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 1988 !
모두에게는 기억하고 싶은 어린 시절이 있다. 나 역시도 그랬고, 너 역시도 그랬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너에게 기억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한 조각 퍼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응답하라 ! 1988 !
"야 나 어때?"
"뭘 어때, 구려."
"아!! 죽을래 진짜?"
부는 바람이 슬슬 차가워지고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과일들이 맛있게 익어가는 10월의 어느 날. 그 어느 날도 나는 개같은 김도영의 시비에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왼손을 머리에 얹고 오른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나름 포즈를 취했는데 내가 입고 있던 청자켓의 등쪽 부분을 잡더니 그대로 뒤집어버린다. 순식간에 가려진 시야에 김도영을 향해 소리쳤다.
"태일이 형한테 네가 옷 훔쳐 갔다고 소리 지른다?"
"하? 해보던……"
"태ㅇ……!"
"하란다고 진짜 하냐? 돌았어?!"
진짜로 소리칠 생각이었는지 두 손을 입 옆에 대고 문태일을 부르려는 김도영의 입을 내 손으로 막아버렸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녀석의 키에 까치발로도 모자라 두 손을 높이 들어야 했지만 입을 막는 데는 성공했으니 됐다.
"아오 짜, 손 좀 씻고 다녀라."
"웬열? 아침에 씻었거든?"
"야 니들 뭐해? 버스 시간 늦었는데 안 뛰어?"
"뭐어?"
"아 진짜 문시민 너 때문에…!"
대문 앞에서 김도영과 한참 투닥거리고 있는데 맞은 편의 초록 대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보이는 이태용의 모습에 인사도 잠시, 귓전을 때리는 태용의 말에 하던 동작을 멈추고는 정류장을 향해 너 나 할 것 없이 힘차게 뛰었다. 중간중간에 어깨를 툭 치고 가는 김도영의 뒷모습에 이를 바득 갈았지만. 어릴 때부터 달리기나 배워둘걸.
힘들게 뛰고 또 뛰어 겨우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언제 집에서 나온 건지 뒷자리 창가 쪽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정재현에게 다가가 머리를 퍽 하고 쳤다.
"어떻게 너 혼자 갈 수가 있어?"
"왔어?"
"김도영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나를 버리고."
뭐? 방금 무슨 말 했냐? 언제 온 건지 내 옆자리를 차지한 김도영이 발끈한 듯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렸다.
"청자켓 예쁘다. 시민아."
"어? 진짜? 그치? 예쁘지."
"방금까지 정재현한테 화내던 사람 어디 갔을까."
아아, 맞다. 나 지금 정재현한테 화내고 있었지. 김도영의 말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니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고 있는 정재현의 낯에 내려던 화를 꾹 참았다. 저렇게 웃어버리면 화를 낼 수가 없잖아. 물론 정재현도 자기가 웃으면 내가 화를 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쟤가 제일 밉상이라니까?
"오늘 동혁이 첫 등교래."
"웬열? 동혁이 우리 학교야?"
"관심 좀 가져라. 태용이 동생인데."
"관심의 정도로 따지면 너보단 동혁이거든?"
"나도 너보다 동혁이거든?"
아, 전에 했던 말 취소다 취소. 제일 밉상은 역시 누가 뭐래도 김도영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한 눈에 봐도 낡아 보이는 교문을 지나쳐 남자 반과 여자 반으로 갈리는 중간 계단에서 헤어지기 전에 태용에게 슬쩍 물었다.
"동혁이 몇 반이야?"
"2학년 10반. 왜?"
"안 알려줄 건데?"
"뭐야 그게."
그럼 나중에 봐.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웃던 태용이와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계단에서 갈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나는 도시락을 손에 들고 잽싸게 반을 나와 2학년 층으로 향했다.
2학년 10반, 전학생의 소식은 빠르게 전교생에게 돈 것인지 10반 앞엔 많은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나는 그 좁은 틈새를 꾸역꾸역 헤쳐나갔다.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있는 도시락 통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동혁이의 얼굴이 보인다.
"동혁아!"
"어? 누나?"
많은 인파 속 안 그래도 작은 키의 내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손을 좌우로 방방 흔들어대며 큰 목소리로 동혁이의 이름을 부르니 나를 쳐다보는 건 동혁이 뿐만 아니라 반에 있던 아이들도 전학생의 얼굴을 보겠다고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받는 많은 이목에 급 창피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니 어느새 도시락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온 동혁이가 고개를 숙인 내 머리 위로 제 큰손을 얹힌다.
"왜 왔어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동혁이의 얼굴을 살피니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들고 씩 웃었다.
"밥 같이 먹으려고."
"밥 먹으러 가요."
내 어깨를 휘감은 동혁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조그만 게 어디서? 이런 말도 까먹지 않았다. 우리는 운동장 한 구석의 벤치에 앉아 무릎 위에 놓은 도시락통을 열었다. 통을 열자마자 보이는 꼬막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아빠 때문에 삼시 세끼 내내 꼬막만 먹게 생겼네. 아침에 꼬막 없인 밥 안 먹는다며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피워대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산물 냄새 폴폴 풍기는 내 도시락에 비해 불고기와 후라이까지 아주 번쩍번쩍한 동혁이의 도시락에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내 눈빛을 눈치챈 모양인지 내게 도시락통을 슬쩍 민다.
"같이 먹어요."
"어어? 그래도 돼?"
"네. 누나랑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많이 싸왔어요."
"뻥치네."
"맞아요. 사실 뻥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동혁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도 혼자 뺏어 먹기는 좀 그래서 내 도시락에 있는 꼬막과 감자조림도 반으로 잘라 동혁이의 밥 위에 올려두었다. 오물오물 잘도 먹네. 밥을 먹을 때마다 빵빵해지는 볼이 귀여워 손가락으로 쿡 찔러볼까 하다 관뒀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저 멀리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려는지 축구공을 왼팔에 끼고 나오는 김도영과 그 뒤로는 정재현과 이태용 그리고 적지 않은 남자 아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찼다. 어느새 김도영 팀과 정재현 팀으로 나눠진 남자 애들은 축구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저들끼리 치고 박고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축구를 하는 모습에 시선이 갔다.
"누나."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땀냄새 나면 죽여버려야지.
"누나?"
"어어? 뭐해?"
"불렀는데 답이 없길래."
긴 팔 하나가 툭 튀어나와 언제 붙어있었던 건지 입가에 붙어 있던 밥알 하나를 떼어주었다.
"누나 다 먹었어요?"
"어어… 너는?"
"저도 다 먹었어요."
"그럼 일어날까?"
"네."
비어버린 도시락을 내려보다 뚜껑을 덮고 보자기로 꽁꽁 잘 묶어두었다.
"…."
"누나."
의자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휙 돌려 운동장 쪽을 보니 흰 반팔만 입은 채 토끼처럼 운동장 이곳저곳을 마당처럼 누비는 김도영의 모습을 바라보다 부르는 동혁이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응? 왜?"
"학교 끝나고 집에 같이 가요."
"학교 끝나고?"
학교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어떡하지? 그래도 오늘이 동혁이 전학 온 첫날인데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래 시민아 넌 좋은 누나잖아. 떡볶이야 뭐… 굳이 오늘 안 먹어도 되고.
"그래 같이 가자!"
"끝나고 누나 반 앞으로 갈게요."
"응? 안 그래도 되는데…."
"제가 가고 싶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뭐… 그래.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계단을 오르고 동혁이는 2층, 나는 3층 그 가운데 계단에서 인사를 하고선 헤어졌다.
혼자 양치를 끝내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점심 시간이 끝난 건지 땀 냄새를 폴폴 풍기며 우르르 올라오는 남학생들의 머리통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시민아 여기서 뭐해."
"뭐야 정재현?"
흙먼지로 뒤덮인 축구공을 손에 들고 툭 튀어나온 정재현의 얼굴에 하마터면 손이 올라갈 뻔했다. 깜짝 놀랐네…….
"넌 땀 냄새도 안 나네."
"그런가?"
신기하다- 얼굴을 갖다 대며 킁킁거리니 입고 있던 옷을 잡아끌며 냄새를 맡는 정재현이었다. 그나저나 이걸 언제 말하지? 다 같이 있을 때 말해야 되나. 차라리 정재현한테 말하고 전해달라고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래 말하자! 말하는 거야.
"나 끝나고 같이 못 갈 거 같아."
갑작스러운 내 말에 정재현은 입을 작게 벌리다가 뭐? 하며 다시 내게 반문했다.
"동혁이."
"…."
"혼자 가게 둘 순 없잖아. 앞집인데."
"그럼 나는?"
"응?"
"난 너 옆집인데."
"…."
"혼자 가게 둘 거야?"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세상 불쌍한 눈을 하고선 나를 쳐다보는 정재현의 시선에 나는 주먹을 쥐어 그대로 놈의 머리를 콩 때렸다.
"장난이야 장난. 알았어 얘들한텐 내가 말해줄게."
"고마워 그럼 난 간다!"
응답하라 ! 1988 !
동혁이의 고백
"저 시민 누나 좋아해요."
태용의 방에서 듣는 갑작스런 동혁의 고백에 당황한 건 도영 뿐 아니라, 재현 그리고 태용 모두였다.
"뭐? 언제부터?"
"사실 그걸 잘 모르겠어요. 언제부터인지."
시민이 귀엽지. 그렇게 말하며 동혁의 옆에 누워 얼굴이 활활 타오를 듯 벌게진 동혁의 어깨를 툭툭 치는 재현과 동혁의 고백에 웃음이 끊이질 않은 태용과 그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누운 도영이 있었다.
어니언's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추석 모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추석 특집으로 몇 가지 글을 소소한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썼는데 너무 흐지부지하게 끝난 거 같네용 흑흑 ㅠ__ㅠ
다음 글은 짧은 글들을 몇 가지 묶어 놓았는데 지금까지 쓴 게 셰프 이태용, Love in Osaka 그리고 중국에서 온 전학생 이 세 글입니다.
(아직 다 쓰진 못 했지만...)
제목이 제목인 만큼 주인공은 누군지 바로 감이 오시죠? 여기서 1-2개 더 추가하려고 하는데 보고 싶은 그런 글 있으신가요?
설정은 마음대로 정했어요. 드라마 상에서는 학교가 다른데 이야기 전개 상 같은 학교로 만들어버렸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