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잔 보 스 통 학 러
"이 수업 듣나봐요, 저도 듣는데."
"아, 그래요?"
"네. 아까 일 사과할 겸 다음에 밥 한 번 사드려도 될까요?"
"괜, 괜찮,"
"그래요. 안 그래도 제가 얘 밥친구인데 오늘 약속 있어서 못 먹는데 같이 드시면 되겠다."
나 빼면 아싸인 네가 약속은 무슨 약속?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들은건지 박수영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귓속말을 했다. 나 오늘 담당 교수님이랑 밥 먹는데 너도 낄려면 끼던가. 아하, 여기나 저기나 밥을 입으로 먹기엔 글렀다. 그래도 다신 안보려고 노력하면 안 볼 수 있는 이 사람을 택하는 게 낫겠는걸. 긴장한 탓에 나는 고장난 장난감처럼 목을 계속 끄덕였다.
"그러면 이 수업이 두 시간 수업이니까 끝나고 밥 먹으러 가요, 우리."
"그, 그래요."
이번에는 대답도 동반한 고장난 장난감 같았지만 외모만 천사인 줄 알았는데 성격도 천사인가보다. 왜냐하면 병신 같은 내게 인자한 미소로 답해줘서랄까. 그래, 어차피 밥 한 번 먹어야 할 거 얼른 해치우자 싶어서 오케이했더니 좋아한다. 신기하네. 누구랑 밥 먹는 거 좋아하나봐.
"아, 그런데 이름이 뭐에요? 제 이름은 황민현이에요."
"김여주요."
"몇 살이에요? 17?"
"아뇨, 15요. 스물 둘."
"아아, 미안해요. 새내기인 줄 알았어요. 전 스물 셋인데 말 편하게 해도 되나요?"
"네."
새내기? 그만큼 풋내난다는 걸까 아니면 동안이라는 걸까. 스물 둘이 동안이라고 해봤자 고딩인데 결국은 고딩티를 아직 못 벗었단 뜻으로 말한건가. 아, 피해망상 좀……. 폭풍같은 그의 질문에 맞춰 대답과 생각을 했더니 정말 강한 파도에 휩쓸리듯 진이 다 빠졌다. 남자와 면전에서 이렇게 오래 대화하는 건 아직도 익숙하지 않나보다. 그래도 방학 때 새 친구를 사겨서 조금은 나을 줄 알았는데…. 아직 잠재된 무의식 중 그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았나.
"어때? 음식은 마음에 들어?"
"네. 완전 맛있어요."
"너도 말 편하게 해. 아, 여주가 우리 과였으면 더 빨리 친해졌을텐데…."
"과 사람들이랑 친한가봐."
"남자애들과 대부분 친하지."
그래서 친화력이 좋은가 보네. 그런데 아까 그 친구 이름이 뭐야? 그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아, 역시…. 사소한 사건 가지고 미안하답시고 밥을 사줄 리가 없지. 그것도 더더욱 나한테……. 그래도 특이한 상황으로 끝이었을텐데 편한 선후배라는 연장선을 갖을 수 있었으니 수영이한테 고맙기도 하다.
"수영이, 박수영."
"아, 그렇구나. 걔 일본의 문화 수업 듣지?"
"응, 맞아. 그건 왜?"
"같은 수업 듣는 것 같아서. 그런데 벌써 다 먹었어?"
벌써 다 먹은 것이 아니다. 네가 수영이 생각하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게 아닐까? 라고 짓궃은 질문으로 그를 떠보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아직 그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더군다나 나를 부담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다음 주 부터 조별 토론 한다고 했는데 조 짰어?"
"아니, 아직이요. 수영이랑 같이 하니까 나머지 한 명은 다음 수업 때 남는 사람이랑 하려구요."
"그럼 나랑 같이 하자. 나 어차피 독강이라 아는 사람 없었거든."
"그래요? 수영이한테 물어보고 말해줄게요."
"그럼 전화번호 알려줄래? 미리 아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아, 그럼 내가 수영이 번호 알려줄테니까 선배가 연락할래요?"
"아니, 네 번호 줘."
단호한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뭐지? 수영에게 관심 있는 것 같았는데…. 수영이 부담스러워할까봐 그런건가.
"아, 너무 단호했나. 미안. 다짜고짜 수영이한테 연락하면 당황스러울 것 같아서."
"아아, 그렇겠다. 그럼 저 다음 수업 들어가야해서 이만 가볼게요."
"아, 다음 수업 여기서 안 들어?"
"응, 교양이라 인문대로 가야해요. 선배는요?"
"난 경상대. 난 전공이라. 그럼 다음에 봐."
그와 헤어지고 호수 쪽으로 걸어가는데 수영이와 영민이가 있었다. 아, 영민이도 수영이랑 담당 교수 같다던데 같이 밥 먹고 왔나보다. 아, 그런데 수영이만 있으면 바로 수영이한테 달려갔을텐데 영민이가 있어서 그들에게 가기가 조금 그랬기에 발걸음을 돌려 인문대 가는 먼 길을 택했다.
"김여주, 어디가?"
"…산책할 겸 운동장으로 가려고. 너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빠르긴 무슨, 교수님 설교만 삼십 분 넘게 듣고 밥도 못 먹고. 아, 민현이오빠랑 밥 잘 먹고 왔어?"
"민현이? 남자 이름 아니야? 김여주한테 아는 남자애도 있었어?"
"야, 여주가 아는 남자가 너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마. 오늘 존잘남이랑 친해졌으니까."
수영의 말에 영민은 미간이 좁혀진 채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풀어졌다. 뭐지, 괜히 영민이의 눈치 보며 수영의 기대에 찬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줬다. 그동안 영민이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걔한테 짜증낼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으니까.
"아, 맞아. 선배가 우리랑 같은 조 하고 싶대. 그리고 너랑 일본의 문화 수업 같이 듣는다고 했어."
"아, 진짜? 오빠가 그 사람인가 보다. 이번에 족보 많이 돌았는데 중간고사 때 하나도 안 나왔다고 했잖아. 그 때 백점 맞은 사람이 황민현이라고 했거든 ."
"그거 수업이랑 시험 완전 빡세다며."
"그렇지. 누가 꿀강이라고 구라쳤는데 속아서 들어갔지, 내가."
"야, 내가 알고 그랬겠냐? 김재환이 사기쳤지."
"임영민, 누가 뭐래? 쨋든 여주야, 같이 조 하자고 하자. 재미있겠네."
분명 그녀는 내게 말을 한 것 같은데 왜 눈은 영민이한테 머물고 있는 것인지….
애 잔 보 스 통 학 러
봄비가 무슨 장맛비처럼 대차게 내리는 건지……. 덕분에 안 그래도 버스 타기 싫은데 더 타기 싫어졌다. 정류장에 사람이 많아서 우산을 쓰고 있지도 못하겠다. 그래서 우산을 접어서 정류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 버스가 정류장 바로 앞에 서줬으면 좋겠는데…애매하게 서면 비 맞으면서 타야 하잖아.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버스는 생각보다 멀리 멈췄다. 그래서 너도나도 다들 우산을 쓰고 갔는데 앞사람이 우산을 잘못 접는 바람에 내 화장이 지워질 뻔 했다. 진짜 오늘 자체휴강 할 걸 그랬나. 의자에는 이미 만석이고 봉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음 정류장에는 사람이 아예 타지 못했다.
답답하고 찝찝한 상황에도 알림 소리가 크게 나서 설마 내 것일까 했는데 정말 내 것이었다. 원래 무음인데 어쩌다 소리가 되었더라. 그래도 휴강 문자인데 안 보면 안 되니까 힘들게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카톡이었다. 카톡? 미리보기에 황민현 선배 다섯 글자가 떴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의 이름을 보니 왠지 모르게 설렜다. 아, 금사빠 인증이네. 그나저나 왜 한거지. 현민역에 도착하면 뒤에서 두번재 자리로 와. 거기로 가고 싶은데 틈이 없네. 뭐야, 이 사람도 여기 탄건가. 원래 현민역에 타는 거 아니야? 그땐 현민역에서 탔잖아. 그의 말대로 현민역이 되자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네.
"원래 현민역 쪽에서 사는 거 아니었어요?"
"아, 오늘 사촌 형 집에서 자고 오느라. 그 형도 우리 학교거든."
"다들 공부 잘 하나 봐요."
"그렇게 되는건가. 아, 그런데 과에서 엠티하면 가는 편이야?"
"수영이가 가면 가고 안 가면 안 가요. 원래 술도 안 마셔서."
"그렇구나."
엠티 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지 싶었는데 두시간 후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업 시간을 잘 지키시기로 소문난 교수님 수업이 오 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소중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휴강 아니냐. 앞에 앉은 영민이의 말에 다른 교수님이라면 설렘이 가득했겠지만 교수님이 교수님인지라 그닥 구미가 당기지 않는 말이라 그저 한숨만 내뱉을 따름이다. 그러기엔 조교 오빠가 떡하니 서 있잖아. 내 말에 이제 온 수영이가 분위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나 방금 오면서 민현이 오빠랑 어떤 남자랑 우리 학회장이랑 조교 오빠랑 같이 있던데."
"뭐지. 뭐 설명하려고 오는건가."
"양반은 아닌가보다. 왔네."
수영이 말에 앞을 쳐다보니 단상 위에 민현이 오빠와 학회장 언니, 모르는 남자 셋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학회장 류화영입니다. 저 짧은 인사 동안에 그는 우리를 찾은건지 환한 웃음을 지어줬다. 안녕하세요? 무역학과 학생회장 황민현입니다. 저는 경영학과 학생회장, 정재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행정학과, 무역학과, 경여학과 이렇게 세 개의 과와 연합 엠티를 가려고 합니다. 대상은 전 학년이고 비용은 무료이니 선착순으로 이십 명이니 빨리 신청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이 말을 남기고 가버렸고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교인 창욱 오빠는 단상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오늘 교수님이 출장으로 인해 영화 감상하고 감상문 쓰고 제출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창욱 오빠 잘생겼어. 저 오빠 수교과 졸업했다며. 지금 임용 준비하면서 우리 과 조교하고 있다던데 어떻게 저리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수영의 말에 영민이도 찬성했다. 나 굉장히 tmi-too much information-을 들은 것 같은데. 다행히 영화는 이미 셋이 같이 극장에 가서 본 영화라 딴 짓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 엠티 갈거야? 수영이의 말에 너 가면 갈게라고 답했지만 거기서 어색함을 이길 자신이 없다. 수영이, 넌 갈거야? 당연히 가야지, 숙박비랑 식비 다 공짜인데. 그럼 나 과방 가서 신청서 가져 올게. 그녀는 조교가 나가자마자 눈치 보며 강의실 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영민이 뒤돌아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엠티 갈거야?"
"어? 아마도, 왜?"
"그냥. 나도 갈거라서."
"그 날 알바 있지 않아?"
"대타 구하면 돼."
영민이의 주도로 이런저런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 그러고보니 남자만 보면 어색해하고 두려워했던 내가 자연스레 영민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흠칫 놀란게 그의 눈에도 보였는지 왜 그래? 하며 걱정하듯이 물어봤지만 그걸 그대로 내뱉기엔 너무 민망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스크린을 봤다.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니 이제 곧 끝나겠네. 조교는 언제 들어온건지 내 옆 분단 빈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걸 알아챈 건 그의 통화하는 목소리였고.
"여보세요. 너네 뭐야. 전화는 왜 했고."
"알아. 너희들 다 말할테니까 두고 봐."
창욱 오빠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타이밍을 알았던 건지 나가서 전화를 받지 않고 저 말만 하고 끊었다. 그리고선 칠판 앞으로 나갔는데 나를 스쳐간 한 마디가 내 귓가를 때렸다. 마치 뒤통수라도 때리듯이.
"심심하다고 돈지랄 한다더니 제대로 하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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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물 임영민 등장!
남은 휴일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