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변절자
주위에선 내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다독여주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눈빛이 보이는 것은 내 자격지심인가. 나는 내게 묻는다. 정말 어쩔 수 없었느냐고. 절실한 상황이었다면 공사판에 들어가 막노동을 하든 고깃집에서 서빙을 하든 했을 것인데, 과연 친일파 집에 들어가 과외를 해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냐고.
누군가 나에게 반도인의 양심과 변절자의 안락 중 하나를 택하라 하면, 나는 이미 그 저택 안으로 들어선 순간 택한 것이다.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기로.
시급이 5천엔이다. 한달이면 밀린 월세를 한번에 내고도 적금까지 들 수준이다. 아무리 대학 이름이 있다지만 고작 사범대 학생에게. 처음부터 어딘가 캥기는 부분이 있긴 했다. 그런 좋은 자리라면 조선으로 스며들어온 일본인 대학생들도 줄을 설 텐데. 그래서 처우에 대한 별 기대는 없었다. 또한 가르치게 될 학생이 유별나지 않으리란 것 쯤은 짐작했다.
저택 내부를 관리하는 사람만 해도 셋. 일본인 가정부가 눈인사를 하더니만 2층에 방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자기 할 일 하는 것이 마치 새로운 과외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한 느낌이다.
─ 처음엔 과외 시간만 채워주고 가셔도 좋아요. 일단 쇼지랑 친해져야 하니까. 올해 스무살이고, 이번 센터 시험에서 별 문제 없을 정도로만 봐주면 돼요. 부담 갖지 말고.
스가타 쇼지. 스가타 가문은 일제 당시 군수용품 생산업계에 신예로 등장한 집안이었다. 제국주의가 철폐되고 난 후에는 중공업 회사로 탈바꿈하여 승강기니 자동차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지만, 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았다. 조선인의 등골을 쳐먹으며 소생한 그 집안은 온전히 조선 혈통이라는 것을.
2층에 올라가자 1층과 마찬가지로 대리석 바닥이 쭉 뻗어있는 복도에 방들이 여럿 있었다. 문이 다 닫혀있는 탓에 섣불리 열어보지도 못하고 기웃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회색빛의 문이 열리더니 키 큰 남자가 비틀대며 나왔다.
샴푸 냄새인지 뭔지 하는 어떤 향과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조그만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높은 콧대로 음영이 짙은 게 동양인보다는 서양인 느낌이었다.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침착히 인사를 건네려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무시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 잘.
"안녕하세요. 스가타 씨."
들은 체는 커녕 고개도 돌아보지 않는다. 계속 나아가던 그는 어지러웠는지 계단과 2층 바닥 사이에 설치된 울타리를 양손으로 잡고선 기대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서서는 일본어로 말했다.
"오늘부터 새로 과외를 맡았습니다. 아사코 유즈키라고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벽 한 쪽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통 대답이 없었다. 만취한 사람에게 뭘 바랄까. 착잡한 마음에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잠자코 지켜보다 이 상황을 뭘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서 과외를 꽂아주었던 선배에게 연락하려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짙은 쌍꺼풀, 별로 좋아보이는 표정은 아닌데 안어울리게 말아올라간 입꼬리. 내게 닿는 눈빛은 흐렸어도 이어지는 목소리는 선명했다.
"조선말로 해. 조센진답게."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와이셔츠에서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흑색 메탈 케이스가 끼어져 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곧장 조선말로 바꾸어 대답했다.
"김여주라고 합니다."
그는 크게 웃더니만 담배를 하나 물었다. 실내인데, 여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 한마디에 정부에서 금지한 조선말 쓸 생각도 하고,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집에서 돈받고 과외할 생각도 하고, 욕심이 많아."
담배를 물고선 말해서 그런 건지, 아님 원래 말을 잘 못하는 건지 그가 내뱉는 일어는 조금 어설픈 느낌이었다. 사실 억지로라도 그냥 그런 것에 집중했다. 그의 말을 다 들어버리면 속이 따끔거릴 것 같아서.
"초면이라 말해주는 건데, 과외 받을 맘 없어. 그러니까 오지 마. 다음엔 꺼지라고 할 테니까."
끝까지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잡을 틈도 주지 않은 채, 물고 있던 담배만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버리고선 그대로 방에 들어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