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무덤 03 서울 시내 크게 올라선 두 개의 고층 건물엔 '재상' 두 글자가 크게 달려있었다. 시끄럽게 움직이는 건물의 밝은 모습은 호원이 풍기는 어두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중간층까지는 일반 사원이 업무를 보았다. 재상이 단순한 대기업임을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엘리베이터 위로 적힌 숫자가 커질수록 고요해졌다. 그제야 멍했던 정신을 차렸다. 호원이 고개를 털었다. 32층.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휑한 복도를 걸어가 금을 칠한 손잡이를 돌렸다. 거대한 유리를 뚫고 햇볕이 방을 비췄다. 고층 건물의 전경은 고요했다. 가만히 새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제원이 뒤를 돌았다. 호원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제원을 포함해 이창식, 한 철은 재상을 이끄는 주요 인물에 속했다. 위치에 걸맞게 쉽게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많았다. 개인에게 속한 킬러는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그들을 지키는 킬러가 존재했다. 창식은 그의 아들인 재환을 밑에 두었다. 단순히 돈으로 유지 시키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끈끈해질지언정 배신을 없을 것이었다. 불안감을 느낀 철은 호원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호원도 그것에 순순히 수긍했다. "조만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제원에겐 제 곁을 보좌하는 비서도 신뢰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새 사람이 필요했다. 호원은 제원을 철만큼 따랐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더 충성했다. 그를 위해 새 사람을 찾는 것을 기꺼이 함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최선인가. 피곤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실력은 물론 신뢰하기에 괜찮은 사람입니다. 호원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빨리. 제원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그대로 방을 나온 호원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 이사는 어디에 두고 여기 계십니까." 방긋 웃는 얼굴의 재환이 가볍게 목인사를 건넸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호원이 재환의 발에 맞춰 옆자리에 섰다. 빨간 숫자는 끝없이 올라갔다. 재환도 꽤 키가 큰 편임에도 호원과 상당히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의 셔츠가 대조되어 거울에 비췄다. "요즘 같은 겨울엔 하얀 셔츠는 차가워 보입니다." 그런가. 호원이 무심하게 받아쳤다. 재환도 호원도 적지 않은 나이었다. 그만큼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다. 처음 아버지를 돕겠다며 들어왔던 재환은 아이였다. 자라며 총을 배우고 조직을 알아가던 호원과는 달랐다. 그저 밝고 명랑했다. 초반에는 많은 것을 도와줬다. 총을 잡는 법, 죽음 앞에 냉정해지는 것까지. 의외로 재환은 쉽게 배우고 변했다. 창식의 아들임을 빠른시간에 증명했다. 다시 기계음이 들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끔은 그리웠다. 누구든 쉽게 친해지고 친절을 베풀었던 그의 모습이. 호원이 재환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어려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원래 싸가지가 없었는데 감추고 있었던 건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맞아 형님. 닫히려던 문 사이로 손이 튀어나왔다. 재환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접힌 호원의 셔츠를 바로 펴주는 친절을 보였다. 언제 한 번 같이 총 잡아야죠.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다시 떠난 재환을 붙잡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환은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숫자가 호원의 목적지에 다다르자 그제야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요즘은 친구 안 오네. 학연의 목소리가 퇴근하려 카운터를 지나가던 택운을 멈췄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복은 빛깔이 고왔다. 대답을 재촉하듯 고개를 꺾었지만 택운이 볼 리 만무했다. 뒤늦게 목소리를 내어 되물었다. 바빠요. 학연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쁘겠지. 학연은 원식에 대해 아무것도 듣질 않았다. 그저 그의 이름과 일을 유추할 순 있었다. 원식이 블룸에 오는 것을 목격한 몇 손님은 그의 행방에 물었다. 이유는 같았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무언갈 부탁하기 위해. 게다가 급하게 올 때 처리하지 못한 핏자국을 발견했었다. 재환과 비슷한가. 재상의 사람인가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든 일을 기억하곤 생각을 접었다. 재상의 사람은 꿰뚫고 있는 학연이 원식을 모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냥 떠돌이 킬러로 정의를 내렸다. 내일 봬요. 택운이 나갔다. 단순한 안마소였지만 새벽이 되면 바뀌었다. 꺼놨던 간판에 뒤늦게 불을 켰다. 말끔한 정장 위로 진한 향수를 뿌렸다. 재환도 다시 오기로 했으니 무척 바쁠 것이다. 예약 리스트를 빠르게 넘겼다. 예상했던 대로 길은 다시 얼었다. 아마 계단을 다 올라가기까지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럴 땐 앞을 못 본다는 게 서러웠다. 시간은 그렇다 치고 몸이 성한 채로 갈 순 있을까. 발을 계단 위로 올렸다. 미끄러져 다시 내려옴을 느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울 싫다…. "서비스 왔습니다." 입을 벌린 채 그저 멍하니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얼음보다 찬 누군가의 손이 택운을 일으켰다. 택운은 겁을 먹었다. 보이지 않았고 누군지 모를 낯선 사람이었다. 깊은 밤이라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원식이길 바랬지만 전혀 다른 고운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작은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혹시 콩 좋아하세요?" "네?" "좋아하죠? 이홍빈이에요. 줄여서 bean, 콩." "저, 저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셨네. 복제인간 신청하셨죠? 그 복제인간이 저예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머리를 연신 긁적였다. 일단 집으로 갈까요? 택운의 앞으로 향했다. 무릎을 굽혀 서 있는 택운을 그대로 제 등으로 업혔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택운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신청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보게 될 줄 몰랐다. 복제인간도 어찌 됐던 인간이었다. 성격도 생각도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많은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저와 비슷한 성격의 복제인간이 오길 바라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저 아침부터 계속 기다렸는데. 추위에 계속 떨었던 거 알아요? 감기 걸리겠어요. 아, 물론 걸리지는 않지만요." 도대체 왜. 목까지 올라왔던 욕을 눌렀다. 오랜만에 답답함을 느꼈다. 무거운 돌덩이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택운의 무반응에도 열심히 떠들던 홍빈이 걸음을 멈췄다. 집이 정확히 어디에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편하려고 신청한 것이 되려 화병을 불렀다. 택운도 몰랐다. 그저 계단 개수에 맞춰 집을 찾았을 뿐. 홍빈이 주변 모습을 설명해준다 한들 택운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열이나는 머리를 홍빈의 어깨에 떨궜다. "13-6번지." "설마 알아서 찾아가라는 소리는…." "졸려, 잘래." 홍빈의 앓는 소리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틈 없이 들어선 집들이 눈앞에서 멀어졌다. 모든 건물에 번지수가 적혀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든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 느릿한 숨을 느꼈다. 홍빈이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웃음기 많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잡고 있는 택운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엔 얼마나 갈까. 눈이 안 보이니 연구소로 데려가려나. 위험한 기억을 더듬었다. 어눌한 홍빈의 이름이 사방에 울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홍빈은 그저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보호했다. 9번째 주인이 자신을 만든 창조자들에 의해 끌려갔다. 여자는 애처롭게 오열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아무런 도움 요청도 하지 못했다. 머리채를 잡힌 채 드렁크에 넣어졌다. 어이, 가짜. 재환이 구석에 쭈그려 있는 홍빈을 불렀다. 이리 와. 저항을 했다간 자신의 존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순순히 불려갔다. 일어선 홍빈의 다리를 세게 쳤다. 그대로 고꾸라진 홍빈이 신음을 흘렸다. "i-06." 홍빈에겐 신분증과 같은 문자였다. 죽고 싶지 않지? 홍빈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카펫이 깔린 바닥은 어느새 눈물로 적셔졌다. 엉켜있는 먼지가 홍빈의 코를 간질였다. "네 주인이 짜증 나게 만들어서 죽어 줘야겠다." 가까이 다가온 총구는 망설임 없이 총알을 뱉었다. 눈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눈을 감지 못했다. 그대로 죽어 버렸다. 복제인간에게 심장과도 같은 칩이 남아 있다면 다시 재생되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칩이 남아 있지 않고 자동 소멸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행운을 빈다. 재환의 손에 목덜미가 잡혀 그대로 공장으로 향해졌다. 홍빈이 눈을 떴을 땐 좁은 트럭 안 이었다. 지독한 기억이 다시 시작됐다. 자신들은 이런 존재였다. 호의를 가장한 약탈. 복제인간들이 보살핀 장애인들은 잘 길러진 돼지와 같았다. 노인들은 생체 실험과 장기매매를 위해 사용됐다. 젊은 여성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팔려갔다. 그 사실은 유일하게 홍빈만이 알았다. 어째서 인지는 몰랐다. 그저 다른 복제인간과 다르게 전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돌연변이와 같았다. 재상에선 아직 그것을 몰랐다. 홍빈이 사실을 숨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소와 택운에 대해 적힌 쪽지를 넘겨받고 트럭에서 내렸다. 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주소가 적힌 곳으로 걸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렸다. 자신도 모르게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주인의 얼굴을 보면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쓰레기통 뒤에서 얼굴만 내밀었다.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만남이라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새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꽤 큰 키와 깡마른 몸에 놀랐다. 주저앉는 모습에 더 몸을 숨기고 있을 수 없었다. 주인을 도우려 몸을 일으켰다. 바보.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멀리서 고갤 든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 발끝에서 소름이 돋았다. 택운의 회색 눈동자가 홍빈을 흔들었다. 시큼한 신물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몸을 돌려 멀리 달렸다. 우윽. 신물을 연신 뱉었다. "젠장! 왜!" 심장이 자꾸 아렸다. 피를 흘리며 죽을 택운의 생각에 머리가 어질했다. 안 돼, 안 돼. 주문처럼 계속 읊조렸다. 두 마디가 감정을 어지럽혔다. 홍빈이 처음 느낀 사랑은 지독히 쓰고 아팠다.
나비무덤 03
서울 시내 크게 올라선 두 개의 고층 건물엔 '재상' 두 글자가 크게 달려있었다. 시끄럽게 움직이는 건물의 밝은 모습은 호원이 풍기는 어두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중간층까지는 일반 사원이 업무를 보았다. 재상이 단순한 대기업임을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엘리베이터 위로 적힌 숫자가 커질수록 고요해졌다. 그제야 멍했던 정신을 차렸다. 호원이 고개를 털었다. 32층.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휑한 복도를 걸어가 금을 칠한 손잡이를 돌렸다. 거대한 유리를 뚫고 햇볕이 방을 비췄다. 고층 건물의 전경은 고요했다. 가만히 새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제원이 뒤를 돌았다. 호원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제원을 포함해 이창식, 한 철은 재상을 이끄는 주요 인물에 속했다. 위치에 걸맞게 쉽게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많았다. 개인에게 속한 킬러는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그들을 지키는 킬러가 존재했다. 창식은 그의 아들인 재환을 밑에 두었다. 단순히 돈으로 유지 시키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끈끈해질지언정 배신을 없을 것이었다. 불안감을 느낀 철은 호원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호원도 그것에 순순히 수긍했다.
"조만간 데리고 오겠습니다."
제원에겐 제 곁을 보좌하는 비서도 신뢰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새 사람이 필요했다. 호원은 제원을 철만큼 따랐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더 충성했다. 그를 위해 새 사람을 찾는 것을 기꺼이 함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최선인가. 피곤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실력은 물론 신뢰하기에 괜찮은 사람입니다. 호원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빨리. 제원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그대로 방을 나온 호원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 이사는 어디에 두고 여기 계십니까."
방긋 웃는 얼굴의 재환이 가볍게 목인사를 건넸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호원이 재환의 발에 맞춰 옆자리에 섰다. 빨간 숫자는 끝없이 올라갔다. 재환도 꽤 키가 큰 편임에도 호원과 상당히 차이가 났다. 두 사람의 셔츠가 대조되어 거울에 비췄다.
"요즘 같은 겨울엔 하얀 셔츠는 차가워 보입니다."
그런가. 호원이 무심하게 받아쳤다. 재환도 호원도 적지 않은 나이었다. 그만큼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다. 처음 아버지를 돕겠다며 들어왔던 재환은 아이였다. 자라며 총을 배우고 조직을 알아가던 호원과는 달랐다. 그저 밝고 명랑했다. 초반에는 많은 것을 도와줬다. 총을 잡는 법, 죽음 앞에 냉정해지는 것까지. 의외로 재환은 쉽게 배우고 변했다. 창식의 아들임을 빠른시간에 증명했다. 다시 기계음이 들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끔은 그리웠다. 누구든 쉽게 친해지고 친절을 베풀었던 그의 모습이. 호원이 재환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봤다. 어려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원래 싸가지가 없었는데 감추고 있었던 건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맞아 형님. 닫히려던 문 사이로 손이 튀어나왔다. 재환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접힌 호원의 셔츠를 바로 펴주는 친절을 보였다. 언제 한 번 같이 총 잡아야죠.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대로 다시 떠난 재환을 붙잡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환은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숫자가 호원의 목적지에 다다르자 그제야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요즘은 친구 안 오네. 학연의 목소리가 퇴근하려 카운터를 지나가던 택운을 멈췄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복은 빛깔이 고왔다. 대답을 재촉하듯 고개를 꺾었지만 택운이 볼 리 만무했다. 뒤늦게 목소리를 내어 되물었다. 바빠요. 학연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쁘겠지. 학연은 원식에 대해 아무것도 듣질 않았다. 그저 그의 이름과 일을 유추할 순 있었다. 원식이 블룸에 오는 것을 목격한 몇 손님은 그의 행방에 물었다. 이유는 같았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무언갈 부탁하기 위해. 게다가 급하게 올 때 처리하지 못한 핏자국을 발견했었다. 재환과 비슷한가. 재상의 사람인가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든 일을 기억하곤 생각을 접었다. 재상의 사람은 꿰뚫고 있는 학연이 원식을 모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냥 떠돌이 킬러로 정의를 내렸다. 내일 봬요. 택운이 나갔다. 단순한 안마소였지만 새벽이 되면 바뀌었다. 꺼놨던 간판에 뒤늦게 불을 켰다. 말끔한 정장 위로 진한 향수를 뿌렸다. 재환도 다시 오기로 했으니 무척 바쁠 것이다. 예약 리스트를 빠르게 넘겼다.
예상했던 대로 길은 다시 얼었다. 아마 계단을 다 올라가기까지 최소 한 시간은 걸릴 것이다. 이럴 땐 앞을 못 본다는 게 서러웠다. 시간은 그렇다 치고 몸이 성한 채로 갈 순 있을까. 발을 계단 위로 올렸다. 미끄러져 다시 내려옴을 느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겨울 싫다….
"서비스 왔습니다."
입을 벌린 채 그저 멍하니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얼음보다 찬 누군가의 손이 택운을 일으켰다. 택운은 겁을 먹었다. 보이지 않았고 누군지 모를 낯선 사람이었다. 깊은 밤이라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원식이길 바랬지만 전혀 다른 고운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작은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혹시 콩 좋아하세요?"
"네?"
"좋아하죠? 이홍빈이에요. 줄여서 bean, 콩."
"저, 저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셨네. 복제인간 신청하셨죠? 그 복제인간이 저예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머리를 연신 긁적였다. 일단 집으로 갈까요? 택운의 앞으로 향했다. 무릎을 굽혀 서 있는 택운을 그대로 제 등으로 업혔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택운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신청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당황스러운 상황으로 보게 될 줄 몰랐다. 복제인간도 어찌 됐던 인간이었다. 성격도 생각도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많은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저와 비슷한 성격의 복제인간이 오길 바라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저 아침부터 계속 기다렸는데. 추위에 계속 떨었던 거 알아요? 감기 걸리겠어요. 아, 물론 걸리지는 않지만요."
도대체 왜. 목까지 올라왔던 욕을 눌렀다. 오랜만에 답답함을 느꼈다. 무거운 돌덩이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택운의 무반응에도 열심히 떠들던 홍빈이 걸음을 멈췄다. 집이 정확히 어디에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편하려고 신청한 것이 되려 화병을 불렀다. 택운도 몰랐다. 그저 계단 개수에 맞춰 집을 찾았을 뿐. 홍빈이 주변 모습을 설명해준다 한들 택운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열이나는 머리를 홍빈의 어깨에 떨궜다.
"13-6번지."
"설마 알아서 찾아가라는 소리는…."
"졸려, 잘래."
홍빈의 앓는 소리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틈 없이 들어선 집들이 눈앞에서 멀어졌다. 모든 건물에 번지수가 적혀있는 것도 아니었다. 잠든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 느릿한 숨을 느꼈다. 홍빈이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웃음기 많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잡고 있는 택운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엔 얼마나 갈까. 눈이 안 보이니 연구소로 데려가려나. 위험한 기억을 더듬었다.
어눌한 홍빈의 이름이 사방에 울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홍빈은 그저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을 보호했다. 9번째 주인이 자신을 만든 창조자들에 의해 끌려갔다. 여자는 애처롭게 오열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아무런 도움 요청도 하지 못했다. 머리채를 잡힌 채 드렁크에 넣어졌다. 어이, 가짜. 재환이 구석에 쭈그려 있는 홍빈을 불렀다. 이리 와. 저항을 했다간 자신의 존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순순히 불려갔다. 일어선 홍빈의 다리를 세게 쳤다. 그대로 고꾸라진 홍빈이 신음을 흘렸다.
"i-06."
홍빈에겐 신분증과 같은 문자였다. 죽고 싶지 않지? 홍빈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카펫이 깔린 바닥은 어느새 눈물로 적셔졌다. 엉켜있는 먼지가 홍빈의 코를 간질였다.
"네 주인이 짜증 나게 만들어서 죽어 줘야겠다."
가까이 다가온 총구는 망설임 없이 총알을 뱉었다. 눈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눈을 감지 못했다. 그대로 죽어 버렸다. 복제인간에게 심장과도 같은 칩이 남아 있다면 다시 재생되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칩이 남아 있지 않고 자동 소멸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행운을 빈다. 재환의 손에 목덜미가 잡혀 그대로 공장으로 향해졌다. 홍빈이 눈을 떴을 땐 좁은 트럭 안 이었다. 지독한 기억이 다시 시작됐다. 자신들은 이런 존재였다. 호의를 가장한 약탈. 복제인간들이 보살핀 장애인들은 잘 길러진 돼지와 같았다. 노인들은 생체 실험과 장기매매를 위해 사용됐다. 젊은 여성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팔려갔다. 그 사실은 유일하게 홍빈만이 알았다. 어째서 인지는 몰랐다. 그저 다른 복제인간과 다르게 전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돌연변이와 같았다. 재상에선 아직 그것을 몰랐다. 홍빈이 사실을 숨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소와 택운에 대해 적힌 쪽지를 넘겨받고 트럭에서 내렸다.
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주소가 적힌 곳으로 걸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렸다. 자신도 모르게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주인의 얼굴을 보면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쓰레기통 뒤에서 얼굴만 내밀었다.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만남이라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새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꽤 큰 키와 깡마른 몸에 놀랐다. 주저앉는 모습에 더 몸을 숨기고 있을 수 없었다. 주인을 도우려 몸을 일으켰다. 바보.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멀리서 고갤 든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 발끝에서 소름이 돋았다. 택운의 회색 눈동자가 홍빈을 흔들었다. 시큼한 신물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몸을 돌려 멀리 달렸다. 우윽. 신물을 연신 뱉었다.
"젠장! 왜!"
심장이 자꾸 아렸다. 피를 흘리며 죽을 택운의 생각에 머리가 어질했다. 안 돼, 안 돼. 주문처럼 계속 읊조렸다. 두 마디가 감정을 어지럽혔다. 홍빈이 처음 느낀 사랑은 지독히 쓰고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