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w. 워너워너
입대 날짜가 잡히고 나에게는 이제 4달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 네 달은 정말 후회없이, 미친듯이 마셔라 부어라 였다. 그 날도 어김없이 동기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자는 그 말에 신이나서 추운 새벽을 가로지르는 그때의 나는 21살 이였다.
호프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시끄러운 음악이 나를 반겨주었다. 대충 고개를 휘저어 보니 우리 학교 다른 과 애들도 보이고 회사를 퇴근한 직장인들의 뒷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저 구석에 이미 놀자판을 벌이고 있는 우리 동기들까지. 나는 괜시리 반가운 마음에 그 쪽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야, 벌써 시작했냐 나는 과잠을 입고 있는 문성이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에 합류했다. 애들은 나를 뒤늦게 알아보고는 바쁘게 술잔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21살 남자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여자 애들 이야기로 넘어갔다. 누가 누구랑 사귄대, 누가 그렇게 이쁘더라. 누가 뭐를 했는데 어떻게 됐다더라.. 자기들끼리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걸 나는 그저 묵묵히 족발을 파헤치며 흘려 들었다. 이성에는 아직 관심이 없다. 혈기왕성한 이 나이에 왜 이성에 관심이 없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아직은 친구들이랑 노는 게 제일 재밌을 뿐이다. 야, 근데 김재환. 너는 니 좋다는 애들 꽤 있는데 왜 안 사귀냐? 족발을 중 자로 하나 더 추가하겠다며 주문벨을 누르는 상균이를 뒤로 하고 문성이는 나를 툭 치며 물어온다. 마침 비어있는 술병을 발견하고는 소주도 2병 더 부탁드려요! 라고 말하다가 나에게 물어오는 문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냥 그냥? 응, 아 그리고 나 군대가잖아 나중에 제대하면 사귀지 뭐 내 시덥잖은 대답에 문성이는 지랄..누가 복학생 만나준다냐.. 라며 낮게 읊조린다. 여자 친구라고는 중학생때 멋 모르고 50일 사귄 그 친구가 다 였다. 그 이후로도 호감이 가는 애들은 많이 있었지만 굳이 연애를 해야한다는 느낌이나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내가 사랑할 사람이, 그리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 건너편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누구지, 흐릿해진 시야를 되잡으며 그 인영을 눈을 좇았다. 야! 김재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다니엘이였다. 아, 너네 과였어? 익숙한 다니엘에 반가워서 그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인사했다. 다니엘은 다른 과인데도 경영과 애들이랑 친해서 금세 나와 친해졌다. 우리 둘 성격이 잘 맞는 것도 한 몫 했지만. 강다니엘은 실실 웃으며 자연스럽게 우리 테이블에 합류해 앉았다. 야야, 너 왜 여기 앉냐. 장난스레 물어오는 상균이의 말에 다니엘은 아, 우리 테이블 지금 노잼이야 노잼.. 남자애들 아무도 안 와서 심심해. 라며 울상이 된 얼굴로 칭얼거렸다. 야, 그럼 그 자리 내가 간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문성이를 말리느라 꽤나 진을 뺐지만, 다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다니엘이 합류된 자리는 더더욱 시끄러워졌고 상균이는 또 다시 치킨을 하나 더 시키겠다고 주문벨을 눌렀다. 이모, 맥주랑 소주도 한 병씩 더 주세요! 나의 외침에 문성이는 너 오늘 아주 끝까지 가려고 작정했냐, 라고 타박했지만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냥 오늘따라 술이 좀 잘 받는다, 라고 대충 대답하며. 그때 호프집 문이 열리고 찬 바람이 열린 틈새로 스며 들어왔다. 와 진짜 춥다, 벗어 놓았던 후드집업을 다시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팔을 끼어 넣어며 고개를 들었다. 호프집에 찬 바람을 안겨준 주인공은 다니엘이 앉아있었던 테이블로 총총 뛰어가 넉살좋게 웃으면서 야 뭐야, 벌써 이만큼 마셨어? 라고 물으며 앉았다. 그 아이는 다니엘이 종종 입고있는 과잠과 같은 색깔의 과잠을 입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앉자마자 자신의 가방을 풀고 과잠을 벗더니 야,따라따라 라며 익숙하게 잔을 흔든다. 그녀의 모습에 여자애들은 언니, 왜이리 늦었어! 라며 그 술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언니? 재수한건가, 2학년 중에 저런 애는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아니면 내가 몰랐던 건가. 혼자서 기억을 되짚으며 익숙한 인영이라도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 아이는 주체할 수 없이 잔에서 흘러 넘치는 맥주 거품을 한 방울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잔에 급하게 입술을 붙였다. 야야 넘치잖아! 그녀의 장난섞인 타박에 여자애들은 미안해, 라며 살갑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그 아이의 행동에 고개를 내리 깔고는 남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강다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구, 술고래 왔다. 나 잠깐 갔다올게. 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이 장면이 뭐라고 나는 그 아이의 입장부터 테이블에 앉아 술을 받아 마시는 거 까지 계속 지켜봐왔는 지 잘 모르겠다. 그냥 찬 바람에 홀려서 쳐다본 건데. 단단히 겨울에 취했나보다 내가,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다 잡으려고 애썼다. 그게 너와의 첫 만남이다. 물론 나만 기억하고 있는 너의 첫 모습이지만. 그 이후로 학교에서 너를 종종 마주쳤다. 물론 너를 알아보는 건 나밖에 없었다. 그 아이에게 별다른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그냥, 일부로 눈을 안 마주치려고 노력한거? 그저 그뿐이였다. 눈이 마주치면 입술이 바싹 바싹 마를거 같았다. 하루는 괜히 옆 동네에 있는 왕 돈까스가 먹고싶어 혼자 버스를 타고 길을 나선 적이 있다. 두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창 밖에 쌓인 눈더미를 바라보다가 얼마 남지 않은 입대 날짜가 생각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리는 이어폰 너머로 버스 기사 아저씨의 타박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돈이 없으면 내리셔야죠! 버스 기사 아저씨께서는 앞에 서있는 할아버지께 큰 소리로 외쳤고 그 장면은 충분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할아버지께서는 허둥지둥 두 손에 가득 들고 있던 짐더미를 내려놓으셨다. 기사 아저씨께서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또 큰 소리를 내시려고 하셨다. 대충 상황 파악을 한 나는 그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앞 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나의 행동보다 더 빠르게 그 사태에 끼어드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아주 담담한, 하지만 아주 단호한 그런 목소리. 두 명이요. 그리고 이거, 너는 교통카드를 찍고 나서는 지갑에서 꼬깃꼬깃해진 만원짜리 두 장을 꺼내 단말기 안에 넣었다. 이걸로 나중에 버스비 없으신 분들 그냥 태워주세요. 너는 이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께 다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갑게 웃으며 짐을 들어다가 빈 자리를 살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내어 주었고 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분명 옆 동네를 가려고 했는데 버스 안에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버스가 종점을 찍을 때까지 그저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었다. 너가 지나간 자리에 너의 샴푸 냄새가 여전히 묻어나 있는 거 같았다. 너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그냥 너를 생각했을 뿐인데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왔고 괜시리 귀 끝이 뜨거워졌다. 인정하기 싫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사랑이였다. 더 황당한 건 김재환 21살 인생 처음 느껴본 낯선 감정이였다는 것이다. 그래, 그건 엿같은 사랑의 서막이였다. 짧아진 머리가 낯설어 모자를 하나 사서 머리에 쓰고는 포차에 들어갔다. 입대가 코 앞으로 다가왔고 애들은 쉴틈없이 나를 불러냈다. 아니 뭔 영영 헤어지냐.. 왜 자꾸 불러, 나는 추위에 손을 주머니에 집어 넣은 채 빈 의자를 발로 끌어 당겨 앉았다. 애들은 익숙하게 손짓으로 인사를 하더니 친구 군대가기 전에 만나는 거라고 해야 통금시간 풀림 이라고 대충 답한다. 저런 것들도 친구라고.. 입대 전 뭔가 우울한 마음에 분명 조금만 마시려고 했는데 결국 오늘도 신이나서 계속 마셔라 부어라다. 뒤늦게 느껴지는 두통에 찬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건너편에 앉아있던 강다니엘도 같이 일어났다. 넌 왜, 나의 물음에 그는 손을 입 앞에 갖다 대더니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라이터를 찾는다. 이른 봄 바람은 여전히 차갑다. 코를 킁킁 마시며 강다니엘 옆에 쭈그려 앉았다. 다니엘은 익숙하게 담배를 하나 입에 물더니 나에게 하나 건네 온다. 너도 하나 필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로 대신 답했다. 싱거운 새끼.. 다니엘은 바람을 막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한 번 내뿜는다. 으, 냄새. 나는 그의 행동에 두 손으로 코를 막았다. 왜 같이 나와서 지랄이야 이 새끼는, 괜히 다니엘을 흘겨보며 너 노래해서 안 피는 거지 응 여전히 코와 입을 막은 상태로 답하자 강다니엘은 옘병하네.. 라고 욕짓거리를 내뱉는다. 그때 문득 든 생각에 손을 떼고 다니엘에게 물었다. 야 근데, 그때 술고래라고 한 애 누구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리더니 생각났다는 듯이 담배를 입에서 떼고는 말한다. 아, 그때 호프집에서 였나? 과잠입는 애? ㅇㅇㅇ 말하는 거냐 걔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이튼 그때 늦게 들어온 애 아, 이름이 ㅇㅇㅇ구나. 뜻밖에 알게된, 아니 드디어 알게 된 그 아이의 이름에 남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ㅇㅇㅇ 맞을 듯, 근데 걔가 왜? 다니엘의 물음에 아니, 처음보는 얼굴이라서.. 1학년이야? 라고 되물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걔 재수해서. 나랑 옹성우랑 고딩때 친구임. 쩔지, 그는 나에게 답하면서 담뱃재를 훌훌 털었다. 아 고등학교 친구가 다같이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도 있구나, 영화에서나 볼 만한 상황이 내 눈 앞에 일어났다는 게 신기해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 그래? 야, 김재환 그렇게 그 아이의 이름만 머릿 속에 몇 번을 되새기고 있는데 갑작스레 들려오는 내 이름에 고개를 들어 서있는 강다니엘을 올려다 보았다. 왜, 근데 웬만하면 걔 좋아하지마 그때 내 머릿 속 모든 회로가 정지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였다. 좋아하다니, 내가? 아니 그 전에 이 새끼는 어떻게 눈치깠지, 어쩌면 그냥 찔러보는 거 일수도 있잖아. 당황스러운 내 눈빛을 다니엘이 읽었을까, 짙은 밤이라 어둠이 나를 가려주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ㅇㅇㅇ 옹성우랑 사귄 지 한 4년 쯤 됐다. 다니엘은 신발코로 땅을 파며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땅을 파서 나온 자갈들이 내 신발 앞으로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꽃샘추위는 엿같게 추웠고 내 짧은 머리 덕분에 더더욱 추웠다. 그 새벽은 너무 시린 날이였다. ..아, 그래? 그렇게 한참을 겨울보다 더 시린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쉬이 뗄 수가, 아니 떼고 싶지가 않았다. 내 신발코 앞에 나뒹구는 자갈들을 괜히 자세히 보면서 흔들리는 눈동자를 애써 감추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나에게 감히 사랑이라니.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야 근데, 담배는 왜 피는거냐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입에 담배를 물어봤다. 군대에 있으면 뭐든지 금방 잊혀질 거 같았다. 그래서 문득 문득 너가 생각나면 짧게 담배를 피는 걸로 무마시켰다. 그래, 나는 너가 생각나면 담배를 폈다. 사실 그렇게 해서 핀 담배가 몇 곽이나 되었는 지는 차마 셀 수가 없지만 너를 잊고자 하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지독한 것들이 이내 익숙해질만큼 지독히. 아마도, 내가 그 짧은 시간동안 너를 많이 좋아했나보다. 그리고 23살, 기나긴 군대 생활이 끝나고 나는 비로소 제대를 했다. 드디어 민간인이 되었다. 여전히 짧은 머리가 괜히 부끄러워 후드티 모자를 머리에 눌러쓰고는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나보다 두 달 빨리 제대한 강다니엘과 옹성우가 내 제대 소식을 듣고는 그세를 못 참고 전화를 한 것이다. 내가 전화를 받자 옹성우는 우리 한번 만나야 하지 않습니까, 어딥니까, 빨리 대답합니다. 라며 장난스럽게 다나까 말투를 썼다. 그에 내가 편의점 가는 길이라고 치를 떨며 대답하자 이들은 내 이런 반응이 재밌는지 빨리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오라고 신이나서 말한다. 아휴, 민간인이 되자마자 만나는 사람이 이 새끼들이라니.. 내 팔자야, 옹녤환, 옹녤환! 익숙한 포차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건 이상한 말을 하며 나를 반기는 강다니엘과 옹성우였다. 그건 또 뭐야, 반가운 마음에 괜히 툴툴거리며 애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빈 자리에 앉았다. 야, 민간인 축하한다! 옹성우는 내 빈 잔을 가득 채워주며 말했다. 강다니엘은 손수 치킨 닭다리를 내 손에 쥐어주었고. 야, 너네 복학 언제할거야 한참 시끄럽게 떠들다가 문득 든 생각에 치킨 무를 하나 씹으면서 이들에게 묻자 내 질문에 다니엘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당연히 다음 학기 아님? 이라고 답한다. 그치? 나도 마침 다음 학기부터 다니려고 생각했던 참이라 같이 복학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하려고 그때 옹성우는 얼음을 동동 띄운 찬 물을 마시며 말해왔다. 이번 학기? 미쳤어? 강다니엘은 성우를 흘겨보며 타박했다. 단단히 미쳤구나, 너.. 왜 그런 미친 생각을 했어? 나의 질문에 성우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와 새삼 잘생겼다, 잘생긴 새끼.. 여자친구 보려고 옹성우의 말이 끝나자 타이밍 좋게 성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의 밝은 표정을 보아하니 누구의 전화인지 보지도 않았는데 알 거 같았다. 나 전화 좀, 성우는 휴대폰을 들고 포차 밖으로 나갔고 나는 남 모를 씁쓸함에 잔에 남아있는 소주를 입에 털었다. 사실 성우를 볼때마다 죄책감이 너무 컸다. 물론 짝사랑은 죄가 아니지만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성우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칼로 가슴팍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마른 입술을 괜히 축이고 있자 나를 발로 툭 건드는 건 다니엘이였다. 야, 너 내가 소개팅 시켜줄까 평소와 똑같이, 하지만 이런 내 감정을 다 안다는 듯이 나에게 말해오는 강다니엘에게 뭔지 모를 고마움을 느꼈다. 너도 내가 안쓰러워 죽겠지. 나는 바람빠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담배? 다니엘은 씨익 웃으며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 컸네 김재환, 이라는 소름돋는 말도 하면서 강다니엘은 역시나 다 알고있던 거였다. 내 지난 2년간의 짝사랑을, 아직 종지부를 찍지 못한 나의 가여운 첫사랑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나의 친구이자 옹성우의 친구인 강다니엘인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불편했다. 나는 언제쯤 마음 편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얘기라도 하고싶다, 내 이름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실 그 아이를 먼 발치서라도 본 날이면 하루종일 행복했다. 이런 어리숙한 사랑은 처음이였고, 마지막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였다. 24살이 된 나는 여전히 철없고 놀기 좋아하는 건장한 남자였다. 다만 취업때문에 머리가 터질거 같은 것만 빼고. 그리고 어설픈 첫사랑이자 짝사랑도 무려 3년만에 막을 내리려고 하고있다. 이제 그만 보내줘야 할 거 같다, 내 마음 속에서. 나만 놓으면 끝날 인연이지만. 여기까지 다짐을 하자 마음이 한 결 편안해져 더이상 성우를 볼때마다 칼로 심장을 들쑤시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성에 뒤늦게 눈을 떠 이제서야 관심이 가는 척을 하며 모든 과팅이란 과팅은 거의 다 나간거 같다. 종종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다니엘만 빼면 나는 사랑이란 걸 해본적이 없는 순진무구한 모태솔로에요, 라고 광고하고 다녀도 아무도 몰랐을테다. 나 옹성우랑 헤어졌어. 그때는 길가다가 어렴풋이 보이는 익숙한 강다니엘의 모습에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고, 그 옆에는 내가 잊으려고 애쓰는 그 주인공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시력에 단번에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알아차렸다, 미련하게.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별을 말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이 바보처럼 한참을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고 ㅇㅇ는 그런 다니엘을 바라보다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내리 깔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당황함에 바쁘게 눈동자만 도륵 도륵 돌릴 뿐이였다. 그날밤 나는 이유없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과연 나는 내가 그 이유를 진짜 몰랐을까, 긴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경영과가 모인 날, 선배는 술에 취한 성우를 부탁하기 위해 ㅇㅇ에게 연락을 했고 나는 그 둘의 이별을 알고있었지만 차마 나서지 못했다. 이제는 그 아이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거다. 그 아이를 잊으려고 애쓴 1년동안 몇 번의 연애도 해봤었고 어리숙한 사랑도 해봤으니. 나는 바람빠진 웃음을 지으며 담배나 하나 피고 오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나섰다. 그래, 거기까지는 정말 좋았다 이거다. 우산을 사선으로 어정쩡하게 들고는 비를 피해 라이터를 켰다. 비가 와서 그런가 담배에서 이상한 비 냄새가 났다. 그때 호프집 뒷문이 덜컹하고 열리고는 익숙한 향기가 나는 익숙한 아이가 나왔다. 성우는, 그리고 다니엘은 정말 좋은 친구이고 나는 그들이 정말로 소중하다. 또한 비록 대학와서 만난 애들이지만 성우에게, 그리고 다니엘에게 최고의 친구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정말 나쁜 새끼였다. 세상의 모든 악역은 결국 나였다.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않고는 비를 맞으며 쭈그린 상태로 울고있는 너를 보고 내 사고회로는 일순간 정지하였다. 너의 큰 용기와 대담함으로 내가 동경하던 너는 한없이 큰 사람이였고, 차마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울고있는 너는 한없이 작고, 외롭고, 아파보였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헤어진 남자친구인 성우때문에 울고 있는 너때문에도, 너를 울린 성우때문에도 아니였다. 그냥 너를 좋아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 너를 안아주고 싶어하는 나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 아이의 슬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머리에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벗어 크기를 최대치로 늘린 다음 그 아이의 머리에 어색하게 씌워 주었다. 잔뜩 슬픈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옹성우야, 라고 묻는 너에게 내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옹성우가 시켰냐고? 아니, 그냥 너가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왔고 나 마음대로 너를 내 마음에 품었다. 너를 좋아한 건 나의 잘못이다. 이 사단까지 온 건, 이렇게까지 너를 좋아하게 된 건 너 때문도, 성우때문에도 아니라 나의 의지였다. 근데 내 마음을 어떻게 너에게 말하겠어. 그래서 나는 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던 거 같다. ..응, 맞아 고등학교 때 다니고 대학와서는 방학마다 다녀왔던 실용음악 학원에 익숙하게 들어가 연습실에서 기타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밤 늦게 다시 집에 오는 게 내 방학의 일상이였다. 그런 나의 일상에 큰 파도를 친 건 역시나 너였다. 너라는 파도에 나는 또 크게 일렁였고 그 순간 내가 항해하던 배는 그만 뒤집혀 바다 깊숙히 빠졌다. 너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를 향해 이야기 해주는 그 집가는 길이 너무 행복해서 사실 나는 노래도 부르지 못한 상태로 한참을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있던 날들이 많았다. 역시나 너를 신호등까지 데려다 주던 날, 사실 나도 옹성우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금 심장을 칼로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그를, 이런 나의 감정을 무시해버렸다. 처음이였다, 내가 성우를 무시한 건. 얼빠진 너를 끌어 편의점으로 들어가 부실하게 저녁을 먹었을 너에게 뭐라도 사주고 열심히 뒷 정리를 하는 너의 뒷모습을 보다가 먼저 편의점에서 나왔다. 입에 담배를 하나 물다가 너가 나오는 문 소리에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오늘도 역시나 난 너의 뒷모습만 보겠구나. 월말평가가 끝나고 ㅇㅇ는 학원 선생님들과 회식을 하러가 오늘은 혼자서 발을 질질끌며 자취방으로 향했다. ㅇㅇ를 데려다 주는 신호등 앞까지 갈 필요가 없어 오늘은 빙빙 돌아 집에 가지 않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빨리 도착한 집이 낯설었다. 샤워를 하고 누워서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걸려오는 너의 전화에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 급하게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의자에 아무렇게 나뒹구는 셔츠 하나만을 들고 급하게 집에서 나왔다. 술도 마시고 어디를 나갔다는 거야, 급하게 뛰어가다가 불이 켜진 약국을 보고는 무엇에 홀린 듯이 들어가 감기약을 샀다. 아까 좀 아파보이던데, 그 와중에 그걸 본 내가 참 멍청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계속해서 시내가에 있는 삼겹살 집으로 달려가는데 그 근처 큰 건물 계단 밑에 너가 앉아 있더라.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ㅇㅇ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는 셔츠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이 밤중에 너의 얼굴을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괜히 걱정되어, 그녀의 앞에서 숨을 몇 번 고르고는 약봉지를 건네려고 한 그 순간, 나를 멈추게 하는 너의 목소리. 옹성우야? 나는 너를 잊으려고 담배를 폈고 너는 성우를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데 결국 우리 둘 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구나. 괜히 밀려오는 허망함에 나의 모래성이 무너졌다. 너의 말에 반항하고 싶어서 였을까, 아니면 그 순간 처음으로 솔직해지고 싶어서 였을까. 누군가 보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도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지금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무덤까지 가서도 땅을 치고 내 자신을 책망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나쁜 새끼라는 거, 내가 너라는 드라마에서 악역이라는 거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나로 인해 너가 힘들어 질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이기적이였다. 아니, 김재환이야. 사랑은 사람을 간사하게 만든다. 나의 세상은 또 작은 파동에도 크게 무너진다. 너를 향해 가는 나의 길에 우회로는 없었고 오로지 직선으로 나아가든가 벼랑으로 떨어지든가 이 두가지 선택뿐이였다. 7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지려고요 술기운에 집에 어떻게 찾아왔는 지는 희미하게만 기억난다. 김재환은 잔뜩 축 쳐진 나를 이끌고는 내가 가르키는 방향에 따라 하숙집에 도착했다. 그가 건넨 검정 봉지에서 감기약을 괜히 꺼내보다가 다시 집어 넣고 책상 끝으로 밀었다.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늦게 심해지는 두통에 머리만 감싸 안고는 책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아니, 김재환이야 김재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미 바싹 마른 입술을 뜯으며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에 가서 누웠다. 재환아, 너는 내가 왜 좋아? 이 물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이거까지 물으면 나는 정말 잔인하니까.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해보려고 했는데 자꾸 아까의 김재환이 떠올랐다. 제 숨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헉헉 거리면서도 내 손에 약으로 가득 찬 검정 봉투를 건네던 김재환이. 미친년, 스스로에게 작게 읊조리고는 무거워진 몸을 돌려 누으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 머리아파. 차라리 이 세상에 나 혼자가 되었으면 했다. 실장님 죄송해요, 저 오늘 아파서 출근 못 할거 같아요.. 다 잠긴 목소리로 내가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역시나 출근 준비였다. 하지만 샤워를 하다가 두통에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하였고 그 후 나는 스스로에게 휴식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들어도 아파보이는 내 목소리를 들은 실장님의 걱정 가득한 표정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래, ㅇㅇ씨 푹 쉬어. 미끄러지듯 핸드폰을 축 하고 내려 놓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커튼을 쳐서 아직도 어두운 내 방 때문인지 여전히 깊은 밤인 거 같다는 착각을 주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정신없이 잤는 지 모르겠다. 휴대폰 잠금 화면을 켜서 시간을 보니 어느덧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뭔 겨울잠 자듯이 잠만 잤나보다. 생수를 마시고 멍하니 누워있는데 그때 내 방을 똑똑, 하고 두드리는 소리에 아득하던 정신에서 막 헤어나와 끊기려는 정신을 다 잡았다. "ㅇㅇ 학생! 밑에 손님왔는데," 손님? 주인 아주머니의 말씀에 무거운 몸을 이끌어 방문을 열고는 1층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가니 익숙한 사람이 오렌지 주스가 가득 담긴 컵을 앞에 두고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김재환?"
내 부름에 김재환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휘청거리는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야 오지마, 나의 갈라진 목 틈 사이로 나오는 안쓰러운 목소리에 김재환은 잠깐 주츰하더니 내 앞으로 와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오지 말라고?" "..." "내가 어떻게 그래" 아니야 김재환, 너는 그때 나한테 오지 말았어야지. 밀어낼 수록 다가오는 너에게 나는 또 계속해서 무시하겠지. 니 감정은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상처받는건 너야, 그런데도 계속 하겠다고? 김재환의 부축으로 나는 겨우 계단을 올라 다시 내 방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그러던데.. 김재환은 내가 침대에 눕도록 도와주고는 개보다 못한 ㅇㅇ, 이라며 내 이마를 아프지않게 툭 하고 건들였다. "너 왜 왔어" "너가 안 왔잖아." 걱정돼서, 김재환은 또 무얼 사온 건지 부스럭 거리며 작게 읊조렸다. 그의 말에 나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항상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왜 굳이 상처받는 법을 택하는 건지, 나는 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죽 먹어라, 너 밥 하나도 안 먹었지?" 그가 검정 봉지에서 꺼낸건 다름 아닌 죽이였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 야채죽. 김재환의 재촉에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침대 받침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았다. 밥 생각 없는데, 그저 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뭐야, 내가 먹여줘야 되는 거야? 라며 숟가락을 들었다. 김재환의 행동에 기겁해 손사래를 치며 온몸으로 거부하니 그는 오기가 생긴건지 자꾸만 아, 아, 거리기만 한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내가 아플때 내 옆에 있던 사람은 옹성우였는데 지금은 낯선 사람이 나를 돌봐주고 있다니. 과거의 내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기가 막혀서 기절을 할 상황이였다. 오랜만에 받는 보살핌에 눈물이 핑 돌거 같은 기분이였다. "아, 나중에 먹을래?" 김재환은 내 얼빠진 표정을 보고는 이내 죽을 다시 집어넣고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라며 신신당부했다. 그의 걱정섞인 핀잔에 대답 하는 둥 마는 둥하며 다시 제자리에 누웠다. 낯선 남자와 좁은 하숙방에 있다는 사실이 설레거나 떨리거나 긴장되거나 한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조금 눈치보이고 불편할 뿐. 성우랑 있을 때 내가 이런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그때 김재환은 어디서 가져온건 지 차가운 수건을 내 머리맡에 올려주며 젖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의 무의식적인 보살핌에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성우는 항상 내 흘러 내리는 앞머리를 귀에 꽂아 정리해주고는 했는데. 아니, 지금은 옹성우가 문제가 아니라 내 옆에 떡하니 앉아있는 김재환이 문제였지만. 봉지에서 약을 하나씩 꺼내며 종알 종알 설명하는 김재환의 뒷 통수를 보는데 흐릿해진 시야에서는 자꾸만 옹성우랑 겹쳐보이다가 이내 김재환 하나로 보이다가를 반복했다. "..야,"
내 잠긴 목소리에 김재환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바닥에 앉아있는 그와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눈높이가 딱 맞아서 기분이 엿같았다. "..너 나 좋아하지마" 나의 말에 그는 잠시 주춤하더니 고개를 다시 내리깔고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괜히 약 상자들을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를 반복했다. 우리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너였다. "그건 어려울 거 같아" "..야," "미안" 미안하다는 김재환의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어둠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너의 두 눈이, 아니 그런 눈을 가진 너가 처음으로 안쓰러웠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에 행복함보다는 미안함을 먼저 느끼는 너가. 가봐야겠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재환을 그저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그는 문 손잡이를 잡고 잠깐 동안 생각을 하더니 이내 입을 뗐다. "지금 당장이 아니여도" ".." "나는 괜찮은데" 나 간다 나오지마, 김재환이 문을 연 틈새로 잠깐의 빛이 쏟아지다가 문이 닫히자 이내 다시 깜깜한 어둠 뿐이였다. 차라리 이 어둠에 내가 묻혀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좋아? 이 질문은 결국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첫 째로는 그 대답을 들으면 나는 영원히 헤어 나올 방법을 찾기가 곤란해 질 거 같아서 였고, 둘 째로는 그 질문의 답은 항상 옹성우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가득 섞인 기침을 잔뜩 하다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김재환이 사다 준 약을 하나 뜯었다. 너가 나를 기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내 지금 감정의 원인을 알지 못해 답답해 하면서. 마음대로 내 영역에 들어오면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할퀴고 밀어내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아직 다른 누군가에게는 늘 낯설다. 지독하고 개 같은 감기는 결국 나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고 나는 여전히 304호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와 그에 걸맞는 목소리를 듣는다. 일상은 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아직 코를 조금은 훌쩍거리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김재환과의 관계도 이전과 다를 거 없이 똑같았다. 김재환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 난 후에 괜히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걱정는데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는 김재환에 내가 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였으까. 내가 정말로 잔인하고 나쁘다는 거 다 아는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김재환 너가 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친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재환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밀려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곤 했다. 지잉- 은로 고등학교 동창회함. 이번주 일요일 6시까지 신잔포차로. 불참 할 시 다음 동창회때 풀코스로 쏘고 삼대가 대머리. -오후 7:48 뜨거운 유자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울려오는 진동에 문자를 확인하니 동창회 문자였다. 아, 동창회를 가장한 일종의 계모임. 학생회장이였던 민현이는 몇 년 동안 동창회에 참여하라는 형식적인 문자를 당시 전교생에게 성실하게 보냈지만 모이는 멤버는 한정되어 있었고 결국은 따로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그게 바로 저 '동창회' 라는 모임이고. 당연히 저 안에는 옹성우랑 강다니엘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모임을 한 지가 벌써 1년 전이다. 애들 소식이 너무 궁금하고, 변한 아이들의 모습도 너무나도 보고 싶었는데 거기서 성우를 마주치면 나는 어떡하지. 갈등과 갈등 사이에서 괜히 입술만 잘근 잘근 씹으며 황민현이 보낸 문자만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옹성우 불참. 다음에 옹성우가 쏜다. 그리고 옹성우 삼대가 대머리 -오후 7:58 성우와 나, 그리고 다니엘은 유독 고등학교때 친구들을 아꼈다. 그 시절에 서로에게 의지를 많이해서 그런가,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이는 저 '동창회' 라는 모임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우리 셋은 이 모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뒤늦게 울린 황민현의 문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성우는 어떤 일이 생겼으면 그 일을 미루고서라도 평소에는 만나기 어려운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것이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고. ㅇㅇ 일요일에 오지? -오후 8:13 동창회 멤버 중 한명인 하성운의 문자였다. 성우의 불참 이유가 나 때문일까, 이 생각까지 다다르자 나는 머리를 절레 절레 내저었다. 너무 과대 해석 하지말자. 그러면 나만 더 힘들어지니까, ㅇㅇ 일욜날 봐 -오후 8:16 나는 괜한 추측과 추정을 멈추었다. 평일은 바쁘게 흘러갔다. 부쩍 노래에 관심이 많아진 청소년들 덕분에 쉴 틈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왔고 피곤에 찌든 금요일 밤까지 후딱 지나 생각없이 시간을 허비한 토요일도 지나갔다. 아씨 귀찮아, 원래 그러지 않은가. 약속 나가기 전이 가장 귀찮고 게을러 지는 법이다. 막상 애들을 만나면 그 누구보다 신나게 놀거면서. 1년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잔뜩 들떠있다가도 이전과는 다르게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 모습이 씁쓸했다. 전에는 성우가 운전하는 차로 갔는데, 문득 삐집고 들어오는 성우 생각에 괜히 스니커즈 신발 끈을 더 단단히 묶었다. 혹시나 애들이 나를 보고 성우을 찾지는 않을까, 그럼 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들뜬 마음에 감춰져있던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익숙하지 않을 물음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어, 내 친구 ㅇㅇㅇ!"
강다니엘이다. 지하철 환승역에서쯤 익숙한 담배냄새가 나는 다니엘이 저멀리서부터 나를 아는 체했다. 그와 저번에 다툼아닌 다툼을 하고나서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며 나에게 소심하게 연락을 해온 다니엘이다. 역시 싸움에는 소주라며 같이 한 잔 까고난 후에 다니엘은 나에게 물어왔었다. 근데 너 진짜 성우랑 다시 잘 해볼 생각은 없냐 그의 느닷없는 질문에 골뱅이를 찾던 젓가락질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빗 소리가 창문을 뚫고 내 귓가에 쏟아졌고 나는 한참을 아무말도 없이 허공에 눈을 박았다. 나를 재촉하지 않는 강다니엘이지만 이 정적이 나를 덮쳤다. 다시 잘 해볼 생각? 나도 이 생각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다. 뒤늦게 익숙함의 소중함을 알았을 때에는 그냥 눈 딱 감고 말해볼까 하는 미친 생각도 했었다. 근데 우리가 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기나긴 정적을 깨고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없어,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성우랑 나는 이미 1년은 후딱 넘은 오래돠고 썩은 우유와도 같을 것이다. 곰팡이로 뒤덮여 서로의 속이 문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래, 나는 자신이 없다. 친구 ㅇㅇㅇ라고 부르지 마라..존나 오글거리니까,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꾸하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제 드넓은 어깨로 나를 툭하고 치는 강다니엘이다. 왜, 우리 친구아이가! 이건 분명한 희롱이다. 수치스러워 죽을 거 같다. 이제 막 도착한 지하철에 탈 자리가 없어서 하나를 그냥 보내고 다음 지하철에 타니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포차에 도착했다. 지옥철을 몸소 경험해보니 삭신이 쑤신다며 찡찡 거리며 팔다리를 콩콩 때리는 강다니엘을 보며 혀을 끌끌 찼다. 덩치는 산만해서는... "아 이럴때 옹성우가 차 끌고 오면 쩌는ㄷ, "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다마 채 잊지 못하고 내 눈치를 급하게 살피는 강다니엘을 위해 그냥 못 들은 척 해주었다. 그래, 성우가 운전을 잘 하기는 했지. 여전히 눈동자를 돌리며 내 눈치를 보는 강다니엘을 툭치면서 문이나 열라고 말했다. 훅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에 단숨에 서늘해졌다. 강다니엘은 어, 애들 저기 있다! 라며 신이나서 뛰어갔고. "어! 니네는 아직도 같이 다니냐?" 내가 놀아주는 거임, 이라며 나를 흘겨보는 강다니엘의 뒷통수를 때리며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네는 어떻게 이렇게 똑같냐. "어 니네 삼총사 중 한명은" "아 옹성우 불참이잖아" "맞다, 선약 있다고 그랬지" 황민현과 하성운은 쫑알거리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면서 말해온다. 야, ㅇㅇ가 오늘 외롭겠네. 그들의 말에 나는 그저 허탈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항상 이런 상황이 들이닥치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쉽게 성우랑 헤어졌어 라는 말은 더더욱 못하겠고. 둘이 진짜 오래간다, 황민현은 불족발을 주문 한 뒤에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해왔다. 나는 괜히 찬물을 따르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흐름은 애들의 요즘 근황으로 넘어갔고 나는 남 모르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둘이 오래간다 라는 말은 몇 년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딱히 기념일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였던 나는 연애 초반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한 나날들에 무뎌졌다. 하지만 이런 나와는 반대로 성우는 이런 자잘 자잘한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잘했고 나의 평범한 날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6년 간은 서로 죽고 못 살다시피 사랑해놓고 1년은 거의 남이다시피 지냈다. 그냥 권태기라고 정의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는 권태기였다. 그래서 나는 혼자 정의내렸다, 우리는 헤어지는 중일 거라고. 이 친구들이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옹성우와 함께였고, 1년 2년이 지나 다 큰 어엿한 어른이 되어 반듯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을 때도 나는 성우였다. 그래서 그럴까, 이제와서 나 성우랑 헤어졌어 라고 말하기가 좀 꺼려졌다. 아닌가. 사실은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던져지면 복잡한 마음으로 그저 불편해 하고 회피할 뿐이였다. "야 그 5반 반장 김창주 기억나? 걔 그 아버지 회사 대기업이잖아. 거기 낙하산으로 취업했대" "헐 실화냐? 누구는 취업때문에 머리 터질거 같은데.." "역시 금수저가 좋은 건가.." 황민현은 머리를 내저으며 아이들 잔을 차례로 채운다. 독서감상문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던 부스러기 17살 고삐리들은 이제는 어느덧 취업을 걱정하는 24살의 어른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 다들 잘 컸지 않냐, 묵묵히 족발을 먹던 다니엘이 씨익 웃으며 말해왔고 그의 말에 우리는 다들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야 너네 3반 김명주 청첩장 받았냐? 나 진짜 기겁했잖아.." "그니까, 근데 뭐 옛날같으면 결혼할 나이기는 하지.." "아 그 결혼식 언제였더라," 이야기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3반 명주의 결혼 소식으로 넘어갔다. 나도 갑자기 받은 청첩장이, 아니 24살 인생 처음으로 나에게 온 청첩장이 낯설고 어색했는데 다들 같은 마음이였구나. 하성운은 소름돋는다며 몸서리를 쳤고 건너편에 앉아있던 세운이는 덤덤하게 그에 반응했다. 명주가 어떻게 생겼더라, 기억 속에 펼쳐진 졸업앨범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는 지은이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왜, 나의 물음에 지은이는 턱을 괴고 나를 그저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쟤 벌써 취한건가, 지은이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술잔이 그녀의 취기를 알려주었다. "너희는 결혼 언제해"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마시던 물을 켁켁 거리며 뱉었다. 이런 나의 행동에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에게 쏠렸고 나는 민망함에 쉽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오, 진짜 너희 결혼하면 내 통장 털어서라도 축의금낸다. 영민이는 진짜 영화같다면서 한 술 더 떠 오히려 자기가 더 설레하며 이야기 했다. 결혼? 성우와의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먹을수록 저절로 하게되는 상상이였다. 나의 미래에 성우가 있을까, 이 생각만으로 설레임에 새벽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래 모두 옛날 이야기지만. 내 옆에 앉아있는 강다니엘은 혼자 안절부절해서 뭐 그런 이야기를 하냐, 야야 짠해 짠! 이라며 화제를 돌리려고 애썼지만 아이들의 관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헤어졌다고 말 해야할 거 같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나의 모습에 강다니엘도 우리 둘 사이를 다 알면서 애써 말 안하는 거 일거다. 성우랑 끝났어, 이 말 한마디면 되는데 나에게 보내질 눈빛들이 무서웠다. 나로 인해 바뀌어질 분위기가 무서웠다. 결국은 우리도 남들과 똑같은 인연 중 하나일 뿐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무서웠다. 딸랑- 그때 굳게 닫혀있던 호프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내 건너편에 앉아있던 민현이는 그 소리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가 어? 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옹성우?"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등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니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바쁘게 우리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고 있는 옹성우가 보였다. 옹성우! 성운이의 부름에 성우는 마침내 우리를 찾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성우가 걸어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느리게 보였다. 시끄러운 호프집에 애잔한 배경 음악이 깔리는 기분이 들었다.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나갈까? 바쁜 일이 생겼다고 할까? 입술을 뜯으며 시선을 테이블에 박아두고 있자 나의 모습을 흘긋 보고는 다니엘이 괜찮겠냐고 말을 걸었다. 그의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옹성우를 바라보는 건 자신이 없다. "야! 너 못 온다며!" 누군가의 반가운 외침에 옹성우는 근처에 있어서 그냥 왔어, 라며 아이들과 한 명씩 하이파이브를 하며 인사를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내 앞에 손을 내밀고는 주춤했다. 주춤한 건 성우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성우는 민망했는 지 손을 다시 말아쥐며 안녕, 이라고 말하고서는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항상 기억 속에 담겨진 성우만을 보다가 내 눈 앞에서 움직이는 성우를 보니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찡 해졌다. 성우야, 안녕. 나는 차마 건네지 못 했던 인사를 마음 속으로 삭히며 눈 앞에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성우의 벚꽃 향 바디워시 냄새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그때 신호등 이후로 보지 못했는데, 아 왜 하필 마지막으로 너을 본 게 그때일까. 성우는 나랑 김재환 사이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남 모르게 험한 소리를 들었을 성우에게 미안해서 였을까, 왜 근본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야 성우도 왔으니까 물어보자! 너네 결혼 계획있냐!" 의지의 술 취한 지은이는 신이 나서 물어왔고 황민현과 몇 가지 안부를 묻던 옹성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지은이를 쳐다보았다. 아 쫌 강지은! 다니엘은 여전히 안절부절해 하며 지은이에게 윽박질렀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성우는 당황한 눈동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지은이를 바라보고 자신과 나를 주목하는 아이들을 바라 보다가를 반복했다. 옹성우는 자신의 뒷통수를 연신 매만지다가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너 그 습관 너가 당황하면 나오는 행동인거 몰랐지, 다시금 시작된 아이들의 관심에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연신 뜯으며 이 관심이 우리에게서 한 발 물어나 주기를 바랄 뿐이였다. "..아" 그 순간 아이들 앞에서 입을 먼저 연 건 성우였다. "애들아"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성우에게로 쏠렸다.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 맞지, ㅇㅇ야? 씨익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치는 성우의 모습에 마음 속 무언가가 쿵하고 떨어졌다. 애써 공들여 쌓아 올린 모래성이 큰 파도에 휩쓸려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닌 성우의 입에서 나온 낯선 이별이라는 단어가 내 심장에 박혔다. 그제야 나는 실감이 났다. 아, 우리가 진짜로 헤어진 게 맞구나. "..야야, 분위기 뭐야!" "..야야 애들아, 짠해 짠!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밝은 성우의 목소리와는 대조되게 흐릿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하성운은 잔을 들며 우리를 재촉했고 아이들은 어버버하며 술잔을 따라 들었다. 장난으로라도 헤어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 성우와 나였다. 아이들은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며 ㅇㅇ야 치킨 하나 더 시킬까? 라고 물어보았고 나는 애써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마음이 또 다시 이상하게도 슬퍼졌다. 하지만 성우의 눈빛이 느껴져서 내 감정을 차마 티 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서로 불편할테니까. 친구? 너랑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입 안에 남아있는 소주를 털어 넣었다. 소맥을 기가 막히게 잘 탄다며 저기가 제조하겠다고 괜히 더 오버해서 말하는 다니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우야 너랑 처음 만났을때조차 우리는 친구가 아니였는데 이제와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속이 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모든게 무뎌지면 그때는 그 누구보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거 같다. 시간이 약이니까, 서로의 옆자리에 채워진 서로가 아닌 다른 낯선 애인을 보면서 축하해주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저기 앉아서 웃고 있는 내가 사랑했던 성우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야 강지은은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 ㅇㅇ는 어떡할래? 같이 탈래?" "나는 이 앞이야, 지하철 타면 돼."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세운이에게 답했다. 영민이와 다니엘, 그리고 성운이는 먼저 2차에 가있겠다며 자리를 떴고 세운이는 잔뜩 취한 지은이를 데려다 주겠다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소주 두 잔을 머금고 픽하고 취해버린 민현이를 그의 본가에 데려다 주고 오겠다던 성우는 아직 오지않았다. 뭐 성우도 보나마나 2차엘 가겠지. 나는 할 게 많아서 먼저 갈게, 몸도 안 좋고.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으슬으슬 떨리고 다시금 감기가 덮칠거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사실 그 무엇보다 옹성우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아이들은 아쉬워하며 혼자 갈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철 없지만 든든한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아직 10시 밖에 안 됐어, 내가 애냐! 데려다 줄까 묻는 아이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재밌게 놀라고 하고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몇 모금 들어간 알코올은 취하지 않고 딱 사람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여름이 다 가려고 하나, 밤 바람이 꽤나 서늘해졌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지하철을 기다렸다. 지하철이 진입한다는 요란한 알림 소리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승차선 앞에 섰다. 이내 지하철이 승차했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적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휴대폰으로 그닥 볼 거리는 없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친구들의 방학을 즐기는 사진을 보다가 이번 달의 이슈을 보다가, 그렇게 의미없게 스크롤을 올리고 피드를 업데이트하고를 반복 했다. 그때 나의 어깨를 툭툭 치는 누군가에 의해 나는 휴대폰을 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어,"
옹성우였다. 예상치도 못한 그의 얼굴에 귀에서 이어폰을 빼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너 그러다가 그냥 지나치겠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하철 노선도를 확인하며 말했다. 헉, 그러고 보니 지금 진입하고 있는 정거장이 내가 내릴 역이였다. 부랴부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정신없이 나와 성우는 지하철을 내렸고 급하게 한숨 돌렸다. 아, 고마워.. 제 어깨에 걸쳐진 에코백을 고쳐 메며 성우에게 말했다. 성우는 내가 좋아했던 그 웃음을 지으며 뭘 또 이런걸로, 라며 쑥스러운지 제 뒷목을 만지작 거리다가 가자며 턱짓으로 말한다. 내가 사는 하숙집과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성우의 자취방 때문에 우리 둘은 지금 이전과 다름없이 발걸음을 맞추어 걷고 있다. 크게 어색하거나 낯설지난 않았다. 다만 그때와는 다르게 우리 둘의 손은 갈피를 잃었다. 그저 생각없이 휘적 휘적 걷다가 어쩌다 맞닿은 서로의 손에 흠칫 놀라며 성우는 주머니에 제 손을 집어 넣었다. 나도 당황함에 괜히 머리를 매만졌고. 웃기게도 이런 모든 현실이 나의 마음이 울렸다. 아직은 내 손 안에 성우의 온기가 가득 찬게 아니라 시린 바람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 낯설은 걸까, 성우는 제 백팩을 고쳐 메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뭐라도 말을 걸어야 겠다 싶어서 그 긴 정적 속에서 먼저 입을 뗐다. "잘 지냈어?" 나름 고심끝에 고른 멘트였는데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 지냈어라니, 잘 지냈으면 어떡할거고 못 지냈으면 어떡할건가. 혼자 속으로 제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데 옆에서 나와 발을 맞춰 걷고 있던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별로" 예상 밖의 대답에 고개를 올려 성우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그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근데 이제 잘 지내보려고" ".." "넌" 넌 잘 지냈어? 성우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저을 뻔 했다. 하나도 잘 지내지 못했어, 내 일상 속에 너가 너무 많이 박혀있어서 그거 하나하나 다 무시하려고 난 너무 힘들었다고 나도 모르게 투정을 부릴 뻔 했다. 예전처럼 내 투정에 그랬어? 걔가 나빴네 라며 내 편을 들어줄 너가 없어서 나는 혼자 싸우고 지고를 반복했다고. "..난 뭐 그냥 그렇지" 그래서 그냥, 이라는 말로 내 상황을 꽤나 좋게 포장해보았다. 우리가 만난 시간만큼 헤어지는 시간도 필요한 거 잖아, 이 어색함이 당연한 거다. "못 온다며 어떻게 왔네" "아 대머리되기 싫어서" 성우는 예전처럼 장난스레 웃으며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성우의 자취방과 내 하숙집 가는 길이 갈리는 골목 앞에 다다르고 우리 둘은 서서히 걷는 속도를 줄여갔다. 나는 그렇게 이 골목 앞에서 헤어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성우는 몸에 습관으로 배어 있는지 자연스럽게 하숙집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리라는 주체는 똑같은데 이 모든게 달라져 있구나 성우 모르게 그의 옆모습을 올려다 보고는 역설적이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너는 저 까만 눈으로 무엇을 그리도 생각하고 있을까 "다 왔다" "..아, 안 데려다 줘도 되는데 고마워" "뭘 이게 고마운 일이라고" 성우는 자신의 뒷 목을 민망하다는 듯이 살짝 만지더니 올라가 보라고 고갯짓을 했다. 내 하숙집 앞에 서있는 성우의 모습이 너무나 오랜만인데 그게 너무 익숙해서 살짝 멍하니 있다가 이내 그에게 답했다. 응, 잘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나를 잡는 성우의 목소리. "ㅇㅇ야" "어?" "우리 친구하자" 그의 뜬금없는 말에 내딛던 한 발을 다시 내려놓고는 성우를 돌아 보았다. 어두운 밤 하늘에 깜빡거리는 가로등만이 너와 나를 비추었다. "아까 애들한테도 말했잖아. 우리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고." ".."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냥 남남이 되겠냐" 알고 지낸 시간이 그렇게 긴데, 성우는 제 바지에 손을 쓱쓱 닦더니 내 눈 앞에 그의 손을 건넨다. 그러니까 우리 이번에는 그냥 친구하자, 친구는 처음이잖아! 씨익 웃으면서 건넨 손을 흔들며 대답을 재촉하는 옹성우를 그저 멍하니 올려다 보다가 주춤거리며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웃기게도 너와 처음 손을 잡은 날이 생각났다. 성우야 넌 나랑 친구할 자신이 있어? 내 방으로 올라와 얼빠진 상태로 한참을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무엇에 홀리듯이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여니 여름 밤 바람과 함께 성우의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우리가 아까 헤어진 그 자리에서 성우는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성우야, 연인과 친구는 한 끗 차이래. 친구하자는 그의 말에 악수를 하며 그러자 하고 웃은 나를, 아니 우리를 떠올렸다. 띠링- ㅇㅇ야 잘자!!!!!!!!!!!!!!!!! ? -오후 11:30 번호를 지워 수신자 이름이 뜨지는 않지만 이 익숙한 번호는 옹성우였다. 휴대폰을 보던 눈을 떼서 다시 창문 밖 성우에게 걸쳤다. 발랄한 문자와는 다르게 그의 뒷 모습은 꽤나 쓸쓸해보였다. 이것 또한 나의 과한 주관적인 해석일까, 마침내 성우가 발을 떼 앞으로 걸어가는 걸 눈으로 좇다가 창문을 닫았다. 휴대폰을 들어 지워진 번호를 다시 저장했다. 예전처럼 옹청이, 혹은 남자친구가 아닌 그냥 옹성우로. 너도 잘자! -오후 11:35 모든게 익숙하면서 낯선 순간들을 받아 들이며, 언젠가는 너와 아무렇지 않게 마주볼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내 복잡한 마음은 나조차도 쉽게 정의내릴 수가 없었다.
더보기 |
안녕하세요! 염치없는 작가입니다! ㅠㅠ 너무 늦었죠ㅠㅠㅠ 그런데 아마도 올해 말까지는 이렇게 늦게나마 인사드리게 될 거 같아요ㅠㅠㅠ 휴재할 생각은 없지만 빠른 연재는 지금 제 상황 상 자신이 없어요ㅠㅠㅠ 그래서 항상 죄송하고 또 죄송해요ㅜㅜ... 암호닉도 아직 따로 챙겨드리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해요ㅜㅜㅠㅠ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 글을 사랑해주셔서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요ㅠㅠ 으앙... 가끔 독방에서 성우랑 헤어진 글, 이렇게 제 글을 설명해주시는 분들 너무 기여워서 저는 밤잠 설쳐요.... 따흑흑.... 혐생에 치여서 애들 떡밥도 미뤄지고 진짜 덕질에 현생이 방해되는게 팩트..... 성우 시점을 가지고 오려다가 아직 성우의 감정을 열 타이밍이 아닌 거 같아서 오래 고민했슴다... 뭐 이러다가 갑자기 끌리면 쓱 갖고오겠져.. ? 처음이라서 너무 서툴고 모자란 글을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ㅠㅠㅠ???이거 뭐 너무 맥락없는 아무말 같은데 하이튼 정말 하루하루가 행복해요ㅜㅠㅠㅠ 기다려주셔서 또 고맙고 말도 다들 이쁘게 해주셔서 고마워요ㅠㅠㅠㅠ 우리 독자님들이 제일 아름다울거에요ㅠㅠㅠㅠ 끄앙 bgm; 가을방학-이브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