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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정과 기데레 18~20화
W.쿠키가죠아
'여보세요?'
들려오는 저 익숙한 목소리에도 나는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옆에서 혜진누나가 구글거림님하며 확인을 시켜준다. 그제야 진짜 너였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그저 웃었다. 맘같아서는 너 어떻게 된거냐,며 무지막지하게 따지고 싶었지만, 방송 녹화중인 관계로 일단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몇번을 전화해도 안받던 놈이, 이 전화연결때문에 그렇게 안받은거였냐…
"너 왜 전화 한거야?"
'나, 너 비밀얘기하려고 전화했지'
얄미운 소리 참 잘도 해댄다. 세 MC들이 내가 그동안 얘기했던 것들을 확인하려고 자철에게 묻자 녀석은 무조건 부정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없다한 것도 no, 잘 놀줄 모른다 한것도 no. 날 제대로 잡은 듯 나에게 불리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녀석이다. 기어코 손금얘기까지 꺼낸다. 와씨, 지가 물어봐서 그래도 녀석을 상대로 시범까지 보여주면서 손까지 잡아줬는데 이런식으로 말하다니… 어디냐는 물음에 독일로 떠나는 비행기 안이란다. 내가 이얘길 이렇게 들어야하는거냐… 쳇 마지막엔 여자 만나지 말라는 충고는 절대 잊지도 않는다. 괜히 빨리가, 하며 심통을 내니 마냥 웃는다. 결국 먼저 전화할게, 하니 그제야 녀석도 응, 나중에 전화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독일에 떠나는 길에 준 뜻밖의 선물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전화 안받고 걱정시킨 값은 나중에 톡톡히 받아내고야 말테다. 결국 자봉이의 말에 힘을 얻어 MC들이 춤을 강요했고, 춤까지 추고나서야 생각보다 길었던 녹화가 끝이 났다.
이 이후에는 청와대에서 메달리스트 만찬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단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왔음에도, 생각보다 늦게 청와대에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는 모든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했지만, 자봉이 같은 시즌을 앞에둔 해외파들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자봉이 옆에 있었을테지만 녀석이 없는 관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방황하고 있을 때, 찰싹 붙어있는 동원과 태희를 보게되었다. 자철에게 둘이 사귄다는 소리를 듣고나서 처음 마주치는 상황, 그 소리를 듣고 둘을 보고 있자니 왜 여태껏 눈치 못챘나 싶을 정도로 알콩달콩해보인다.
"어? 성용형!"
싱글벙글 웃던 두 녀석도 날 발견했는지 태희와 동원이 손을 흔들며 아는척을 한다. 그제야 멀찌감치에서 둘을 감상하던 나도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잘어울리네, 한마디 던지며 태희 옆의 빈자리에 앉으니 태희가 키득키득 웃곤 자철에 대해 얘기를 꺼낸다.
"자철형은 독일 잘 갔대요?"
"글쎄, 아까 비행기라던데. 그런놈 알게뭐냐"
내 심드렁한 말에 태희도 동원도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또 싸웠어요?! 하며 묻는 동원의 말에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내가 일방적을 화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트러블이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싸울게 그리도 많아요?"
"누가 들으면 볼때마다 싸우는 줄 알겠다?"
"맞잖아요"
"맞잖아요"
"…"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하는데, 대꾸할 말이 없다. 누군 싸우고 싶어서 싸우냐?!
"왜 우리한테만 이래? 너희도 싸울거아냐,"
"음… 딱히 없는데요?"
내 질문에 둘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동원 없다고 말했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짓고는 태희에게 다시 확인하려 했지만, 순수하게 베시시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닫았다. 아니, 두달 가까이 사귄다면서 한번도 싸운적이 없다고? 가만… 이것들 시계때문에 싸운거 아닌가?
"야, 구라치지마. 너네 전에 시계랑 나때문에 싸웠잖아"
"에이, 그건 싸운게 아니죠. 동원이 저녀석이 일방적으로 잘못한거지. 저녀석 그때 엄청 빌었다구요 저한테"
태희의 이상한 논리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두녀석은 오히려 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형들은 한번 싸우면 워낙 심하게 싸우잖아요. 워낙 서로 안지려고들 하니까 싸움도 계속 커지고. 뭐, 워낙 그렇게 지내던 두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그게 습관되면 안되죠"
"맞아요, 져줘야 할 때 져주는것도 필요하다구요"
"그런가, 근데 그게 생각보다 몸이 먼저나가버려서 맘대로 안되는걸 어쩌냐"
"에이, 그걸 고쳐야죠!"
"…됐어, 귀찮아"
끝내 안좋게 나오는 내 대답에 두녀석의 반응은 달랐다.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닫는 동완과는 달리 태희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형, 계속 그렇게 하면 자철형이 독일에서 바람날지도 모른다구요."
"뭐?"
갑자기 튀어나온 바람에 관한 얘기에 내 반응이 커졌다. 동원도 그건 생각 못했었는지 눈이 커졌다. 자세를 바로잡고 태희를 바라보자 녀석은 검지손가락을 펴들고 좌우로 흔들더니 쯧쯧, 혀를 찬다.
"자철형은 독일로 갔고, 형도 곧 이적하는 곳으로 가버리면 이제 한동안 못만날텐데, 그런 식으로 하다간 자철형도 외로울거라구요"
"외로우니까… 바람을 핀다고, 그녀석이?"
"에이, 태희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ㄷ…"
"모르는 소리!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
"거기다 자철형, 정호형이랑 같이 갔잖아요. 정호형하고 한동안 같이 생활할텐데 자연스레 맘이 그쪽으로 가게될 수도 있는거 아니겠어요?"
"헛소리 하지마. 내가 아는 구자철은 그럴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절대"
"그건 아무도 모르는거죠."
"태희야. 그만해 내가 아는 자철형도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태희 말을 듣고 있던 내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며 심각해지자, 옆에 있던 동원이 태희를 말렸다. 그에 태희의 입으 조용해지긴 했지만, 한번 어질러진 머럿속은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구자철이 바람을 핀다고? 말도 안된다. 그녀석은 절대 그럴 걸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겨우 계속 부정하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버렸다. 괜한 말을 해서 심기를 건드린 태희 녀석의 이마를 한대 쥐어박았다. 녀석이 동원을 보며 울쌍을 지었지만, 동원이도 맞을만 했다고 느낀건지 그냥 이마 한번 쓰다듬어 줄뿐 별말없었다.
청와대 만찬이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서초동 집에 도착했다. 자철은 아직도 비행 중인지 아직 연락도 없고, 몸을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멍하니 누워있다 어느샌가 잠이 든 것 같다. 꿀맛같은 단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띵동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이시간에 누구지? 올사람도 없는데, 별안간 울리는 종소리에 하는 수 없이 지친 몸을 강제로 일으켜 현관문을 향했다. 누군지 확인해보니 누나가 고개를 숙인채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자마자 갑작스럽게 안겨오는 누나에 당황했지만, 곧 안으로 들어왔다. 누나는 소파에 앉았고, 나는 누나와 마주보도록 바닥에 앉아 누나를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눈이 팅팅 붓고 화장이 다 번진게 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울었어? 무슨일이야?"
"성용아… 성용아… 흐어어어엉"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누나다. 심각한 일이라도 생겼나, 워낙 밝은 성격이 장점인 누나가 이렇게 크게 울정도면 보통 심각한게 아닌데… 하지만 여자 울음이 낯선 난 누나 옆으로 가 등을 토닥거리는 일밖에 해줄 수 없었다. 거의 한시간을 아무말없이 울기만 하던 누나는 서서히 눈물을 닦으며 진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응… 훌쩍…"
"대체 무슨일이야?"
"… 애인이 해외로 떠난대"
"뭐?"
"남자친구가 해외로 출장간대잖아… 흐엉, 무려 3년이라고. 어떡하면 좋니… 나 따라가야하나?"
"…"
머리가 어지럽다. 지금 애인이 출장간다고 이렇게 운거였어? 평생 거기서 사는 것도 아니고, 겨우 3년 출장가는… 그것도 맘만 먹으면 직접 가서 만날 수도 있으면서 그렇게 울어댄거냐…
"난 또 뭐라고, 고작 3년가지고 왜 그리 소란인데."
"얘는! 3년이 얼마나 긴시간인지 모르니? 불타오르던 사랑도 다 식어버리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혹시라도 거기서 다른 여자랑 눈맞으면 어떡해…"
"그런 사람이면 그냥 만나지마"
"뭐야?! 넌 여자친구도 있는 애가 왜그리 여자맘을 몰라? 그게 마음대로 되면 그게 사랑이니?"
"여자친구 없어.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가면 되잖아."
하도 당당하게 사랑타령 하기에 쿨하게 따라고라고 말해봤지만, 이번엔 또 우물쭈물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도… 일하러 가는건데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애인이 따라가는건 불편해할 것 같아서…"
"거참 답답하네 진짜."
"… 너 진짜 여자한테 못됐다. 여자친구한테도 그러니?"
"아, 글쎄. 여자친구 없다니깐."
"너 그러다 나중에 벌받아, 애인한테 잘해"
"… 왜 갑자기 얘기가 그리로 튀는건데."
"아 맞아, 아무튼 난 이제 어떡하면 좋아… 흐앙…"
휴… 안그래도 지친 몸이 더 지쳐간다. 일단 이렇게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하면 기본 2시간 이상은 걸리는데… 편히 쉬기는 글러버린것 같다. 역시나 2시간을 넘겨서야 겨우 잠든 누나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아까는 그냥 넘겨버렸단 말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정호형하고 같이 지내다보면 자연스레 맘도 그쪽으로 가게될 수도 있는거 아니겠어요?'
'3년이 얼마나 긴시간인지 모르니? 불타오르던 사랑도 다 식어버릴 시간이라고!! 혹시라도 거기서 다른 여자랑 눈맞으면 어떡해…'
… 처음엔 나와 자철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 생각하며 넘겼지만 계속 떠오른다. 혹시라도 이 말들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물론 녀석과 다시 얼굴을 보기까지 3년이나 걸리진 않고, 녀석은 절대 그럴만한 녀석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만약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 이후로는 도무지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상상은 되긴 하겠지만, 생각하기 싫었다. 울고불며 난리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일 것 같아서, 그런 내가 너무도 보기 싫어서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구자철, 넌 어떤거냐…, 믿어도 되는거지?
***
다음날 오후가 되서야, 누나는 팅팅부은 눈으로 일어나 밥을 하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굳이 자기가 하겠다는 말에 물러섰다. 부엌에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근데 꺼져있다…? 아차, 어제 촬영전에 구자철에게 전화를 하다 안받아 열받아서 그냥 꺼버렸는데, 그걸 계속 잊고 있었다. 어쩐지 폰이 계속 조용하더라니… 폰을 키기가 무섭게 디링디링, 시끄럽게 울려대는 각종 알림음에 정신을 못차렸다. 한참이나 울려대던 폰이 진정되고 확인해보니, 이건 뭐… 테러수준이다.
목록에는 거의 누나와 자철이었고, 간혹 동원이나 주영형, 정호도 보인다. 누나에게 온것은 죄다 우리집에 오기 직전에 연락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게 아니었구나… 근데 왜 전화 안받냐는 말도 없었지? 자철의 연락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벽에 올라온 트위터 멘션을 보아하니 도착을 알렸음에도 연락없는 내가 걱정되어 전화한 듯 하다. 그 사이에 정호 번호가 섞여있는 걸 보면 아마 이것도 자철일 것 같은데? 동원과 주영형의 연락도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자철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몇번의 신호가 가더니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녀석이 아닌 정호였다.
'여보세요?'
"아,"
'성용형, 오랜만입니다. 하하'
"정호냐, 그래 오랜만이네. 근데 왜 니가 받아?"
'아아, 자봉형 지금 설거지해요.'
"설거지?"
'네, 가위바위보에서 졌거든요.'
"아, 그래?"
설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가정적인 남자가 됐대? 어울리지 않는 구자봉의 모습을 상상하며 대답했다. 통화하는 정호의 말을 들었는지 저 멀리서 누구냐? 하는 자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에 정호가 성용형이요, 대답하자 뭐?! 소리를 지르더니 두두두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엔 녀석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성용이?'
"응,"
'너 뭐야, 전화한다던 놈이 폰은 왜 꺼놔?!'
"어제 꺼놓고 깜빡하는 바람에, 설거지는 어쩌고?"
'어? 아, 괜찮아. 지금은 니가 더 중요해.'
… 녀석의 구글거리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악! 형 징그러워. 하는 정호의 목소리에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호의 말에 자철도 반응하며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런 나를 눈치도 못채고 자철은 죽어라 정호와 장난을 치기 바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그런 말도 들은 상태라 기분탓이겠거니 고개를 저었지만, 섭섭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구자철,"
이자식이, 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지 일분도 안지났거든…? 내가 조용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자, 그제서야 녀석이 나와의 대화에 집중한다. 촬영은 잘 끝난거야? 녀석의 질문에 그제야 묻고 싶던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너 이자식 방송에서 이상한 말을 왜 하는데?"
'내가 언제 이상한 말 했냐?'
"내가 언제 여자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야, 니 폰에 여자 번호 많은건 맞잖아.'
"그렇다고 내가 언제 연락 한번 했었냐? 그쪽에서 주니까 그냥 받아놓기만 한거 너도 알잖아. 굳이 안해도 될 말이었는데 왜 하는데,"
'…그래야'
"그래야?"
'그래야 사람들이 너한테 안붙을 것 같아서'
"뭐?"
'너 여자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놈이라고 해두면 사람들이 알아서 실망하고 안 달라붙을것같아서'
녀석의 말을 이해하고 얼굴이 제멋대로 달아올랐지만 퉁명스럽게 거친 말을 내뱉었다. 아씨, 전화라도 다행이다. 이 얼굴을 녀석이 봤으면 또 놀려댔겠지.
"… 뭐라는거야, 이 미친놈이."
'아, 몰라. 너 내가 그랬다고 여자들 진짜 좋아하기만 해봐. 일일이 쫓아가 그 앞에서 확 키스해버릴거니까'
"미친, 독일에 있는 놈이 말은 잘해요. 너나 잘해"
'나?'
"너야말로… 그… 아, 씨발! 됐어, 그러든지 말든지!"
녀석에게 바람피지 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말이 나가버렸다. 그러나 내말을 녀석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인건가…? 뭐? 무슨말이야, 내가 뭘? 하며 되물어온다. 그에 나는 잽싸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우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를 나누었다.
"전화기 뜨겁다."
'아, 나도 그러네. 더 하고 싶지만 옆에서 정호녀석이 자꾸 보챈다. 이만 끊어야겠어'
"정호가 왜?"
'아아, 살 거 있으니까 같이 나가자는데'
"…그래, 알았어"
'응, 나중에 연락할게. 그때는 꼭 한번에 받아'
그렇게 전화를 끊어지자 나는 한동안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낼 수 없었다. 자철이도 정호도 믿지만, 한번 엄습한 불안감이라는 것은 역시나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 통화에서만도 몇번이나 느꼈는지 모르겠다… 입숙을 꽉 깨물고, 폰을 잡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정신을 차린건 누나의 터치에 의해서였다. 얘, 하며 나를 툭 건드린 누나는 입술에서 피가 난다며 난리를 친다. 피? 그러고보니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아, 멍하니 있는 나를 누나가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얘, 정신 좀 차려. 누구랑 통화했길래 그렇게 얼이 다 빠져있어?"
"어? 아… 그냥 좀,"
"…?"
"…"
"어머나, 혹시 여자친구?"
내 어정쩡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누나가 손뼉을 치며 하는 말에 난 나도모르게 움찔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누나가 또 소란스러워졌다. 진짜 있긴 하구나, 하며 묘한 웃음을 짓는 누나의 모습이 왠지 짜식, 벌써 이렇게 커버렸구나. 하는 것 같아서 멋쩍었다. 글쎄, 여자친구는 아니래도… 답답한 마음이 일었지만 누나는 끝까지 여자친구 타령을 고집하며 물었다.
"근데 여자친구랑 통화하면서 표정이 왜 그래? 싸우기래도 했니?"
"… 별로"
"어머, 진짜 싸웠나보네? 무슨일로 싸웠는데?"
"그런거 아니야,"
"여자맘은 여자가 제일 잘 아는거야, 이 누나가 제대로 상담해줄테니 어서 말해봐."
그러니까, 여자가 아니라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누나의 말에 살짝 흔들렸다. 그래, 연애도 해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속는 셈치고 한번 들어나보자. 후…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결국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자철의 이름은 빼고… 내 얘기를 다 들은 누나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넌 나보다 먼저 이런 상황에 놓여 있었으면서 어제 나한테 그따위 위로를 한거니?"
"… 난 딱히 위로 한 적 없는데?"
"기성용!!"
내 말에 발끈해서 소리를 지르던 누나는 이내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고민하기 시작한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고개를 젓고는 진지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성용아, 부른다.
"왜,"
"너 진짜 큰일이다. 암만 봐도 위험하잖아 지금!"
"뭐가?"
"휴, 성용아. 누나가 어제 운게 진짜 괜히 운건 줄 아니? 원거리연애하다 헤어지는 커플들이 그냥 많은게 아니라구!"
"…"
"거기다 옆에 다른사람이 있다고? 그럼 말 다한거지. 아무리 그럴 맘 없다고 해도 옆에서 하나하나 챙겨주고 챙김을 받다보면 사람맘은 그리로 가게 되있다고"
"말도 안되, 둘다 그럴 녀석들이…"
"얘가 진짜! 몇번을 말해. 사람 마음이라는 건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니까!"
누나의 말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린다. 괜히 말했다는 후회도 들고 속으로 연신 누나의 말을 부정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때,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용아, 너 내일, 아니 지금이라도 한번 직접 가서 얼굴 보고와,"
"… 뭐?"
"애인 있는 곳에 가서 얼굴 하루만이라도 보고 오라구, 그래도 아예 안보는 것보다는 나을거야. 그것도 직접 가주는거니까 더 감동받을테고"
"아무리 그래도 … 이렇게 갑자기?"
"그럼 나중에라도 좋으니까 꼭 가! 내 말 들어!"
"…"
"알았니?"
"후… 알았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니 누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가방을 찾아 나갈 준비를 한다. 어디가게? 물으니 나도 얼굴이나 한번 더보려구, 하며 웃는다. 그 웃음에 나도 피식 웃으며 누나를 배웅하려 일어났다. 현관문까지 나선 누나는 갑자기 돌아서더니 성용아, 힘내. 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누나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게되면 후회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그건 나중일이니까 일단 지금 현실에만 집중하자. 그래, 그게 우선이다.
하지만 그날도, 다음날이 되어서도 독일까지 떠나자는 마음은 그리 쉽게 먹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 일단 사람들 눈이 있었고, 또… 누나의 말을 빌어 진짜 녀석에게 방해라도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동안 자철에게서는 연락 한통이 없었다. 겨우 내 트윗에 답글 하나정도? 그러는바람에 화가 날대로 끝까지 제대로 나버린 나는 언제가냐는 녀석의 물음에도 가는건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딱딱한 대답만 했다. 녀석은 다음날에도 역시 전화 한통 없었고, 정호녀석과 어딘가로 놀러가 찍어 올린 사진에서나마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결국 독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끝을 내더라도 얼굴을 보며 얘기를 하고 싶어서 바로 독일행 표를 끊었다.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 괜히 뜬소문이 날까 모자에 선그라스까지 끼고 얼굴을 최대한 감춘 채 비행기에 탑승했다. 녀석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녀석에게서 계속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냥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응, 성용아'
"누나, 나 지금 떠나려고"
'떠나? 아! 애인한테 가는거니?'
"… 응"
'어머어머, 그래 잘생각했어! 만나서 너의 마음 다 털어놓고 와!'
"응, 누나… 고마워"
'얘는, 별말을 다하네. 그렇게 고마우면 빠른 시일내에 애인 얼굴이나 보여줘'
"… 응, 알았어"
'어머? 진짜? 약속한거야?'
"알았다니까."
호호, 웃으며 마지막까지 우리 성용이, 화이팅! 을 외치며 전화를 끊는 누나다. 아무튼… 누나덕분에 한 결심이기도 하니까. 새삼 다시 고마워진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가는 내내 녀석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녀석은 뭐하고 있을까. 나를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어린애처럼 자철을 놀래켜주는 일에 묘하게 들떴다. 앞으로 다가올 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지금 자철에게 가까워지는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긴 비행시간에도 잠 한숨 못자고 도착한 독일은 저번 런던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도 영어가 되니, 길 잃어버리진 않겠지…? 했지만, 난 자철의 집으로 가는 길 자체를 모른다. 일단 자철에게 연락은 못하니, 하는 수 없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자철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철에게는 꼭 비밀로 해달라며 부탁하고 자철의 집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매니저가 직접 와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나야 나쁠 것 없으니 흔쾌히 받아들였고 곧 매니저가 공항에 도착했다. 자철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매니저가 갑자기 왜 온거냐며 물었지만, 난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자철이 보러왔어요… 할 순 없잖아?
자철의 집은 공항에서 꽤 멀었다. 하지만 홈경기장에서는 꽤 가까운 거리인 것 같다. 집 앞에 도착하자 매니저는 나를 따라 같이 올라온다. 음… 이제 가도되는데, 그러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같이 문앞에 섰다. 벨을 누르려고 하는 순간 매니저가 잽싸게 먼저 벨을 누른다. 아씨, 내가 누르고 싶었는데… 옆에 웃으며 서있는 매니저를 흘깃 노려보고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옆의 매니저는 어? 정호랑 나갔나? 중얼거리며 벨을 재차 눌렀다. 그래도 열리지 않는 문에 매니저가 나에게 일단 자신의 집에 가있자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금방오겠죠, 하고는 계속 기다려보겠다는 뜻을 전했다.
"괜찮겠어요? 많이 늦어질수도 있을텐데…"
"괜찮아요. 바쁘시면 먼저 가보셔도 되요."
"자철이한테 연락해보는건 어때요?"
"아니요, 절대 연락하시지 마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볼게요"
"흠… 알았어요. 너무 안온다 싶으면 다시 연락해요. 데리러 올게요"
때아닌 나의 고집에 매니저도 의아해했지만, 결국 알겠다며 자리를 떴다. 약 한시간을 기다렸을까… 다리가 슬슬 아파왔지만 아직은 참을만했다. 또 녀석이 우리 집 앞에서 5시간을 기다렸던 그 날을 생각하면 꽤 참을만했다. 두시간 째…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세시간 째… 바닥에 털썩 앉았다. 네시간 째… 전화기를 꺼내 들고 자철의 번호를 눌렀다 지웠다 눌렀다 지웠다… 다섯시간 째… 전화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팔은 다리를 감싸고 머리를 묻었다. 여섯시간 째…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돌려진 내 고개가 그대로 멈췄다. 지금 내눈에는 자철과 정호가 하하호호 웃으며 껴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멍하니 바라보던 내 입이 힘겹게,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구…자철…"
내 목소리에 안고 있던 둘은 내 쪽을 보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둘은 황급히 떨어졌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마치 못된짓하다 걸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는 둘의 눈빛에 내 눈동자는 더 심하게 흔들렸다. 왜 그렇게 봐? 웃으면서 인사해야지… 그래야 나도 웃으면서 아니구나, 안심을 하지…
"…"
"서…성용아, 너 어떻게 여기ㅇ…"
"성용형!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한참의 침묵 끝에 자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등장에 많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런 자철에 옆에 있던 정호가 웃으며 내쪽으로 다가와 주저앉아있는 내게 손을 내밀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난 그 손을 한참 바라보았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마치 자기집마냥 행동하는 정호에 약간 기분이 안좋아졌다. 예전같다면 웃으며 서슴없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났겠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기분이 못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 손을 잡는 순간 주먹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주먹을 꽉 쥐며 그 손은 무시한 채 스스로 일어났다. 정호가 멋쩍은 듯이 웃었지만, 내 눈은 구자철을 향했다.
"설명해봐,"
"응?"
"설명해보라고,"
"뭘 설명하라는거야?"
"모두 다. 연락은 왜 갑자기 끊었고, 어디를 갔다왔고, 내가 봤던 상황이 대체 뭔지."
"… 너 지금 나 의심하는거냐?"
"의심할만한게 있긴 한가보네."
"기성용"
"말해보라니까."
다짜고짜 설명하라고 하자 녀석은 당황했지만 이어지는 내말에 표정을 굳혔다. 내 표정은 아까 이미 굳어졌다. 의심하냐는 녀석의 질문에 비꼬며 대답하자 녀석이 인상을 찡그린다. 변명할 생각은 안하고 인상만 찡그리고 있는 녀석이 맘에 안들었다.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한 녀석의 표정에 기가 찰 뿐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정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리려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녀석의 손을 탁, 쳐버렸다. 녀석이 놀라고, 나도 놀랐지만 티내지 않았다. 그러자 구자철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진다.
"야, 기성용. 너 뭐하는거냐"
"내가 뭐, 너야말로 뭐하는건데"
"지금 도대체 무슨말이 듣고 싶은건데"
"듣고싶은 말따위 없어. 그저 니가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했을 뿐이야"
"기성용, 너 진짜!"
"씨발, 개새끼. 꺼져버려"
"뭐?"
"아, 아니지. 내가 꺼져줘야하는거지"
어째서 니가 화내는거지? 잘못은 니가 한거잖아… 근데 정호 손 한번 쳐냈다고 왜 그렇게까지 화내는거냐? 씨발, 거지같네. 이곳에 더 있다가는 내가 이상해져버릴 것 같다. 녀석은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짐을 챙겨들고 녀석을 지나쳤다.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았지만 뿌리쳐버렸다. 손목이 잡히는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리가 풀릴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티며 내려왔다.
"Airport please. (공항이요)"
무작정 나와 택시를 잡아 타긴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대로 돌아가야 하는건가? 하… 돌아가면? 이렇게 녀석과는 끝나는건가? 아씨, 눈물이 나려한다. 밀려오는 배신감과 이대로 끝이라는 허탈감에 아무 생각할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행 표를 끊으려고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영국행 비행기표를 끊고 청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Hello'
"나야, 성용이"
'어? 왠일이야? 요새 전화 뜸하더니'
"나 지금 영국간다."
'뭐?'
나 영국간다,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전화를 끊었다. 청용이 당황하며 나를 불렀지만, 그냥 끊어버리고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구자철, 이 개새끼. 내가 청용이 얘기만 하면 그렇게 화를 내더니 지는 홍정호랑 같이 살고, 거기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해? 그래, 가버려라. 홍정호랑 잘 살던지 말던지 이제 내가 알바아니다.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독일에 간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식으로 뒷통수를 칠 수 있는거지. 그런 자식 쯤 깨끗이 지워버릴테다. 영국에 도착해 게이트로 나오자 저 멀리 청용이 보였다. 두리번두리번 하던 청용이 날 발견하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온다.
"기성용!!!"
"여어, 이청용. 몸소 마중까지 나왔냐?"
"너 어떻게 된거야?! 그런식으로 전화하고 다짜고짜 영국까지 오고"
"피곤하다. 나 하루만 재워줘라."
대답않는 나를 보며 큰 한숨을 쉰 녀석은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청용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얼굴을 묻었다. 그런 내게 다가온 청용이 침대에 걸터앉아 아까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기성용, 이제 말해봐. 어떻게 된거야"
"… 청용아"
"응,"
"나 이제 어떡하냐"
"……?"
"나 이제 어떡하지, 잊을 수 있을까? 그동안의 일들을 다 잊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잘 살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좀 말해봐"
"…개새끼"
"뭐?"
"씨발, 개새끼라고! 흐어엉"
얼굴을 묻은 채로 입을 열었지만 청용은 알지 못하는 일이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다 욕까지 하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녀석이 아무말도 못한다. 녀석의 손이 슬며시 내 등을 두드린다. 천천히 토닥이는 녀석의 손길에 한참을 울었다. 녀석 앞에서 이렇게 우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참을 울고나면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더 울적하고 자철, 그 개새끼만 계속 생각날 뿐이었다.
"청용아, 너 내일 시합나가냐"
"아직, 그건 왜?"
"그럼 우리 술마시자"
"술?"
"응, 간단하게 맥주라도 괜찮아"
"간단하게 좋아하네, 와인 한잔에도 비틀거리는게"
"… 그래도 오늘은 좀 마시자고, 제발"
내 강요에 녀석은 하는 수 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동원이다, 이녀석이 왠일이지. 전화를 받으려는데 맥주가 없다는 청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엑, 절규하는 내 반응에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나가서 사오겠다했고, 이청용 짱을 외치며 녀석을 내보냈다. 그제야 잊고있던 전화가 생각났다. 하지만 전화벨은 더이상 울리지 않았다. 전화를 다시 할까 말까 하는 고민하는 사이, 다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형! 어디에요?'
"그건 왜,"
'형, 독일 갔다면서요'
"… 끊어"
'어어? 형?! 잠깐만요'
내가 독일에 온 것을 알고 있다면, 그건 구자철이나 홍정호와 통화를 했다는 것이다.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녀석의 처절한 만류에 잠시 멈췄다.
"뭐냐,"
'형, 믿어요.'
"뭐?"
'사실 믿고 싶잖아요. 그럼 믿어요'
"…"
'형, 쓸데없는 생각같은거 하면 안되요'
"… 끊는다"
동원이 하는 말에 또다시 머리가 어지럽혀진다. 기껏 잊겠다 결심했는데 또다시 그 결심이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결국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통화종료버튼을 누르고서도 한참을 휴대폰만 바라봤다. 동원이 했던 말… 무슨 의미지? 이녀석은 뭔가 알고 있는건가? 내가 오해라도 했단건가? 그래도… 그건… 그건… 순간 자철과 정호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엔 김보경이다. 이녀석한테까지 말한건가… 또다시 혼란스러운 말을 듣기 싫어 받지 않으려 했지만, 끈질기게 몇번씩이나 걸려오는 전화에 그래도 녀석의 마음이 신경쓰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형님!'
"그래, 넌 또 뭐라고 할래"
'네? 무슨말이에요?'
"…? 나한테 할 말 있는거 아니냐?"
'아, 있죠. 형, 근데 언제 해외나가셨어요?'
보경이 이녀석은 아직 상황을 전해듣질 못한 모양이다. 안받았으면 상처줬을 뻔 했네… 피식 웃으며 녀석의 질문에 그냥 놀러, 하며 얼버무렸다. 녀석은 아무 의심없이 그래요? 하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이것저것을 말하던 녀석은 갑자기 자철에 대해 물어봤다.
'하하, 그렇구나. 고마워요 형님. 근데 자봉형이랑은 잘 지내요?'
"…"
'응? 왜 대답이 없어요? 혹시 잘 안되는거에요?'
"… 그냥 좀"
'에이, 알콩달콩해도 모자랄 시간에 벌써부터 싸우면 어떡합니까?'
"시끄러"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얼른 풀어요.'
실실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녀석의 말에 순간 울컥했다. 이녀석 은근히 즐기는 것 같은데… 그때 마침 맥주를 사서 돌아온 청용에 보경과의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전화 끊는 순간에도 얄미운 소리를 해대는 보경덕에 소리를 질러야했지만, 그래도 보경과의 전화 덕분에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었다. 사온 맥주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두 개를 꺼내온 청용이 옆에 털썩 앉았다.
"자, 받아라."
"땡큐,"
"그래서, 언제말해줄건데"
"…"
"… 아까 그거 구자철 얘기지?"
녀석에게서 맥주를 받아들고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역시나 녀석이 또다시 물어본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있는 것도 갑자기 찾아온 청용에게 미안한 일인 듯 해서 입을 열려는 찰나, 녀석의 입에서 먼저 구자철의 이름이 나왔다. 깜짝 놀라 눈이 커진채로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전에, 올림픽 때 살짝 눈치챘어"
"어째서…?"
"솔직히 니가 운 이유가 구자철이라는게 좀 놀랍긴 했지만, 평소 둘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했지"
"…?"
"니네 둘, 평소에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은 서로 둘이 눈마주치며 웃고 있었거든."
"우리…가?"
"그때 자철이가 널 끌고 갈때도 놀랐지만 그날 밤에 녀석한테서 전화가 왔어."
"뭐? 그때 전화를 했어?"
뜻밖의 말에 소리가 커졌다. 그때 분명 자철은 내가 청용에게 전화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에 전화할 때도 그렇게 난리를 쳤으면서, 녀석이 밤에 전화를 했다고? 좀 더 자세히 들려달라고 녀석을 보채자 녀석은 진정 좀 해, 하며 난색을 표한다. 대체 그 녀석, 무슨 생각인거야, 그녀석은 항상 날 다 알고 있는 듯 한 행동을 하는데 난 왜 그녀석에 대해 아는게 이리도 없는거지?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녀석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녀석의 생각 한번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난 녀석의 생각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이청용, 자세히 말해봐. 알고있는 것들 다 전부 말해보라고"
다음화부터는 |
자철시점 갑니다 ㅋㅋ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