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는 다 비어버린 생수병을 다시 입에 갖다대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쩌면 자신이 나가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결과를 낼까. 크리스는 오른쪽 다리를 저도 모르게 달달 떨었다. 옆에 팔짱을 끼고 앉은 감독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혹시 모르니 준비해라.""....네."눈을 감고 침을 꿀꺽 삼킨 크리스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잡고 휘두른 기억이 점점 줄어드는 배트를 지나치듯 쳐다본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감독은 조금도 바라보지 않았다. 가장자리쪽에 침체되듯 자리를 잡은 크리스는 오랜만에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모든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어디선가 팽팽한 경기를 뒤로한채 안쓰럽게 몸을 푸는 자신을 보는 소년이 있을것 같았다. 다시한번 호흡을 단정히 한 크리스는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갈수록 팀의 승리가 멀어질쯤 크리스는 자신이 경기에 나가게 될것이라는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다리를 뻗으며 걸어가던 소년의 쓸쓸한 뒷모습을 떠올렸다. 크리스는 간만에 미소를 지었다. 왠지 자신이 좋은 성과를 거둘것 같기도 했고 더군다나 정말 그렇다면 좋아할 소년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크리스가 스트레칭에 열중하며 간간히 경기를 지켜보던 때였다. 흥분한 감독의 목소리가 크리스를 놀라게 만들었다."그렇지! 뛰어! 뛰어!"크리스가 슬럼프에 빠진 뒤 자신의 자리를 빼앗듯 채간 루한이 화두였다. 루한은 빠른 속도로 2루에서 부터 3루까지 내달렸고 공은 저만치 날아가고 있었다. 거침없이 3루까지 간 루한은 그대로 홈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무릎을 굽히고 있던 크리스는 그냥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날아가는 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이 없어도 팀은 충분히 건재했다.-결과는 크리스가 속한팀이 우승을 거머쥐며 어마어마한 상금과 트로피가 주어졌다. 특히나 승리의 주역인 루한은 여러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요청했고 스포츠 뉴스와 신문에선 그의 몸값이 날로 오른다는 기사를 반복적으로 내보냈다. 다들 만년 2위 탈출 기념이랍시고 한 방에 모여있었지만 크리스는 홀로 제 방에 남아있었다. 제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한없이 가증스러웠다. 더 나아가 치부를 소년에게 보여야 한다는 사실도 크리스에게 적잖게 다가왔다. 더이상 크리스를 응원해 줄 누군가도, 누군가의 영웅이 될 크리스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쪽 벽면에 세워진 야구배트는 어느때보다 초라하게 빛을 잃고 있었다. 크리스는 지금 자신이 길잃은 도둑 고양이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다 죽어버린 도둑 고양이. 앓는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어디선가 자신을 감시하고 지켜보며 행동 하나하나를 꼼꼼히 비웃는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결국 침대에 대자로 누운 크리스는 밝은 조명탓에 몸을 옆으로 돌렸다."크리스, 안에 있어?""...어? 어!"얌전히 크리스가 문을 열때까지 기다린것은 루한이었다. 오늘의 뜨거운 감자가 감히 여기까지 온것이었다."..왜.""너 없길래. 또 혼자 쳐박혀 있나 해서 왔다. 근데 그러고 있네."태연하게 들어오며 복도를 한번 더 살핀 루한은 문을 닫았다. 크리스는 루한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좌절을 몸소 느끼며 침대에 앉았다. 루한이 따라 앉으며 티셔츠 안에서 꺼낸것은 와인 한병이었다."짜잔, 너 주려고 훔쳐왔다.""그냥 놀지 뭐하러 왔어.""아, 온사람한테 왜자꾸 왜 왜거리면 쓰냐?"루한의 말에 크리스는 제 기가 푹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대하는 루한은 불편했다."야 이거 따는거 가져와봐."크리스는 그 말에 잠깐 고민했다. 루한의 말대로 병따개를 가져오는것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자신이 부끄러운 날에는 더더욱."뭐해 안가져오고."루한은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일어서서 친히 병따개와 와인잔 두잔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왔다."내가 아까 몇병이나 돌려댄 줄 알아?"루한은 놀라운 솜씨로 빠르게 코르크 마개를 빼냈다. 뽁하고 빠지는 경쾌한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내 손에 와인잔을 들려준 루한은 조심스럽게 와인을 따랐다."감독님 기분 좋아서 와인 옆방에 많아. 상금을 와인에 다 쓸것 같아."크리스의 기분이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쉴새없이 조잘대는 루한을 보는것은 고역이었다. 크리스는 제 자신이 치졸하며 속이 좁은 옹졸한 사내라는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야 수고했다."루한은 잔을 들이대며 부딪히기를 원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트리플 에이급 선수가 호텔 바닥에 주저앉아 왕년의 에이스에게 잔은 들이미는 모습은 가히 코메디와 흡사했다. 금방이라도 노랫소리가 들리며 끝이 나야하는 코메디와 달리 이 지독히 긴 절망의 연극은 끝이 없었다. 마지못해 잔을 몇번 부딪히고 나서 루한은 만족한듯 빈손으로 돌아갔다. 와인이 조금 남은 잔과 빈 와인병을 치우며 크리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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