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져가는 교복을 응시한다.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길이 참 예쁘다. 저 멀리서는 어제의 그 남자가 걸어온다. 당당한 걸음걸이. 나는 저런 걸음걸이를 몇 살 때 가져봤던가. 가져본 적은 있었던가. 늘 죽음 속에서 몸부림 치던 씁쓸한 인생 아니었던가. 소주병을 입에 문다. 진한 알콜이 혀끝을 적신다.
"또 보네요?" "그러게요." "입금 안 하셨던데요." "없는 게좌번호라고 떠서요. 입금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예요." 남자의 볼에 우물이 생긴다. 입꼬리를 끌어당기면 보조개가 드러나는 남자였다. 그 모습이 밝아 보인다. 참 나와는 다른 사람. 남자는 드리우는 햇살을 막아들어 그늘이 생겼다. 고개를 떨구어 발끝으로 시선을 내린다. "현금으로 드릴까요?" "어차피 필요없었어요. 계좌번호는 연락처니까 잘 저장해둬요." "... 쓸데없는 짓 하는 거 좋아하나 봐요." "아닌데. 나 엄청 바빠서 쓸데없는 짓은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유감이네요. 나한텐 그렇게 안 보여서." 하얀 피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구곤 소주병을 집는다. 아,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돈 들고 나온 건 이게 다인데. 남자는 말 없이 내 행동을 바라보기만 한다. 조금은 부담스럽게.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시선을 거두라는 타박을 주고 싶진 않았다. 내게는 그럴 정신도 없었거니와 대화를 더 이상 이끌고 싶지 않았다. 조금 남은 소주를 다 마시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담배곽에 들어있는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남자는 그러는 와중에도 가만히 서 있는다. 무언가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담배는 몸에 안 좋은데." "술도 안 좋아요." "그럼 둘 다 하지 마요." "쓸데없는 짓 하는 거 좋아하는 거 맞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진한 담배향이 페부 깊숙한 곳까지 후비고 들어가 흔적을 남긴다. 심장이 더욱 더 차분해진다. 알코올이 올라오며 멍한 기분이 배가 됐다. 남자를 쳐다보면 입꼬리만 끌어올려 미소 짓는다. 그 웃음이 퍽이나 예쁘구나. "어제는 처음이었죠?" "처음은 아닌데." "그럼 어제 왜 그랬어요?" "댁 생긴 게 내 스타일이 아닌가 보죠."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꺼지지 않은 불씨가 타고 오른다. 아직 소멸되지 않은 연기가 희뿌옇다. "저녁 먹었어요?" "안 먹어요." "되게 어렵다." "어려운 건 미리 포기하는 게 낫죠." "어려운 건 도전하는 거죠." 말이 도통 통하질 않는 남자다. 검은색 정장을 따라 가늘게 떨어진 넥타이가 시야를 장악한다. 그가 상체를 숙여 얼굴을 들이민다.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일렁였다. "나랑 저녁 먹으러 갈래요?" 이 남자는 뭘까. 무엇을 원하는걸까. 그곳에 오는 사람 치고 깨끗한 인간은 없던데. 다 성욕에 찌든 쓰레기들밖에 없는데. 근데 이상하게 자꾸만 이 남자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아니야, 그래도 여자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꼴이 다 똑같은 인간이지. 아니 인간들은 다 똑같지. 남자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러면 힘 없이 뒤로 밀려나는 남자는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무슨 눈빛일까, 저건. "일 가야 돼서 안 되겠는데요." "일 꼭 가야 돼요?" "일 꼭 가야 먹고 살죠." "내가 먹고 살 돈을 준다면?"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람한테? 퍽이나 믿겠다." 진짠데 나는. 그의 짧은 말이 들렸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주병을 쓰레기통에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구두굽 소리가 들린다. "다음에 연락해 줄래요?" "휴대폰이 없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그럼 내일도 올게요." 남자의 목소리는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제부터 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불쾌한 손길이 허벅지를 쓸어내려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었다. 나는... 이럴 걸 알고 들어온 사람이니까. 이런 대접을 받을 걸 알고 들어온 거니까. 언니들은 웃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러워 보여 씁쓸했다. 돈이 없으면 돈을 이렇게밖에 벌 수 없는 건가. "우리 애기는 몇 살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 ..." "많이 무뚝뚝한 애기네~ 밑에도 무뚝뚝할까?" 알코올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불쾌한 손길이 무릎 위를 맴돌더니 점점 조금씩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또 다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순결을 침범하던 그 역겨운 손길. 검지와 중지가 허벅지에 맞닿고 엄지가 속옷 끝에 맴돌았다. 어떡하지 난 정말... 난 정말... 눈을 질끈 감았다. "김여주." 다른 손이 허리 위에 올려진 순간 문이 열리고 마담이 들어왔다. 마담은 손바닥을 허공에 저으며 나를 불렀다. 남자의 손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목이 집중되는 듯했으나 언니들이 금세 분위기를 띄웠다. 나는 그 틈에 몰래 빠져나가 마담 앞에 섰다. "왜 부르셨어요?" "너는 따로 7번 룸 가봐." "네? 다른 언니들은요?" "너 개인 손님이니까 너 혼자 들어갈 거야~ 거기서도 이번처럼 어벙 까기만 해. 값 두 배는 띄워서 들어가는 거니까 분위기 제대로 살리고." 혹시 알아? 팁으로 삼십은 더 받을지. 마담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돈에 미친 여자 같았다. 이 세상에 돈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야 없겠지만은 정말 돈에 미쳐서 도덕가지 일어버린 사람. 다 지긋지긋해. 마담은 7번 방 앞에 서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문을 열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서비스 똑바로 해. 마담이 높은 톤으로 인사를 한 것과 바대로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힘을 주어 허리를 밀어내 룸으로 들이밀었다. 몸이 휘청이며 다급하게 벽을 집었다. 뒤를 돌아보지만 이미 문은 굳게 닫힌 후였다. "이렇게 안 보면 안 만나 줄 것 같아서요." "아." 익숙한 음성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사람. 보조개가 예쁘게 자리잡고 있던. 남자는 다시 미소 지었다. 뭐가 그리 즐거워서 웃을까. 천천히 걸어가 남자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착석했다. 이 사람은 내게 무슨 꿍꿍이로 이러나. 앞에 놓인 양주병을 집어들어 술잔에 가득 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턱을 괴고 내 얼굴을 응시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그랟도 타이밍 좋게 불러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이 느껴졌다. "정말 저녁 안 먹고 온 거예요?" "네. 원래 저녁 잘 안 먹어요." "그래도 밥 잘 챙겨 먹지. 너무 말랐어요." "그렇게... 마르지는 않았는데. 그건 그렇고 왜 자꾸 찾아오시는 거예요?" 남자는 양주를 집어들었다. 꽉 차있던 술이 반절 줄어들었다. 이거 꽤 독한 건데. 37도쯤 되는 걸로 알고 있는 독한 술을 남자는 망설임 없이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저 사실 여주 씨 어제 처음 본 거 아니에요. 남자는 컵을 내려놓고는 풀린 눈으로 대뜸 말했다. 나를 어제 처음 본 것이 아니란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 남자와 마주칠 일이 있었던가. 나는 집과 여기만 반복해서 다니는데. 마주칠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그 짧은 타이밍에 이 남자를 마주할만한 사건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 전부터 나는 여주 씨한테 관심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갑자기 이러는 것도 아니고 단순 여주 씨 몸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밥 같이 먹고 싶어요." "저를 언제 봤는데요?" "조금 됐어요. 내가 스토커라서 따라다닌 건 아니고 같은 회사 여직원 데려다 줄 때 종종 봤었어요."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이 남자를 나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반팔만 입고 다녀도 될 계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 나는 본 적이 없었으나 이 남자는 내 곁에 맴돌고 있었구나,
"여주 씨가 궁금했어요 매번. 근데 제가 좀 성급했나 봐요. 워낙 답답한 걸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 "아... 네." "내일 점심 같이 먹을래요?" 남자의 피부가 곱다. 남자는 내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컵을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게심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아빠처럼 아까 그 남자처럼 나를 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이 착각이라고 한들 이번 한번은 믿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휴대폰... 바꿔서 엔시리 사진 없어요... 엔시리 사진... 많아 주세요... 글에 올리고 싶지만... 엔시리 사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