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에서 돌아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PC방에서 열심히 손가락을 놀려대고 있을 옹성우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오늘 삘 탔는데 왜 불러내고 난리냐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쌍욕을 날리던 옹성우에게 이미 나온 주제에 말이 많아. 그럼 나오지 말던가. 하고 일침을 날려주자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하여튼 김여주 인성 쯧쯧, 양심적으로 술은 네가 사라. 비싼몸 불러냈으면 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하고는 열심히 안주를 주문했다. 양심 팔아드셨어요? 당연히 돈은 반반 모르냐?
너는 열심히 떠들어라 나는 열심히 먹을게라는 마인드를 실행중인 옹성우에게 너 내일이 없어? 오늘만 사는 게 목표야?라는 눈빛을 쏘아주자 그제서야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경청하는 척 하였다.
'그래도 너희 이제 20살인데 고딩 때처럼 유치하게 싸우겠냐, 너만 유치하게 싸움 안 걸면 돼.‘ 누가 보면 나만 유치하게 싸움거는 줄 알겠네. 나도 싸우기 싫다고. 니 말대로 이제 나도 20살인데 책 몰래 감추고 실내화 던지면서 놀고 싶겠냐.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인상을 찡그린 옹성우가 입안으로 계란말이를 입안으로 밀어 넣기 무섭게 평온을 되찾았다. 여기 계란말이는 언제 먹어도 존맛인 듯. 엄지까지 치켜올리며 계란말이를 하나 더 입속으로 집어넣는 옹성의 모습을 보며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거지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바로 당연하지 네가 다니엘이랑 앞으로 유치한 싸움을 계속 할거라는 거까지 똑똑히 들었는데. 라는 개소리를 늘려놓았다. 아 놔, 강다니엘 자식 처리하기 전에 이 자식 먼저 처리할까.
앞으로 모른 척 서로 터치하지않고 시비도 털지말고 지내자는 내 말에 강다니엘의 표정은 쓴 한약이라도 먹은 것 마냥 구겨졌다. 뭐가 문제래, 설마 아직도 고딩때마냥 나를 괴롭히고 싶다거나 싸우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곤란한데.. 나는 앞으로 그림같은 선배들과 꽃피는 캠퍼스 생활을 할거라고.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다. 오죽하면 엄마가 이해가 가게 끔만 이유를 대면 용돈 이만원을 올려줄게라고 하는 말에도 2년 동안이나 용돈을 올려 받지 못했다지. 결국에는 2년 동안 용돈을 올려달라고 설득하는 것에 실패한 딸내미가 애잔해서 엄마가 그냥 용돈을 만원 올려줬었다.
말을 잘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아주 먼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실패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능날 언어영역을 풀 때보다 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용돈 이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부탁을 할때보다 더 정성스럽게 앞으로의 꽃길과 같은 내 대학생활을 위해서 인생의 머리를 써가면서 말을 하는데, 내 노력을 아는지 조급한 내 심정을 안는지 모르는지 강다니엘은 내가 말을 하는 내내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람이 앞에서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으면 인간적으로 듣는 척이라도 좀 해줘라. 멱살을 잡으며 '그냥 우리가 피터지게 싫어하던 사이라는 거 말하지 말고 동기 사이로 지내자고! 그게 그렇게 어렵냐 이 못된 자식아!!'라며 소리치고 싶은 본능을 꾹꾹 눌러 담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던 말이 사실인건지,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강다니엘의 얼굴에서 연애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하였다. 오~ 그래 너도 역시 연애에는 관심이 많구나, 딱 걸렸어.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내내 무표정이었던 강다니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며 내가 원하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성운선배를 떠올리며 걸어 들어갔다. 선배 좀만 기다려요, 지금 기분으로는 아침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벽에 기대서 어쩐지 시무룩해 있는 성운선배의 옆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아까 채워두었던 술잔을 잡았다.
왜 혼자 들어왔어, 다니엘은? 하고 묻는 주연선배의 말에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온데요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왜 아직 안 들어오는 거지, 담배라도 피는가
그래 그래 좋은 자세야, 동기들끼리는 친하게 지내야지라며 좋아하는 주연선배의 모습에도 신경은 온통 강다니엘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얘 왜 이래 내가 들어가고 나서 잠깐 사이에 누구한테 뒷통수라도 후들겨 맞았나, 방금 전에 어색한 동기로 지내자고 내가 분명 말했고, 내가 지금 정신이 이상한게 아니라면 너도 동의한 걸로 아는데.
갑자기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와서 왜 나랑 친하게 지내겠다는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짓껄이는지..?
소리 내어 웃던 옹성우는 책상에 붙어있던 의자를 내 침대 옆에 가져와 앉으며 다시 실실댔다. 그만 웃는 게 좋을 걸 아침인데다가 어제 음주를 많이 해서 입에서 얼마나 거친 말들이 튀어나올지 나도 감당이 안 되거든. 역시나 눈치로 먹고 사는 옹성우는 내 표정을 살피고는 금세 웃음을 멈추었다.
어제 컨디션이 좋지않았는데 과음을 한탓에 기억이 중간중간 끊겨있었지만, 옹성우가 나 안주 하나 더 시켜도 돼?하고 묻는 말투로 ‘나 다니엘이랑 계속연락하고 지냈어.’라고 말을 한 건 똑똑히 기억이 났다.
옹성우가 내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강다니엘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치고받고 싸우긴 했지만 셋이서 붙어 다녔고, 그때 강다니엘과 옹성우는 친해보였으니까.
전학을 가기 전 유치하게 ‘옹성우 너 강다니엘 자식이랑 붙어다니지도 말고 말도 하지마’라는 협박을 옹성우에게 남겼다. 전학을 가고 초반에는 옹성우에게 너 강다니엘이랑 친구아니지?라는 확인을 종종 했고, 그때 마다 네가 강다니엘이랑 놀지말라고 해서 친구 하나도 없으니까 아픈 곳 그만 찌르지.라며 답을 해왔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에야 나의 유치함을 인정하며 옹성우 너 그냥 강다니엘이랑 놀아도 별말 안할게. 라고 말을 했었는 그때 옹성우는 지금 처럼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1-9반이라고 적힌 반의 뒷문을 벌컥 열며 소리를 치면,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가 이내 아 또 김여주야? 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하던 일을 하였다. 4월달부터 내 반 드나들 듯이 방문을 한 결과였다.
니엘아는 얼어죽을. 강다니엘은 그렇게 다정한 이름으로 불릴만한 애가 아니라고. 강다니엘의 옆에 붙어서 수학문제를 묻고 있는 애는 한달 전부터 강다니엘 곁을 떠나지 않는 우리학교 여신 박지현이었다.
이건 이렇게 풀면 더 쉽게 풀려. 다정하게 박지현에게 문제풀이를 해주고 있는 강다니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서 열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니, 지금 내 귀여운 피카츄필통에 낙서를 해놓고 감히 웃고 있어?
아니 나는 강다니엘을 불렀는데, 왜 니가 대답하세요? 강다니엘을 열심히 따라다니던 박지현은 항상 나를 경계하며 싫어하는 티를 냈다. 나도 여기 오기 싫거든, 너랑 강다니엘 둘 다 싫어서. 박지현의 얼굴을 열심히 째려준 후, 강다니엘이 들고 있는 샤프를 빼앗았다. 갑자기 들고 있던 샤프가 없어진 강다니엘은 그제서야 얼굴을 들고 나를 봤다.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면서도 눈은 비웃음을 담고 있는 강다니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끔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손에 들고 있던 필통을 강다니엘에게 던졌다. 얄밉게 가볍게 필통을 잡아든 강다니엘은 책상위에 내려놓았다.
귀엽던 내 피카츄의 양 뺨에 ‘강다니엘♥’라는 끔찍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오늘 당장 필통 새걸로 바꿀거야. 책상위에 떨어진 필통을 확인한 박지현은 인상을 쓰며 와 김여주 존나 끔찍하네 싫어한다면서 필통에 하트적고 다니냐 소름. 이라며 짓껄였다.
나의 성질머리는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 예쁘게 땋은 머리를 잡아당기는 애가 있으면 유치원 놀이방에 있는 미끄럼틀까지 쫓아가서 머리카락을 뽑았었고 , 내가 아끼던 지우개에다가 컴퍼스로 상처를 낸 짝궁에게는 그 구멍난 지우개를 다 쓸때까지 몰래 책상위에 지우개똥을 올려놓곤 했었다. 나의 성질머리에 대해서 일찍부터 염려가 컸던 엄마는 항상 나를 앉혀 놓고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거나 잘못을 한 애들에게 똑같이 되갚아주면 안 된다는 걸 교육시켰다. 그리고 다행히 엄마의 수년간의 노력 끝에 여전히 성질머리가 안좋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내 노트를 말도 없이 한 장 쭉 찢어가는 학우를 보고도 너그럽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말이다.
그런데 요새 들어서 얌전해진 성질머리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인은 단 한 가지였다. 강다니엘.
강다니엘을 향해서 커다란 목청을 자랑해주고는 가방위로 삐죽 솟아있는 한국지리 책을 들고 튀었다. 한 박자 늦게 내가 한국지리 책을 가지고 튀었다는 사실을, 다음시간이 바로 한국지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강다니엘이 다급하게 교실을 나왔다.
신나게 한국지리를 들고 놀리고 있는데, 쓸데없이 다리는 길어가지고 벌써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강다니엘이었다.
복도에서는 때 아닌 달리기가 펼쳐졌다. 야,김여주 거기 안서냐? 잡히면 진짜 죽는다. 뒤에서는 강다니엘의 짜증섞인 말이 들려왔지만, 오히려 그게 나를 더 신나게 만들었다.
복도에 있던 애들은 또 나와 강다니엘이 싸움이 붙었구나하며 태연하게 구경을 하다가도 신기하다는 듯 한마디씩 하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여름방학이었으면 좋겠다. 왜 나한테는 시간을 빨리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지. 오늘은 새학기 첫날이었다. 이미 오늘 입을 완벽한 코디를 정해놓았고, 화장을 할 시간도 충분했다. 개강이니까, 오티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한 잘생기고 예쁜 선배들도 볼 수 있을 터였다. 모든게 완벽했고 좋았다.
그런데 정말 너무 학교에 가기 싫었다. 이건 모든 완벽한 기분도 우울하게 만들 강다니엘 때문이었다. 학교에 가면 강다니엘이 있다. 오늘은 신입생 환영회가 있다. 강다니엘은 날 보면 또 개소리를 하면서 짜증나게 굴것이 분명했다. 벌써부터 그려지는 우중충하고 스펙터클할 내 앞날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냥 자퇴할까.
도둑도 제발 저린다고. 지 욕하는 건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톡을 보내 온 강다니엘이었다.
아직 소중한 성운선배 번호도 못받았는데, 대학와서 처음 받은 번호가 이새끼 번호라니. 나도 참 딱하다. 역시 자퇴가 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