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면 지는거야
W. 7777
A
1. 치여버렸다
새학기의 첫 날, 서로의 반을 확인하며 환호와 탄식으로 가득찬 복도 한가운데 멈춰선 김여주는 확신했다.
아, 또 치였다.
2. 김여주라 쓰고 박애주의자라고 읽자
김여주의 갤러리 폴더에는 기본적으로 있는 카메라와 다운로드 폴더를 포함하여 각자 다른 이름을 가진 15개의 폴더가 존재했다. 아이돌부터 배우까지. 드라마든 음악방송이든,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한 순간. 그 순간 눈에 꽂히는 한 사람. 소위 덕질이란 것을 하는 이라면 이런 순간을 흔히 '치인다'고 표현하지. 보통 그룹이든 개인이든, 하나 혹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만 파는 친구들과는 달리 여주에겐 그 '치임'의 순간이 조금 잦을 뿐이었다.세상에 잘생기고 귀엽고 이쁜 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한 놈만 좋아할 수 있는가.
"이번엔 또 누군데."
최민기는 또, 를 유독 강조하며 물었다. 그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야 있어봐, 내가 맞춰본다. 요새 잘생겼다고 난리난 걔? 이름이 뭐였더라...
"아이돌 아닌데."
"아 그럼 요새 드라마 하는..."
"연예인 아니다."
아아, 그 배구선수? ㅇㅇㅇ?
"현실 사람이야."
"구라 즐."
"진짜다. 15명 모두를 걸고."
여주의 표정은 몹시 진지했다. 완전 진심이라니까.
민기는 이젠 감도 안 잡힌다는 얼굴이었다. 뭐, 설마 우리 학교는 아니지?
"응 맞아."
우리반 황민현.
3. 입덕의 순간
그래, 그 새학기의 첫 날. 여주는 2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최민기가 자신과 다른 반이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섭섭해하며 3학년 층 복도에 들어섰다. 2학년 층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반을 확인하는 아이들로 복작거리는 와중에, 복도 저 편의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우리 학교 남자애라기엔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단정한 뒤통수.
여주는 머릿속에서 학교에서 키 좀 크다싶은 아이들의 얼굴을 잠시 재생해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못 보던 앤데?
어쩐지 주변 애들의 시선이 묘하게 저 애 한테 쏠려있더라니.마침 여주가 배정받은 4반 앞에 서 있길래 같은 반인가보다, 하는데.
와 씨발.쟤 누구야 대체?
나 지금 그거 하는 것 같은데..?그거, 그 있잖아. 사랑..? 그거 하게 된 것 같은데?
4. 사람 일이란
여주의 기준은 객관적인 편에 속했기에, 모두들 처음 보는 잘생긴 애의 등장에 관심이 쏠린 듯했다. 여주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복도에 서 있는 그 애를 보다가,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친하든 말든 2년 내내 마주치던 그 얼굴들이었지만 새삼 반가운 척 몇몇과 인사를 나누고는 창가쪽 빈자리에 앉았다.
복도 쪽 창문으로 아까 그 애를 보려는데,
눈이 마주쳤다.
뭐머머멈머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다른 곳을 본 척했다. 그렇지 않아도 앞에 앉아있던 애들은 모두 저 처음보는 잘생긴 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주는 추측성일 뿐일 영양가없는 말들을 흘러들으며 생각했다. 사실 마음속으로 요란하게 입덕했다고는 해도, 현실 같은 반 친구를 연예인 덕질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여주는 덕질에 있어 자신은 철저한 새우젓 한마리일 뿐이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기에, 오히려 저 애와는 친해져야 겠다는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여주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에 예쁘게 정렬된 폴더의 이름들를 쭈욱 흝었다. 그리고 어제 저장했던 사진들을 다운로드 폴더에서 옮기는 것에 신경을 쏟는다고 그 잘생긴 애가 제 쪽으로 걸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 일이라는게,
"안녕 여주야. 오랜만이다."
모르는 거라서.
5. ???
??????????
"어...?"
가까스로 한 마디를 내뱉었지만 들고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이거 뭐야...? 뭐야 이거...?
반 애들의 시선은 이쪽으로 쏠린지 오래였고, 여주는 벙찐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였다.잘생긴 애는 멍청해진 김여주의 얼굴을 보더니,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 모르나보네."
그러더니 비어있던 옆자리에 앉는다.이거 뭐냐니까...?
여주는 손에 있던 핸드폰을 책상 서랍에 조심히 집어넣고 차분히 생각했다. 얘는 누구지? 처음보는 앤데. 근데 잘생겼는데? 그럼 내가 모를리가 없는데?
앞을 보고 반듯하게 앉았던 잘생긴 애가 다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여주는 흠칫 놀랐고,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잘생긴 애가 또 웃으며 묻는다.
"진짜 모르겠어?"
그제서야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황민현.
?황민현?
"황민현?"
6. 너무나 클리셰
민현은 여주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너 키가...."
"얼굴이...""너 무슨 일이 있었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엄마!!!!!"
여주는 현관문을 요란하게 닫으며 엄마를 불러제꼈다. 엄마! 그, 그그....!
"어머, 여주야 오랜만이다~"
"아이고 왜 또 난리야. 인사해, 너 어릴 때 민현이 기억나지? 민현이 엄마."
이쯤되면 자신만 빼고 다 짜고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만 말을 안해주는 거야?
어릴 때 보았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중년의 여성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면서 황민현의 이름부터 소리치지 않은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여주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ㅎㅎ..안녕하세요...
아, 까마득하다. 몇년만이지. 그래봤자 고등학생인 지금이었지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서로의 집에서 하루종일 같이 놀았던 그 애. 지방으로 이사가는 바람에 어느 순간 연락도 끊겼었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나타나서 나를 치고 갈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