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파란 미용실
w. 비명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능력의 한계라고 단정지어버렸을 때의 허무감은 더욱 그러하다. 무언가를 보는 데에 있어서 제한이 있음에 스스로를 낮추는 일은 없다만 빠르게 포기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을 늘여주기 위한 학생이 있었다. 나보다 얼마나 어린 지는 몰라도 지금은 대학생인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의 앳된 목소리로 나에게 '형, 형!'거릴 때마다 움찔 움찔거렸다. 이리 튀고, 저리 튀고. 오른쪽 귀에 반응이 있어서 돌아보면 왼쪽에 있고, 왼쪽 귀에 반응이 있어서 돌아보면 오른쪽에 서 있던 아이였기 때문에.
“형!”
“어, 성종이 와 있었어?”
집에 들어서니 '형!'하고 쪼르르 달려와서는 제 머리카락을 만져보는 성종의 행동에 낯이 부끄러워져 괜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머리가 어떤 색깔인지는 아직 나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빨간색'이라는 것이 정확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빨간색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어릴 적 '불'이란 존재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뜨거움', '빨갛다' 요 정도 뿐이었으니까. 사람들도 빨간색으로 염색하지 않나? 빨간색의 머리가 그렇게 안 흔한 거였나? 왜 나는 흔하다고 생각했을까.
“형 머리 진짜 빨갛다? 음, 뭐라고 하지... 딸기같아. 여튼 진짜 빨개.”
“아, 그래?”
“아, 오늘 나 집에 좀 일찍 와서 집 청소 좀 했어. 형 대단한 사람이더라? 상도 많고, 음악하는 거 왜 말 안 했어?”
그 말만 하면 다 안다는 미국의 한 음대를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는 의미이며, 끈질긴 공부벌레였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아주, 아주 어릴 적에 이미 우리 부모님은 나를 떠난 지 오래였다. 부모님이 살아계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나에게 찾아온 것은 음악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공터 오른쪽 구석으로 가면 지하도가 있는데 나는 그 곳을 자주 애용했다. 그 지하도 밑으로 내려가면 으스스한 분위기가 별로지만, 꽤나 멋진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 음악하는 거 왜 숨겼냐니까? 나 그래도 나름대로 형 집에 2년 째 오고 있는데.”
“내 방에 들어갔단 소리네?”
성종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2년 전, 성종이 고등학생이라며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에는 나도 나름 한국어가 서툰 때였다.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대화하는 데에 지장이 있거나 했지는 않았지만, 앞도 안 보이고 한국의 정서를 잊은 지 오래라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말하는 '아메리칸 스타일'이란 내겐 없었다.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조용하고,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 지 못했으니까. 나는 내 방에 항상 혼자 있었으며, 흥얼거리기를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길거리를 걸으며 흥얼거리는 걸 좋아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누군가가 내 흥얼거림을 끊고, 내 노래를 망친다면 정말이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끊겨봐서 인내심의 한계가 풀려난 상태이긴 하다만.
“내 방에 들어갔단 소리네?”
다시 한 번 묻는 나의 질문에 성종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 번 성종이가 나의 흥얼거리는 멜로디의 흐름을 끊고 내 방에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왔을 때에는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성종의 눈에는 아마도, 내 방 벽에 삐뚤빼뚤하게 붙어있는 '달파란'의 앨범 표지만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혹시 성종이가 눈치를 채지는 않았을까? 나도 그 때는, 조금 철 없는 마음에 성종이에게 좋게 말해주지 못하고 더럭 화를 내곤 했었다.
「앞, 앞으로 내 방 들어오지마! 절대로. 들어, 들어오면 형 정말 싫어할거야.」
그 때 이후로 성종이 내 방에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었거늘, 오늘 성종이 스스로 제 방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태도에 잠시 기가 막혔다. 나 나름대로 꼼꼼하지는 않았겠지만 청소도 자주 하고, 닦기도 많이 닦았는데. 굳이 성종이가 들어올 필요도 없었을텐데. 필요 이상의 과도한 친절함은 내겐 딱 질색이었다.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청소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성종의 도움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요샌 많이 적응을 했다 싶었는데. 막상 성종이 제 방에 들어왔다고 하니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뭐... 다 봤겠네.”
“.......”
“상도 봤고, 상장도 봤고, 달파란 앨범 표지들도, 달파란 앨범도...”
“.......”
“다 봤겠네? 다, 형이 안 봤으면 좋겠다 싶었던 걸 다 봤겠어.”
대답이 없는 성종의 행동은 오히려 나를 더 화나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나는 참았다. 더 이상 어릴 적의 철 없는 김성규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알고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면, 나도 열 줄을 알아야한다는 것을. 내 시야가 닫혀 있다고, 마음까지 닫아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 형이야.”
“형 가수야?”
“아니?”
“형 가수잖아.”
“아냐. 가수 아냐.”
달파란이란 존재는 김성규이고, 김성규가 달파란이라는 사실은 진실이었지만 성규는 자신을 가수라고 표현하는 것이 싫었다. 낯 간지럽고 부끄러움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널리 알려진 가수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가수가 아냐, 나는 가수가 아냐. 노래만 하면 뭐해. 나는 그냥 노래 부르는 사람이지. 가수가 아냐. 몇 번이고 성규가 '달파란'이라는 앨범을 만지면서, 또 노래를 들으면서 읊고 외쳤던 말이었다.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음악은 좋고, 음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음악은 싫었다. 가수라면 적어도 얼굴이라도 알려야 하는 거 아냐? 나에게 '가수'라는 말은 너무 과분해. 그러니까 난 그냥 노래부르는 사람인거야.
“난 가수가 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시야가 막힌 사람이 어떻게 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겠어. 귀로 듣고, 마음으로 봐도 상처 받을 것이 뻔하단 말이야. 나같은 사람이 가수가 되면 결국 돌아오는 건 아픔 뿐이니까. 성규는 문을 세차게 닫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자기 방에 붙은 달파란 앨범 표지를 만지려고 벽을 손으로 훑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툭, 수도 없이 만져서 어디가 구겨졌고 어디가 찢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표지를 손으로 훑었다. 보고싶다.
새해 평안하셨죠? 올해에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독자님들 ♡'-'♡
오늘은 '달파란'이라는 존재가 성규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편이었죠
하지만 숨겨진 사실은, 아직 안 알려진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는 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어주신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네요 ㅠ.ㅠ
독자분들의 응원을 받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암호닉: '볼펜'님, '호호'님, '찡긋'님, '똥개'님, '달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