를 부딪치고 있던 여주가 입을 뗐다.
"영민아."
"..."
"영민아."
"어? 나 불렀어?"
영민은 어쩐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여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너 불렀는데. 영민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잘못 들은 줄 알았어. 그러고는 멋쩍게 웃어 보이는 것이다.
"내 이름 부른 거, 처음이잖아."
"응?"
"그래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살짝 짓는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수줍었다. 여주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영민은 그런 여주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영민아, 라고 했다. 여주가. 혹시 꿈은 아닐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데. 허나 영민은 곧 방긋 웃고 말았다. 기분이 좋아서. 정말 우습게도, 이름 한 번 불러준 게. 그렇게나 기분이 좋아서.
"맞아, 내 이름 임영민."
"어?"
"많이 불러줘."
투정부리는 거다. 이제 그만 수줍어해도 충분히 귀여우니까. 우리 이제 친구쯤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다. 으응, 그럴게. 여주가 곧장 대답했다.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긴 한 모양이다. 영민은 조금은 갑작스러운 지금의 변화가 의아하기는 했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좋아서 방방 뛰고 싶을 지경인데.
"그럼, 우리 이제 친구?"
"...응, 맞아."
친구. 무어라 딱히 정의할 수 없었던 영민과 저 사이에, 관계의 명칭이 생겼다. 이제 영민과 저는 친구라는 명칭 아래에 함께 있다. 제가 영민을 좋아하는데, 이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렴 좋았다. 혼자 끙끙 앓는 것 보다야 숨기던가, 드러내던가. 둘 중 하나가 나을테니까. 오늘을 기점으로 하여 영민과 저는 전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더 소소한 대화들을 나눌 것이다. 오늘은 아침으로 뭘 먹었어. 이런 영화 새로 개봉한다더라. 나는 어떤 게 좋아. 와 같은 일상 속의 대화. 여느 친구들처럼, 그렇게.
***
"어디 가?"
"영화 보러."
"누구랑?"
"영민이."
아이고, 아주 남친 납셨다. 세연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는 얼굴을 열심히 꾸미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별로 티도 안 나지만. 가방을 매는 폼이 퍽이나 들 떠 보인다. 세연은 웃고 말았다. 혼자 쩔쩔 매더니, 어째 친구까지는 갔네. 왜 친구로 시작했는지가 의문이지만, 나쁠 건 없으니까. 세연은 여주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힘을 내라는 사인이었다. 지나치게 설레발을 칠 제 친구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뛰지 마, 넘어져."
친구라고 하기에는 정말 애매한 게 맞았다. 정말 친구인 남자애들이랑은 영화 같은 거 보러 다니지를 않으니까. 그래도 저와 영민은 친구다. 영민이 달려오는 여주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달려오는 폼이 토끼마냥 귀여워서, 뛰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낯간지러운 생각을 너무나도 많이 하는 요즘, 영민은 시도 때도 없이 실소를 터트리고는 했다. 주된 요인은 여주 밖에 없었다.
"내가 팝콘 살게!"
영민이 산다고 하기전에 잽싸게 달려간 여주는 금세 팝콘을 품에 안고서 돌아왔다. 상영관까지 입장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영화가 눈에 들어올까가 문제였다. 공포영화라고 했던가? 지금은 공포영화 시즌이니까. 무더운 여름인 탓이었다. 평범한 영화를 보려고 해도 공포영화들만 시간대에 가득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가장 평점이 높은 영화를 골랐다. 평소 무서운 것을 그다지 못 보는 편이 아닌 여주는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었다. 근데, 영화가 눈에 안 들어올 것 같다고. 팝콘통 안에서 자꾸만 부딪치는 손이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영화에 집중을 해.
"아, 아! 깜짝이야..."
영민은 깜짝깜짝 놀라며 몸을 들썩였다. 여주는 영화를 꽤나 흥미롭게 봤다. 하지만 그 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움찔하는 영민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고, 여전히 부딪치는 손이 신경 쓰였다. 여러모로 영화를 보러 온 건지, 영민을 보러 온 건지 헷갈리고 있었다. 놀랄 때마다 숨을 들이키는 영민이 귀엽기도 했다. 무서운 걸 잘 못 보는 구나. 힐끔 쳐다본 영민은, 인상을 찌푸리고서 실눈을 뜨고 있었다. 진짜 귀엽다. 그리고 잘생겼다.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으으..."
급기야 영민은 고개를 파묻기까지 했다. 여주는 영화를 보는 대신 영민을 보기로 했다. 선택 사항이 아니었지만. 영화에 몰입한 영민은 주먹까지 꽉 쥐어가며 무서워하는 중이었다. 예매할 때는 엄청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더니. 여주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어대는 영민이 귀여운 탓이었다. 몸은 잔뜩 웅그리고서, 눈만 빼꼼 내놓은 폼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많이 무서웠어?"
"아니. 별로 안 무섭던데."
"거짓말."
킥킥대며 저를 놀리는 여주에 발끈한 영민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진짜거든. 안 무서웠어. 여주는 그렇게 쳐주기로 했다. 영민이가 안 무서웠다면 안 무서운 거지, 뭐. 오늘로써 영민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또 좋았다. 안 좋을 때가 있겠냐마는.
다음 코스는 파스타 집이었다. 이거 완전 데이트 코스가 따로 없다. 평소 먹던 토마토 파스타를 시킨 여주는, 할 일 없이 물 컵만 톡톡 쳐댔다. 아까 전 겁을 잔뜩 먹은 영민이 자꾸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서, 웃음이 샜다. 영민은 여주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뭘 생각하길래 저렇게 웃는 거야. 물어보려는 찰나에 주문한 파스타가 나와버렸다.
"묻히지 말고 먹어야지."
깔끔하게 먹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됐다. 턱을 괴고서 여주가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영민은 웃음을 터트리며 휴지를 집어 들었다. 아, 묻었어? 민망해진 여주는 입가에 묻은 소스를 손으로 훔쳐 내려 했다. 안 돼, 손 버려. 여주의 손을 저지한 영민은 손수 소스를 닦아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바람에 여주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는 탓이었다.
"골고루도 묻혔네."
영민이 웃으며 몸을 바로 했다. 그제야 여주는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 고, 고마워."
네가 자꾸 이러면, 너와 친구가 된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안녕하세요 여러분!! 늦은 새벽에 업데이트를... 죄송해요 ㅠㅅㅠ
며칠 전 올린 '정셰프의 사랑 법' 글은 제가 자고 일어나면! 삭제가 될 예정입니다ㅠㅠ
올리고 나서 다시 한 번 훑어보니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중에 수정을 거친 후 재업로드를 하던가 하도록 할게요! 가능성은 낮지만...!
부족한 제 글 읽으시느라 수고가 많으시구 제가 항상 감사드리는 거 아시죠ㅠㅠㅠ
더위 조심하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