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손애
" 선왕께서 붕어하셨습니다. "
" … … . "
" 국휼고명(國恤顧命:왕실의 장례를 진행한 36개 절차 중에서 첫 번째로 진행하는 절차.
왕이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여 왕위 계승자를 정한다.)*으로 옹주께 선위 하겠다 유언하셨습니다. "
" … 아. "
" 전하. "
" 돌아가 보세요. "
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빨라진 저의 발걸음에 따르던 궁인들이 잰 걸음으로 뒤를 바짝 쫒아왔다. 새벽달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시간, 궁 내부 에서는 제 군주의 초상과 새 군주의 즉위를 위한 준비가 함께 시작되었다.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나라는 계속된 전쟁과 가뭄, 기근과 역병의 창궐로 신음했다. 왕의 죽음을 기리는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음에 모두가 개탄스러워 했지만 누구 하나 낯빛에 띄우지 않았다. 분주해진 걸음으로 궁을 들어서니, 제 궁의 궁인들이 모두 나와 저를 맞이했다. 소식 한 번 참으로 빠르구나… .
" 옹주, 여왕이 된 기분이 어떠십니까? "
" 어머니께서는 어찌 이 곳에 계십니까? "
" 옹주께서 군주가 될 지언데, 이 너른 궁에 어미가 못 올 곳이 있겠습니까? "
"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매정한 이군요. "
" 눈물 흘릴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이지요. "
" 어머니의 적자가 아닙니까. 그런 말을 하시면서 역복불식(易服不食:왕세자와 대군 및 왕비·내명부·빈 이하 모두가 관(冠)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과 흰 신과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어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은 어찌 하신 것 입니까. "
" …하, 적자라니. 제 배 아파 낳지 않은 적자도 있습니까? "
어머니의 말에 두 눈을 꼭 감았다. 치맛자락을 쥔 손이 떨려왔다. 아마도 나에게 섭정을 권하실 모양이다. 자식이 죽었다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말간 얼굴에 욕지기가 울컥 올라왔다.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웃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어머니를 지나치니, 밖에서 도둑고양이처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 전하. "
" 듣기 싫습니다. 지금 저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마세요. "
" 송구합니다. 허나, 신하된 도리로 한 마디 간언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
" 벌써부터 간언이라니, 빠르기도 하십니다. "
" 전하의 사촌 되시는 이조판서 전치무의 아들, 전정국과 혼인하심이 마땅하다 사료되나이다. "
" 아직 초상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세간의 눈초리가 무섭지도 않나보군요. 선왕께서 붕어하신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리 정치적으로 나를 농락하려 들다니. "
"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
" 그러니 앞으로 가진 시간도 많지요. 나의 혼인은 국혼이오. 어찌 이리 혀를 간사히 놀린단 말이오? "
" … … 송구합니다. "
" 남준, 그대의 충언은 내 가슴 깊이 새겨듣도록 하지. 내가 전정국 그자와 혼인이라… .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
" 저 또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
" 포부 한 번 당찬 분이시군요. "
" 혼인을 하지 않으신다면, 섭정은 어떠신지요? "
섭정,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심히도 나의 심기를 짓눌렀다. 오라버니였던 선왕은 재위 중에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질린 얼굴로 조회에 나가 국정을 논하려 하면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금방이고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하얗게 질려 덜덜 떨리던 작은 손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작고 작던 오라버니, 나의 오라비… . 국가의 대소사를 논하던 대신들은 무능한 군주를 군주로 섬기지 않았다.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나 공주가 없던 오라비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국정과 신료들의 압박에 분사(憤死:분(憤)에 못 이겨 죽음. )* 하였다.
섭정을 시작하면 제 권력이 어머니의 손을 거쳐 이조판서 전치무의 당파인 소론이 틀어쥘 것이 뻔하였다. 소론의 수장만큼이나 핵심 인물인 외가의 이조판서 전치무는 제가 독단 세력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있는 듯하였다. 독단 세력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소론의 권력욕을 잠재울 필요는 있었다. 후궁인 제 어미는 선대에 왕을 지내었던 아버지께서 붕어하시며 사가로 나가 조용히 삶을 살아야 했으나 또 다른 후궁 희빈의 소생인 오라비를 권력으로 적자로 들이어 질기게도 궁 안에 살아남았다. 어머니의 말동무를 자처하여 궁으로 흘러들어와 새치 혀를 놀리는 남준이 그저 우스웠다. 죄인의 아들, 선왕의 친 어머니인 희빈을 독살한 죄를 물어 집안이 무너지고 유배되었다 들었던 죄인의 아들인 남준이 제게 올리는 간언이라니, 신하도 아닌 자가 흘리는 작은 조소에 떨리는 목에 힘을 주었다.
" 이보시게, 내 자네를 격식에 맞추어 사람대접을 해주니 조선의 국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나보군. 어머니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내 자네를 잘 따라 왔네만, 앞으로 그리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걸세.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이 궁 안에 외로이 썩어가던 그 어리석은 옹주가 아니란 말일세. 내 비록 군주의 자질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사실이나, 어찌 천하디 천한 자네보다야 부족할까.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게. 어머니는 내가 잘 구슬려 볼 터이니. "
" … … . "
" 그리고, 앞으로 주제넘게 내 앞을 가로막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한 죄인의 자식 주제에 어딜 감히. "
시선을 내리니 퍽이나 화가 난 듯 부들대는 주먹이 보였다. 그리 화를 누를 시간에, 어서 가서 환복이나 하고 오지 그러나? 혹시 아는가, 자네가 섬기는 주인을 버리고 나에게 오면 자리 하나를 내어 줄지. 잘게 씹어 뱉은 말을 남준의 귓가에 흘려주었다. 권력, 그 것이 나의 긴 생을 옥죄어 올 것이 자명했다. 더욱 더 강해져야 한다. 소론을 잠재우기엔, 노론만한 것이 없다. 이미 멀리 떨어져 점이 되어버린 남준을 돌아보곤 곁에 있던 내관에게 일렀다.
" 노론의 수장인 좌의정을 속히 부르거라. 즉위하지도 않은 조카의 몰락을 기다리는 이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는가. "
" 예, 전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
이른 아침의 해가, 애석하게도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
" 전하, 좌의정 김태성 들었사옵니다. "
" 들라 하여라. "
선왕이 붕어하셨으나 망가져가는 나라로 인하여 강도 높은 업무가 물밀 듯 떠밀려 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 보통 초상난 지 나흘 되는 날부터 입음)*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역복불식(易服不食:왕세자와 대군 및 왕비·내명부·빈 이하 모두가 관(冠)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과 흰 신과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어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음)*의 모습이었다. 법도대로라면 성복 후 사위(嗣位: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성난 민심에 상조차 제대로 치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옹주 시절, 제가 왕위에 오를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남준은 섭정을 하기 위해 저를 철저히 가두었다. 그로 인해 궁 외부의 사람을 만나지도, 군주의 덕을 쌓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였다. 장례는 궐의 장례를 주관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조선 시대에, 장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임시 관아)*에 맡기고, 밀린 국정부터 보기로 하였다.
" 좌의정 오셨습니까. "
" 좌의정 김태성, 전하를 뵙습니다. "
" 앉으세요.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던가. 좌의정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 나의 눈길에 고개를 바짝 숙여왔다.
" 좌의정 그대는, 노론의 수장이라 들었습니다. "
" …전하, 말씀 낮추시지요. "
" 내 이토록 나이가 어린데, 불쾌하지 않겠습니까? "
" 군주는 신하에게 하대를 하는 법입니다. 어찌 높으신 군주께서 존대를 하시나이까. "
" 좌의정은 나를 진정 군주로 생각하시오? "
좌의정이 조아렸던 머리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목을 타고 흐르는 열기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을 국가의 대소사에 잠겨들었던 날 선 눈빛이 나를 꿰뚫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 상이 끝나는 대로, 나는 국혼을 치러야겠지. "
" … … . "
" 좌의정의 장자의 나이가 올해 몇이오? "
" 전하. "
" 어찌 그러시오. "
" 소인의 장자는 신하로서 전하를 성심껏 모실 것입니다. "
" 좌의정은 내가 무어라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
" 본디 부마는 정치에 뜻을 할 수 없사옵니다. 제 장자는 이번 과거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한 김석진 이옵니다. 부디 성총으로 은혜를 베푸시어… . "
" 자네에게는 아들이 둘이지 않는가. "
" 그렇사옵니다. 차남 김태형, 올해 열아홉 이옵니다."
" 차남 또한 정치에 뜻이 있소? 있다면 내 인재를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오. "
" 없사옵니다. "
" 내가 좌의정 자네를 왕의 시아버님으로 만들어 주겠네. "
" …허나, "
" 그리고 자네는, 소론을 잠재울 권력을 얻게 되겠지. "
" … … . "
" 다음에 입궐할 때에는 차남을 데려오게. 나의 낭군이 될 자가 아닌가. "
" 명 받들겠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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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풀이 모아보기-
1. 국휼고명(國恤顧命) : 왕실의 장례를 진행한 36개 절차 중에서 첫 번째로 진행하는 절차. 왕이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여 왕위 계승자를 정한다.
2. 역복불식(易服不食) : 왕세자와 대군 및 왕비·내명부·빈 이하 모두가 관(冠)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흰옷과 흰 신과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어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
3. 분사(憤死) : 분(憤)에 못 이겨 죽음.
4.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 보통 초상난 지 나흘 되는 날부터 입음.
5. 사위(嗣位) :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
6. 국장도감(國葬都監) : 조선 시대에, 장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임시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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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처음으로 글을 써보네요.
사실 저는 역사에 대해 무지합니다.
바보란 소리죠..
그런데 덜컥 이런 사극물을..
저를 매우 쳐주세요..
작중에 나오는 소론과 노론, 그리고 인물들의 이름, 관계는 모두 픽션이니 아무 생각 없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생각 없이 보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인가요?!
사실 전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썼습니다.
이번편은 프롤로그 쯤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탄이들과의 관계는 다음화부터 천천히 풀어나갈 계획입니다.
그럼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