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핫한 아이돌 블락비의 일원 안재효는 오랜만에 자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뭘 할까? 시간도 많은데 직접 요리나 만들어 볼까! 재효는 로맨틱하게 나이스데이를 보낼 생각에 잔뜩 들떴다. 결국 직접 슈퍼에 나가 스파게티 재료까지 샀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막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데 휴대폰이 미친듯이 울렸다.
혼자만의 아늑하고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전화 벨소리가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 힐끗 발신자를 응시하니……
우지호!
순간, 등줄기에 좍 소름이 끼치면서 가슴이 섬뜩해졌다. 받기 싫다, 받기 싫어! 변태도 아니고 허구한 날 자신을 까내리기 바쁜 잔소리 대마왕 천하무적 우지호는 정말이지 재효에게 꺼려지는 상대였다. 하지만 권력자 앞에 일게 소시민이 뭘 어쩌겠는가. 예전에 멋모르고 까불다가 자기 파트가 과감히 삭제된 전적 있던 재효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먹던 것이 역류하는 짜릿한 감각을 느껴가며 겨우겨우 아부를 떤 덕분에 이번 파트가 늘었는데 다시 말짱 도루묵이 될 순 없었다. 재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를 받았다. 내가 누구라는 여타의 말도 없이 머리와 꼬리를 자른 본론이 명랑하게 수신기에 울려 퍼졌다.
[형, 우리집에 자러 와요.]
그 말을 듣자마자 휴대폰을 집어 던질 뻔 했다. 제길. 속으로는 육두문자가 연달아 릴레이 경주처럼 치열하게 흘러나왔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언어는 아주 나긋하기 그지없었다. ‘응, 그래.’ 다정한 웃음과 함께 전화를 끊자마자 재효는 비명을 지르며 휴대폰을 소파 위로 내팽겨 쳤다.
“으아아아악!”
재효는 머리카락을 양 손으로 붙잡고 벽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자학했다. 지금 저의 모습이 상당히 추잡스럽다는 건 알고 있지만 뭐라도 해야 이 갈 곳 없는 화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것 같았다. 우지호, 우지호, 우지호! 대체 네놈이 뭐기에 시시사건 평화로운 내 인생에 태클이냐, 태클이!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재효는 울긋불긋 달아오른 이마를 양손으로 감싸 쥐며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오붓한 저녁시간을 돌려줘!
[짘효] 로맨틱하게 나이스데이
W.검백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느릿느릿 지호네로 향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하나 된 마음으로 우지호란 존재를 격하게 거부했지만, 재효는 눈물을 머금고 걸었다.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블락비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은 재효로서는 전 앨범 프로듀싱을 맡는 리더를 거역하는 건 자살행위와 다름없었다.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재효는 푹푹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지호네 집 앞이다.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지, 지호야!”
“형 왔으면 얼른 들어오세요. 혼자 뭐해요.”
지호가 입술 한쪽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망설이는 재효의 모습을 인터폰으로 봤던 걸까? 다 안다는 듯 여유롭기 짝이 없는 지호의 모습에 재효는 식은땀 한줄기를 흘리고는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하하, 드, 들어가려고 했어! 잠깐 딴 생각하다가.”
지호는 싱겁다는 듯 휙 뒤돌아섰다. 다행이 예민하기 짝이 없는 우지호의 심기를 건들인 것 같진 않다. 재효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꿍, 하고 닫히는 문에 다시금 소름이 쫙 끼치고 머리털이 삐죽 선다. 이제 완전히 우지호의 영역 속이구나. 그리 생각하니 점심에 먹었던 김밥이 욱- 하고 올라올 것만 같다.
숙소에서 생활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지호의 집 상태를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평균 남자들이 그렇듯 지호의 방은 여기저기 뱀 허물처럼 널려있는 옷가지와, 쓸지 않아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잡히는 더러운 바닥과, 쓰고 미처 서랍 속에 넣지 못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로 아주 난장판을 이루고 있으니. 재효는 접촉하면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사능 오염물질인 양 요리조리 피해 빈 공간을 밟으며 지호를 따라갔다.
“작업 중이였어?”
컴퓨터에 켜져 있는 작곡 프로그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효가 물었다. 지호는 회전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더니 이내 곧 몸을 재효에게 틀었다.
“궁금해요?”
“아, 아니. 내가 뭘 잘 알겠어. 네가 잘 해주겠지.”
감히 내가 네 일에 딴죽을 걸 수는 없지! 재효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허겁지겁 손사래를 쳤다. 지호는 모니터 옆에 둔 포카칩으로 손을 뻗어 과자를 집고 와삭 베어 먹었다. 부스러기가 지호의 입가에 흘러내리자 재효는 꾸깃 미간을 모았다. 드…러…워……. 하지만 그걸 노골 적으로 티낼 권리가 없는 재효는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웃음가면을 썼다. 지호가 포카칩 봉지를 집어 재효에게 내밀었다.
“하나 드실래요?”
“그, 그럴까?”
저녁시간도 다가오고 마침 배가 출출했던 재효가 흔쾌히 손을 뻗는데 지호가 휙 뒤로 손을 뺐다. 그리고는 얄밉게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맘이 바뀌었어. 저 혼자 먹을래요.”
그럴 거면 애초에 왜 물어본 거야! 재효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든 말든 지호는 냠냠 쩝쩝 혼자 맛있게 포카칩 한 봉을 비우고 바닥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로 손의 기름때를 닦았다.
“형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앉아있어요.”
“의자가 없어서…….”
“그냥 침대에 앉아 계세요.”
으응. 재효는 침대에 뒹굴고 있는 지호의 속옷을 검지와 엄지로 슬쩍 집어 치운 후 조심스럽게 앉았다. 지하실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숨이 콱콱 막힌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 좋을 텐데. 재효가 뚫어지게 창문을 바라보니까 지호가 마우스를 딸칵거리며 말한다.
“아, 오늘 날씨 춥더라구요. 문을 꽁꽁 걸어 잠가야지.”
“…….”
춥긴 개뿔이! 낮에 30도까지 치솟는 여름인 건 알고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재효는 지호에게 말대답을 할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않았다. 그저 지호가 일을 하느라 모니터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몰래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줄 뿐. 침대에 꼼짝없이 앉아 재효는 하릴없이 속으로 신세타령을 했다.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지호는 왜 하필 나를 불렀던 것인가, 난 언제 느긋하게 자유를 즐길 수 있는가…… 꼬리를 문 질문의 질문은 결국 내가 누군가, 하는 인류의 원초적인 문제에까지 도달했다.
깜빡. 잠이 들었다. 재효는 꾸벅꾸벅 졸던 고개를 잽싸게 들어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창밖이 깜깜하다. 벽시계를 보니 벌써 열시가 훌쩍 넘어 열한시가 다되었다. 워커홀릭 지호는 여전히 일하느라 컴퓨터 삼매경이다. 재효는 입가에 흘렀던 침을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눈을 끔뻑였다. 흠, 으흠. 헛기침 소리를 내도 지호는 자기 일에만 푹 빠져있다.
“지, 지호야. 일 언제 끝나? 안 잘 거야?”
저녁밥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이 지친 몸 하나 편히 누워 자고 싶다. 재효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묵묵부답인 지호의 뒤통수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못들은 건지, 아니면 대놓고 무시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서서히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아까부터 짜증은 났지만 그 정도가 한계치에 다다랐다. 손님을 초대해놓고는 안중에도 없다는 저 싸가지 밥 말아 먹은 태도며 네 시간이 넘도록 감금당하다시피 한 저의 신세에 분노가 불꽃처럼 화악 치솟았다. 나도 할 만큼은 했어! 재효는 벌떡 일어나 지호의 어깨에 손을 짚고 확 자기 쪽으로 당겼다.
빙그르르르르. 지호의 회전의자가 돌아간다.
옆으로 찢어진 지호의 눈에서 빛이 반짝 서렸다. 놀랐는지 평소보다 커진 지호의 동공으로 단단히 심술이 오른 재효의 얼굴이 가득 찼다.
“나 졸려. 자고 싶어.”
잠깐 페이스를 잃었던 지호의 얼굴이 다시 특유의 그 무심하고 시건방짐으로 돌아왔다. 지호는 재효의 요구사항을 곱씹어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하며 시간을 끌었다.
“좋아요. 근데 침대가 일인용이라.”
“그럼 내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안돼요.”
남자답고 잘생긴 지호의 검지손이 재효의 입술을 획 틀어막는다.
“오늘 춥다고 했잖아요. 보일러도 안틀었는데, 거실에서 잤다간 얼어 죽을 거예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개소리인데 지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재효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지호는 심각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같이 방 안에서 자야 해요. 하지만 침대는 좁으니깐…….”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지호가 방밖으로 사라졌다. 재효는 메마른 입술을 혀로 적신 채 지호를 기다렸다.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잠시 후 지호가 라꾸라꾸침대를 들고 나타났다. 창고에 있었던 것을 가져왔는지 먼지가 가득하다. 지호는 대충 손으로 팡팡 털며 침대 옆에 나란히 놓는다. 얇은 이불을 그 위로 던져 놓으며 지호는 재효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서 자요.”
지호의 표정을 보지는 않았지만, 재효는 지호가 악랄한 미소를 띠고 있을 거라고 100% 확신할 수 있었다.
***
공기가 건조했다. 재효는 몸을 뒤척이다가 먼지가 올라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으으, 여기 어디지. 빡빡한 눈동자를 뜨고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던 재효는 자신이 지호의 집에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상기했다. 몹시도 목이 말랐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어둠에 눈이 익어 주변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에 비스듬히 들어온 달빛은 네모난 모양으로 벽을 훑어 내렸다. 시침은 숫자 3에 놓여있었다.
“자네.”
부엌에 나가 어찌어찌 정수기로 물을 마시고 돌아온 재효는 새근새근 잠든 지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버릇이 좋지 못한 지호는 이불을 돌돌 말고 허리는 약간 굽힌 채 자고 있었다. 이럴 때면 영 철없는 동생인데 말이야. 재효는 모니터 뒤쪽으로 나있는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자 지호의 잠든 표정이 한결 더 편안해진다.
“얘는 몇 시까지 작업한거야.”
컴퓨터 본체에서 후끈후끈한 열이 느껴졌다. 아마 밤늦게까지 일 하다가 막, 방금 잠든 것일 거다. 재효는 턱을 긁으며 라꾸라꾸침대에 앉았다. 이렇게 바쁜 녀석이 왜 나를 부른 거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도 아니고.
멈칫. 턱을 긁던 재효의 손이 멎었다. 뮤즈, 라는 단어에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호는 이상하리라 만큼 일할 때마다 자신을 불러놓고는 아무 것도 시키지 않은 채 음악을 작곡하거나, 가사를 작사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호의 작업에 자신이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는 게 틀림없다. 그리 생각하니 재효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니지만 블락비라는 그룹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뿌듯해졌던 것이다.
“재효 형…….”
소리를 죽이고 웃었는데 지호가 잠결에 들었던 걸까. 재효는 지호의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보고 합-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부터 깬 거지? 당황스러웠지만 잠에 취한 지호가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자꾸만 눈을 깜빡이는 게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 지호가 손을 뻗어 재효의 매끈한 뺨을 만지작거렸다. 뜨겁지만 불쾌하지는 않은 감촉.
“재효 형.”
다시 한 번 지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온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심장이 둥둥 뛰었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고, 어둠 속에서 지호의 몸은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효는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그만큼 분위기가 낯설었다. 단 한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지호의 입술이 방긋방긋 움직였다. 두툼한 입술이 만들어내는 궤적을 열심히 눈으로 좇고 있는데 지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느릿한 동작이라서 피할 마음만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효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지호를 기다렸다.
촉. 볼에 말캉한 것이 붙었다가 떨어진다. 지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달빛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지호의 얼굴에서는 예쁘고 투명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딧불처럼. 재효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잘 자요, 재효 형.”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소다.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지호의 웃음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이내 쓰러지듯 지호는 침대에 몸을 파묻고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지만, 재효는 미동도 않은 채 가만히 앉아 터질듯 폭주하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너무너무 이상하다. 재효는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오른쪽 뺨을 손으로 누르며 습기가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 밤 일로 지호와 자신의 관계가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재효는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이것이 부디 좋은 변화이길 빌었다. 시끄럽게 쿵쾅대는 심장박동을 보건데 절대 편안한 일은 아니겠지만.
창틀을 넘는 수줍은 달빛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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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요.....허허..! 잘계셨나요? 옛날에 끄적였던 거 버리기가 아까워 얼른 뒷내용을 추가해 올립니다 소설 제목은 그냥 생각나는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