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윤이 자신만의 강승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가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사실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 오래 걸렸을 뿐, 받아들이고나니 오히려 나머지는 쉬웠다. 시간이 물 흐르듯 갔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 묘해서 힘을 빼고 가만히 손을 시간의 물결에 맡기면 시간이라는 것은 언제 제 손에 쥐여졌냐는 듯 손을 간질간질 흐트리며 이리저리로 잔뜩 구불대며 흘러나아간다. 강승윤에 대하여 무언가를 정확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강승윤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백하는 여자애들이라던가 인기같은것들이 떠올라서 머리를 휘젓고 마음을 휘저었다. 더이상은 수용범위 불가였다. 그래서 놓아버렸을런지도 모른다. 마음이 아닌 시간을, 귓가로 잔뜩 흘러 들어오는 정보들을 모른척,아무것도 해당사항이 없는 척. 조용히.
이대로, 이렇게 물 흐르는 듯이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이 감정 역시 시간이라는 물결을 타서 흘러가 버리지않을까, 그런 못난 마음 때문에.
발을 디디는데에도 땅에 제대로 닿는 것 같지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으니 너무 편안하고 안락한데에도 덕분에 나는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었다. 치열하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식으로 어떻게든 나아가야 하는데. 나는 줄곧. 강승윤이 학생회장이 된 이후에도 학생회장이 발표되었었던, 까만 그늘이 덮인 귓가가 서늘할만큼 바람이 불었던, 그. 짙은 모래위에서 아직도 발을 딛고 있었다. 나는 멈춰있었다.
"아,아! 집중! 야 이 반은 마이크 왜 이리 안 나오냐. 아무튼간 2학기는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 시작하도록 하자. 수학 A반이면 A반 답게 이 자리 계속 지켜나가야 될 것 아니냐,응?"
-야, 강승윤이야!
-어머, 진짜네? 쟤 저번엔 b 반 아니었어?
-아슬아슬하게 a반 떨어졌었잖아. 올라온거지
어쩜··,라며 손거울을 꺼내고 꼬리빗으로 머릿칼을 정리하거나 비비를 다시 바르는 여자애들. 여전히 눈에 보는 것을 안 보이는 척, 귀에 들리는 것을 들리지 않는 척 하는 것은 힘들었다. 꽤나 선명해진 정신을 억지로 뭉개버린 후 다른 쪽으로 흐트러버렸다. 새로 부임하신 수학 쌤이었나. 열의는 넘치지만 그만큼 가르치는 것이 따라오지 못한다는, 꽤나 열의가 있는데다가 시끄럽게 친한 애들이 떠드는 것이 싫어서 짝을 제비뽑기로 뽑게 만든다는-그,
"음, 이 반에 어디보자. 강승윤? 학생회장이 a반이야? 거 참 녀석 공부도 잘하고. 앞으로 나와봐. 잘 됐네. 칠판에 제비뽑기 결과는 네가 적는다."
밝은 빛을 띈 까만눈.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가지런한 발걸음. 여유롭게 짓는 미소라던가 환영하는 여자애들의 소음에도 두손을 쫙 편채 위를 향해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환호를 계속 이끌어내는 제스쳐 한자락 한자락. 어이없게도 그런 것 마저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을 식히기 바빠서, 사실 이렇게 두근거리면 안된다는 것 조차 잊어버렸다.
"일단, 강승윤 너부터 뽑아봐."
음··이라며 티 날 정도로 소리를 내며 강승윤은 미간을 좁히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선 하얀 종이 무더기를 바라보며 덩실덩실 오른쪽 왼쪽으로 정신 사나울정도로 검은 빛머리를 부스스하게 휘날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정신 사나워 임마! 라며 꿀밤을 먹이는 선생님에 아랑곳 않고 배시시하고 마저 웃으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채로 이얍! 하며 패기있게 종이를 뽑는 모습에 모두들 웃어버렸다.
"우왓, 13번이다! 13번~13번~"
"불길하게도 13번이냐? 13일의 금요일 몰라?"
"에이 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요"
능청스럽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짓지 않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줄을 서서 제비를 뽑으면, 바로 앞에서 강승윤이 그 제비를 받아 확인하고는 칠판 위에 분필로 번호를 기입한다. 그것을 상상하자, 도무지 설레이는 마음을 참느라 웃을 새도 없어서는, 괜시리 숨을 참으려 새하얗고 세찬 공기를 흡 하고 마시다가 뱉는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했다.찰나와 같이 지나가는 그저 순간일 뿐이더라도, 그것마저도 좋다며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길다고 생각한 줄은 의외로 짧았다. 사실 길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강승윤과 자신의 거리일지도 모르련다. 앞에 있는 여자애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강승윤에게 제비를 건네주었다. 푹 숙인 고개. 붉게 달아오른 뺨. 자신 조차도 저 앞에 서면 저렇게 되는걸까? 그 모습이 꼴사납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신 역시 아니라는 보장은 없어서 괜시리 더 떨려만왔다.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억지로 사붓이 눌렀다. 뛰지, 않았으면 좋겠다.
"18번이야"
부끄럽게 고개를 잔뜩 숙인 여자애에게로 강승윤이 다가가 웃음지으며 말했다. 창문 너머로 부숴지는 금빛의 햇빛. 교실 위 에어콘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팔랑이듯 섬세하게 교실을 휘젓는 바람.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남자와 남자가 아닌 여자와 남자.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 했다가 도리어 자신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놓았다고 생각했지만서도, 역시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강승윤의 옆에 선다는 것은 싫었다. 동양화에 그려진 것 같이 잘생긴 소년이 칠판 위 마저 노란색 분필로 번호를 적는다. 18.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그 그림사이에 오점이 있다면 여자아이가 뽑은 번호는 강승윤 옆자리가 아니라는 것. 제비가 다 뽑혀져가는 순간에도 기이하리만큼 채워지지 않는, 강승윤의 옆자리. 14번.
"후우.."
어느덧, 제 차례가 왔다. 가다듬은 숨을 잔뜩 뱉으며 남은 여러 종잇조각을 들추며 부들부들거리는 손으로 하얀 종잇조각을 하나 뽑았다. 숨결조차도 두근두근 떨리는 것만 같아서 잘 조절할 수가 없었다.
강승윤에게 건네지며 스치듯 닿은 손. 바로 앞에 있다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야 마주 본 얼굴은 잔뜩 빛이 났다. 고운 혈색으로 인해 고운 두 뺨. 핏줄이 조금 불거진 남자다운 까칠한 손. 아무렇지않게 제가 건낸 종잇조각을 받은 손이 종잇조각을 들췄다. 바로 앞. 3cm도 안되는 거리에서 강승윤이 있다. 강승윤의 손, 얼굴. 무엇이고간에 머릿속에 빠짐없이 집어넣기 위하여 집중했다.
···14. 들춰진 종이에 써있는 숫자는 바라마지않던 두글자였다. 두근거리는 순간,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
강승윤x남태현 본투스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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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옆에, 강승윤이 앉아있다. 까맣고 비슬비슬한 머릿칼을 가진 훤칠한 소년. 옆으로 슬쩍,하고 고개를 돌려 강승윤을 보다가.다시 책상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게 올라간 분홍빛 입꼬리. 입꼬리만큼이나 햇빛에 젖어 발간 뺨. 열심히 공책으로 칠판 위 공식을 적어나가는 모습에 얼굴에 밀려오는 열을 막으려 찬 두 손으로 뺨을 가득 쥐었다. 흘낏 본 상태에서조차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자꾸만 숨을 뱉게 된다.
"후우.."
"야,야 저기-야."
툭툭, 아무렇지 않게 강승윤이 제 책상을 샤프로 건들이며 말을 붙인다. 자신은 말을 붙일래도 몇번이나 곱씹었던 과정을 강승윤은 무심하게 단번에 해낸다. 그럼에도, 이 과정이 꿈만 같아서 눈을 끔벅 떼었다 붙였다. 그대로다. 아까처럼 흘깃 본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미소를 아직도 띄우고 있는 얼굴. 저도 모르게 태현은 오른손을 꾹꾹 말아쥐어서 손바닥 안에 손톱 자국을 새겼다.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다. 정신 차려야지,남태현.
"뭐야. 그렇게 손 험악하게 쥐고그래애. 나도 우리만 남자끼리 앉은거라 좀 눈치보이는데 친하게 지내자.응?"
응?응?응?으응응??강아지같은 눈 웃음을 치며 매달려오는 강승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비글 같이 애교를 부리며 머리를 슬쩍 기대오며 제 팔을 손으로 잡아오는데 밑으로 보이는 꽤나 남자답게 빠진 목선이라던가 아니면 까슬까슬하고 여러 터진 구석이 있는 붉은 힘줄이 살짝 솟은 손이 눈에 자꾸만 들어왔다. 눈을 강승윤에게 고정시킬 수가 없다.
무언가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태현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싫어하는게 아니라 좋아하는거야!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갈 것만 같은 이 심정을 어떻게해야하나. 아. 두말 않고 이 자리에서 녹아 사라지고싶다. 태현은 고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