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해를 품은 달 07
아저씨.
나, 나약해졌다는 것을 핑계로 오늘 하루만 욕심부려봐도 될까요.
피하려고 애써도 자꾸만 가슴이 쏠리는 따뜻한 햇살에 잠깐 몸을 부비고, 지친 마음이 새근새근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은은한 향에 살짝 코를 맞대고.
오늘 하루만, 정말 딱 하루만.
약속.
얼음, 겨울 이런 감각적인 차가운 것은 워낙 날씨나 온도에 민감한지라 극도로 꺼려지지만 혼자, 독방 이런 추상적인 차가운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곤 했다.
이외에도 외로움, 차가움, 어두움, 막막함, 불행, 먹구름 같이 회색빛을 띈 그것들….
그리고,
내가 하얗고 찬 운명을 품고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인 그 순간, 미치도록 외롭고 눈물나던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고, 아이들이 웅성웅성 의자를 끌며 일어나는 소리로 교실이 가득 찼다.
야, 급식 먹으러 가자. 시끌시끌한 교실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면서 허리를 세웠다.
급식. 그러고보니 급식 먹어 본 적이 언제더라.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대어 고개를 젖히고 연회색빛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다 문득, 내 앞자리에 앉는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표지훈. 자꾸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던 놈. 지금도 내 앞에 앉아 나를 보고 있으려나.
살짝 마음 졸이며 본 앞자리는 비어있었다.
그 녀석, 종이 치자마자 친구들 틈에 섞여 신나게 급식을 먹으러 간 모양인데…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건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내가 마음을 졸인 이유가 녀석이 있길 바래서일까 없길 바래서일까를 알 수 없으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을 듯 싶다.
빈 앞자리의 의자다리를 발로 툭툭 건드리다 그나마 몇 남아있던 아이들조차 느릿느릿 빠져나가는 뒷모습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렇게 나는, 빠르게 혼자가 되었다.
텅 빈 교실에 데구르르, 내 책상 위로 햇살이 굴러가는 소리와 그 위에 진눈깨비처럼 내려앉는 내 한숨 소리만이 소복소복 쌓여간다.
싸한 교실 덕에 두터운 교복 마이 사이로 오슬오슬 소름이 돋은 팔을 슥슥 쓸며, 창을 통해 내려오는 햇살을 손안에 쥐고 그 위에 입술을 얹었다.
˝야.˝
말을 걸어본다. 물론 돌아오는 답은 없다.
소리를 내어 더 말을 걸어보려다 아까처럼 또 듣고있으면 어쩌나, 덜컥 겁이나서 속으로 종알거리기로 한다.
…야, 표지훈.
…들려?
안 들려도 할 수 없어. 듣고 싶으면 내 마음을 읽는 마법이라도 알아오던가.
무튼- 너 그거 알아? 먼 발치에서 몇 번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너 되게 햇살같아.
비가오나 눈이오나 싱글싱글 웃는것도, 내 볼에 닿던 네 손가락도. 하나같이 꾸밈없고 따뜻하고 순수해.
넌 좋은 놈 일거야. 아니, 좋은 놈이야. 아무한테나 그런 기운이 나지 않거든. 막, 신나게 활활 불타오르는 기운. 그래서 더더욱 욕심을 못 부리겠어. 내 운명에 꺼져가는 너의 불씨를 지켜 볼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내 운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따뜻하던 네 손가락, 내 운명처럼 썩어 문드러질거야.
…너는 햇살이잖아. 이렇게 작아서 내 손안에 쏙 들어오는, 그런 햇살이잖아, 너.
네가 저 멀리 우주의 한 가운데서 당당하게 불타오르는 '해'라면 또 모르겠다.
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네가 해라면, 반대로 내 운명을 녹여 줄 수 있을까?
˝…에이.˝
에이, 말도 안 되는 욕심.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난을 치자 내 손 위의 햇살이 여우비가 오고 난 후 풀잎에 매달린 이슬의 그것처럼, 초롱초롱 맑은 빛으로 찰랑인다.
너를 곁에 둘 순 없으니까 너 닮은 녀석이라도 이렇게 쥐고있을래. 이것 정도는 내 운명이 허락해 주겠지.
「˝그 때 너를 어떻게 위로해줘야 했던거야?˝」
어떻게 위로해줘야 했냐고 물었지.
너, 잘 한거야.
그 날 네가 했던 그대로 아무런 소리도 없이, 몇 발 다가왔었다는 흔적도 없이 떠나주는거.
그게 날 위로하는거야.
아니 위로라기보다는 '위해 주는 거' 라고 해야하나.
▒▒▒
˝응? 지호 왜 벌써 왔냐? 밥 안 먹었어?˝
점심을 나가서 드실 생각이셨는지 겉옷을 입으시던 담임선생님께서 교무실 앞에 멀거니 서있는 날 놀란 눈으로 돌아보셨다.
…아, 선생님들 먼저 나가서 드세요. 저는 학생이… 날 보자마자 겉옷을 벗어 다시 의자에 얹혀 놓으신 담임선생님이 까딱까딱, 내게 해보이시는 손짓에 고개를 푹 숙이고 쭈뼛쭈뼛 다가섰다.
선생님은 내가 다가서자 풀썩 의자에 주저 앉더니, 흠- 바람소리를 내셨고 그에 훅, 간질간질한 향이 내 쪽으로 밀려왔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온몸의 안정에 정신마저 아찔하다.
˝밥 안 먹었어?˝
˝…˝
˝지호야, 대답.˝
˝…네.˝
˝왜 안 먹었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애꿎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이 정도면…대충 눈치채시지 않았을까.
내게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 따뜻한 시선을 피한 채, 이것저것 소복하게 어지러져 있는 선생님 책상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큼, 언제부터 밥 안 먹었어?˝
˝…중학교 때부터.˝
˝아 그래, 중학교 때부터 안 먹었…중학교??˝
괜히 말했나.
꽤나 놀라셨는지 드륵, 선생님이 앉아계신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니, 왜? 학교에서 그…지원 해주잖아. 친구들이 같이 먹으러 가자고 안해?˝
˝…˝
˝우지호, 대답!˝
˝…안 해요.˝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야.˝
˝없어요.˝
˝그럼, 그냥 친구는.˝
˝…없어요.˝
˝…후, 너 1학년 담임선생님이 누구셔.˝
˝…˝
˝…대답.˝
˝…˝
˝너 대답 안하면 내가 직접 알아볼거야.˝
괜히 말했고, 괜히 왔다.
그동안 웬만하면 선생님들의 부름에 대부분 찾아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했는데 괜히 욕심을 부렸어.
이런 욕심이라면 나중에 아무도 없을 때 와서…
˝지호 너는 나랑 얼굴 좀 많이 봐야겠다.˝
…아무도 모르게 하는건데….
이곳으로 걸어오는 와중에 '선생님의 향을 한번만 더 맡고 그만두자.' 했던 작은 욕심은 '선생님의 향이 배인 물건을 하나 가져오자.' 로 그 크기를 키웠고, 결국엔 욕심이 화를 부른 꼴이다. 짐짓 무서운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선생님 옆 지저분한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던 만년필을 집어 몰래 호주머니에 넣는데는 성공했지만, 선생님의 매서운 관심까지 함께 넣어버렸으니까.
담임 선생님, 가진 향처럼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사람이였다. 그의 사랑의 그물에서 나를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다.
후회하는 이 와중에도 탐욕스러운 마음은 혹시나 만년필에 배인 선생님의 향이 지워질새라 호주머니에서 얼른 손을 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어딜 가려는거니?˝
˝지호한테요.˝
˝가서 무얼하게.˝
˝…아저씨는 걱정도 안 되세요? 이리저리 찢길대로 찢겨 너덜너덜해진 지호가 갑자기 들이닥친 해 때문에 흔들리잖아요.˝
˝그래서 밤안개를 보냈잖아.˝
˝밤안개…그 녀석 조차도 지호를 흔들리게 하고있어.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잠자코 두고봐라.˝
˝두고보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요.˝
˝해와 달의 사랑을 다룬 하늘나라 동화책, 읽어본 적 있니?˝˝…하늘나라 동화책이면 거의 그런 주제 아니에요? 그런데 너무 많아서 어떤 책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최근에 본건데, 유일하게 애매한 결말로 끝나는 책이 한 권 있었어.˝
˝어떤 내용인데요?˝
˝마지막 줄이 대충 ´해와 달의 사랑에 분노한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 밤안개를 넣으셨고, 그 밤안개가 은하수로 변하여 해와 달은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였을거야.˝
˝…어라. 밤안개가 나오는 동화책은 처음인 것 같아요.˝
˝그렇지. 밤안개가 나오는 책은 거의 드물지. 그 책, 밤안개가 나오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외인데 결말도 의외라서 말이야.˝
˝결말이 왜요?˝˝거의 해와 달 모두 불타 없어지거나, 우주의 끝자락으로 내던져지는걸로 끝나는데 이건 달라. 다가가지 못 하기만 했을 뿐, 둘은 계속 존재하고 있잖아.˝
˝…어…듣고보니….˝
˝불행한 결말보다 애매한 결말에 걸어보는게 더 낫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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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헿 이 시간에 깨어있는 분 있으려나 :D 피곤하네영! 전편 대댓글도 아직 안달았는데! 내일 광속으로 달겠습니당!
하아 배고파....빨리 속도를 붙여야 이야기가 쭉쭉 나가는데 이거 등장인물 특징이나 캐릭터 풀어놓는걸로 시간 다 가겠어요ㅎㅎ
이제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으니 크고 작은 사건들을 넣어야겠습니당! 못난 작품 읽어주셔서 감사해요ㅠ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달토끼/쨔응/새주/꿀/용구리/우샤론/쿠우/초코푸딩/뀨/회색빛 하늘색/부적금화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