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 밤 늦게 어딜 돌아다녀. 요즘 흉흉한데."주인 아주머니는 카운터 너머로 힐긋 레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딱히 대답은 없이 지나쳤지만 아주머니는 역시나 신경 쓰지 않았다. 눅눅하게 들어찬 습기와 기분나쁜 냄새의 복도를 지나 그와 다를 바 없는 방으로 돌아온 레이는 먼저 화장실로 들어갔다. 정신도 바짝 차릴겸 파란쪽으로 꼭지를 돌린 레이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리게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어린 얼굴이었다. 말끔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레이는 거울에 가까이 다가갔다. 흠-하고 손을 내린 레이는 그대로 화장실을 나와 침대에 누웠다. 먼지마저 눅눅히 피어올랐다. 방음이 썩 좋지 않은 저렴한 여관인지라 밤에는 낯뜨거운 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어쩌면 서로의 소리에 더 흥분하는지도 몰랐다. 레이는 작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발을 쿵쿵 굴렀지만 소리는 여전히 귀를 파고들었다. 결국 모든걸 포기한 레이는 윗옷을 벗었다. 하얀 반팔티 차림으로 레이는 이불속에 들어갔다. 내일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밤엔 언제나 그랬듯 외설스러운 소리에 잠을 설치고 늦은 아침에 일어났다. 레이는 대충 얼굴에 물을 묻히고 침대에 앉았다. 들고온 작은 배낭의 속주머니에 꽁꽁 숨겨둔 돈을 모두 꺼냈다. 총 오천칠백원. 이정도면 충분하겠다라고 생각할즈음 레이는 주머니에서 오백원을 더 꺼냈다. 이제 육천 이백원. 힘들게 모은 이십만원을 모두 썼지만 그닥 아깝진 않았다. 자신의 유일한 꿈이던 프로야구도 보고, 자신의 영웅인 크리스도 만났으니까. 야무지게 가방을 맨 레이는 축 처진 싸구려 여관방을 나섰다. 오늘이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때 더이상 크리스를 만날 수 없다는건 알고있었다. 영웅이 무너진건 아쉽지만 그래서 영웅이었다. 한번쯤 꺾일 줄 아는 예의를 갖춘것이었다."가? 잘가 학생."주인 아주머니는 끝까지 레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을채로 말을했다. 이번엔 레이도 끝까지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장장 네시간에 걸쳐 집에 돌아왔을땐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있었다. 아버지는 집에 안계셨고 집안은 정적의 기적소리로 가득했다. 싸늘한 공기에 레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버지가 며칠째 집을 비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온 몸이 노곤노곤해진 레이는 그대로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낡은 침대의 스프링 소리가 위협적으로 피어 올랐다.-"야 크리스."루한은 가만히 짐을 싸는 크리스를 불렀다. 루한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묵묵히 옷가지들을 개는 모습이 영 어색했다."나 쉬는날은 놀아줘야 해. 알았지?""알았어.""근데 생각해둔 일자린 있어?"루한은 크리스가 행여나 자존심이 상할것 같아 최대한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물었다."..뭐든 하면 되겠지."크리스는 마지막 옷까지 확실히 가방에 넣은 뒤 자크를 닫았다. 지익-하고 울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안심심하겠어?""어딘들 여기보단."크리스가 가방을 구석쪽에 밀어두고 주방쪽으로 향했다. 화가 났거나 기분이 상한건 아니었지만 입술을 쭉 내민 루한은 눈짓으로만 크리스를 좇았다."크리스.""왜 자꾸 불러.""어디로 갈꺼야?""알아서 뭐하게.""놀러가게."주방쪽으로 가는 한바닥에 멈춰선 크리스는 요상한 눈길을 주었다. 루한은 그 상황이 뭐가 그리 웃겼는지 배꼽이 빠지도록 웃다가 돌아갔다.어제 꿈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환상 같은 만남 이후로, 사실 그 전부터 크리스는 은퇴를 염두에 두던 차였다. 이른 나이였지만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아쉬울 것이다. 초록빛 그라운드가 그립고 홈을 하나씩 밟는 감촉 하나하나가 그리울 것이다. 괜스래 그런것들을 떠올리면 우울해졌다. 하지만 아쉬울건 또 뭔가 싶은 마음이 속안에 자리잡기도 했다. 이미 한차례 정상에 올랐고 돈도 벌만큼 벌었다. 딱 한가지 마음에 걸린게 있다면 레이였다. 자신이 더이상 뛰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떨까. 크리스는 순간의 그 생각에 야구장으로 뛰어갔다. 이번에 만나면 밥을 사주며 기억할 수 있는 한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야구장을 빙글빙글 돌아도 레이는 만날 수 없었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