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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 너, 나, 그리고 우리
w. 달 월
-첫번째 브금입니다 필청이에요!
01.
애들 챙기지만 말고, 너부터 먹어.
-두번째 브금입니다 들어주실 거죠?><
푸드코트에서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목을 파고드는 느낌에 몸을 작게 떨었다. 1월. 완연한 겨울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에 속이 뚫릴 만도 한데 무언가가 턱하니 걸린 갑갑한 느낌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눈앞에서 피어났다가 흩어져 사라졌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땅 꺼지겠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맑게 웃고 있는 석진이 서있다. 내 옆에 서 나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여는 석진이다.
"날씨 좋다. "
"그러게. "
"여주야. "
"응? "
"...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재밌게 놀고 가자. "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둔 채로 말하는 석진에 아무 말 못하고 멀뚱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그제야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힘들 땐 한숨 쉬지 말고, 이 잘생긴 얼굴 보고.
그럼 그렇지. 언제 진지했냐는 듯 대뜸 손키스를 내게 날리고는 차를 향해 걸어가는 석진이다. 그래, 일단은 돌아왔으니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마음 편히 놀자, 하고 작게 읊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듯 빠른 발자국 소리에 뒤를 돌기도 전에 내 목에 팔을 두르고는 해드락을 건다. 아, 김태형, 진짜. 찰싹찰싹 내 앞에 보이는 손을 때리니 팔을 풀어 내고는 헤실헤실 웃는 태형이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아, 하라며 내 입에 호두과자를 넣어주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다.
맛있죠.
뭐, 맛있긴 하네. 제 입에 다람쥐처럼 쏙쏙 호두과자를 집어넣고는 얼른 차로 가자며 나를 이끄는 태형을 따라 차 쪽으로 걸어갔다. 차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앉으려다가 말고 화물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화물칸에 올라타니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박지민이었다. 그러다 인기척에 나를 발견하고는 제 옆자리를 톡톡 친다. 그 행동에 옆에 가 쪼그려 앉으는 나를 보고는, 내 주변 바닥을 매만지더니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연다.
"근데 여기 추울 텐데. 괜찮겠어요? 바닥도 차다. "
"괜찮아. 이 정도면 양호하지, 뭐. "
"잠깐 기다려봐요. "
몸을 일으켜 저 끝 쪽에 있는 종이 박스에서 한참을 뒤적이더니 담요를 찾아서는 내게 둘러주는 지민이다.
"달리면 춥더라고. 감기 걸려요. "
"고마워. 하여간 엄청 챙겨요. 사람 민망하게. "
"우리 홍일점인데, 당연한걸. "
홍일점은 무슨.
살짝은 부끄러워 괜히 툴툴거리니 말없이 웃는 지민이다. 얼마 가지 않아 남준이도 화물칸에 올라탔고, 차가 출발했다. 살짝 춥기는 하지만 상쾌한 바람이 내 볼을 스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바다와 가까워져서 그런가 바다 내음이 살짝 어려있는 것도 같고. 살짝 고개를 드니 노을이 천천히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을이 내는 붉은빛을 받으며 김남준은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고, 박지민은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서는 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
팔꿈치로 툭, 하고 팔을 치니 가볍게 웃는 지민이다. 내 질문에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머리를 뒤쪽에 기대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내가 지금 가는 이 길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나, 춤 계속 춰도 될까.
천천히 흘러나온 지민이의 말에서 꽤나 무게감이 느껴져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제 자신에게 던지는 답을 낼 수 없는 공허한 질문 같았다. 그래서 나도 지민이처럼 잠시 동안 답을 하지 못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충분히, 너무 잘하고 있어. "
"... "
"먼 훗날에 지금 이 시간을 돌아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면 잘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내가 보기에 지민이 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정말요? "
"응, 그리고 우리 아직 젊어. 시간도 많고. 잘 모르고 불안한 게 당연한 거 아닐까. "
"누나, 이럴 때보면 애 늙은이 같아. "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좀 흔들리면 어때. 힘들 땐 이렇게 우리한테 얘기도 하고. "
"누나. "
"어? "
"고마워요. 매번 이렇게 고민 들어주고. 지금 이렇게 다 같이 여행 온 게 꿈만 같아. "
"그래, 놀 땐 놀고, 할 땐 딱, 하고 그러면 되는ㄱ... "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뭐, 좀 있다가 다들 축하해주긴 할 테지만.
민망한지 머리를 긁적이는 지민에 어떤 말을 하는 대신에 웃어 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바로 앞에 바다가 보였고, 차가 멈춰 섰다. 차례차례 차에서 내린 아이들이 기지개를 쭉 펴고는 탄성을 내지른다.
"바다다! "
"야, 다들 알지? "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자세를 취하는 아이들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모래사장까지 달리기, 시작! 가장 늦게 오는 사람 물에 빠지는 거다. "
김태형의 목소리를 끝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와다다 달려나가는 뒷모습들에 고개를 저었다. 못 말려, 진짜. 자리에 멈춰 서 그 모습을 보는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마음 한켠이 시렸다. 분명 너무 예쁜데. 하늘에 떠있는 저 노을도, 붉게 물든 바다도, 그리고 그 바다로 달려가는 저 청춘들의 모습은 너무 찬란한데, 한편으로는 너무 아렸다. 그래서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담았다.
"야, 이여주, 뭐 해. 너 빨리 안 오면 빠뜨린다. "
따라오지 않는 나를 찾아내고는 뒤를 돌아서 소리쳐대는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간다, 간다고.
헉헉대며 간신히 애들을 따라잡았지만, 너무 늦게 출발한 탓에 꼴등은 내 몫이었다. 한 겨울에 어찌나 열이 나게 뛰었는지 전정국은 송글송글하니 땀이 맺혀서는 일등을 했다며 좋아하고 있고, 김태형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있었고, 거리를 좁혀왔다. 직감적으로 이건 피해야 한다, 하는 생각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데 내 양팔을 턱, 하니 잡아내는 손들에 그들을 올려다보니 김석진과 정호석이다. 그리곤 사악하기 짝이 없는 태형이의 고갯짓에 끄덕이더니 나를 거의 끌고가다 시피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다로 천천히 걸어간다.
"... 애들아? 지금 물에 들어 가려는 건 아니지? 지금 한 겨울이야. "
"당연히, 우리는 안 들어가지. 그러니까 누가 꼴등하래? "
"바다에 왔으면 시원- 하게 한번 입수하셔야죠, 누님. "
별 같지도 않은 누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곤 나를 꽉 잡고 있는 정호석을 노려보니 아랑곳하지도 않고 저벅저벅 물에 살짝 젖어 있는 모래 위를 걷는다. 얘네 진짜 미쳤나 봐.
"야, 내가 잘못했ㄷ... 악! "
내 처절한 외침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 나를 물속으로 밀어내는 힘에 그대로 바닷속으로 입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차가워. 살을 애는 듯한 차가움이 온몸에 퍼진다. 홀딱 젖었네. 킥킥대며 해변에 서서 나를 보고선 수건을 건네는 전정국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수건을 건네받는척 하며 물을 손에 담아 확 뿌렸다.
야, 이거 수건 이거 밖에 없는데, 다 젖었잖아요. 아, 누나!
"지금 네가 수건 걱정을 할 때가 아닐 텐데. "
사악한 내 웃음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달아나려는 정국이의 바짓 가랑이를 잡아 물속으로 확 이끌었다. 그 덕에 바지가 반쯤은 젖어서는 입술을 꾹 물고 있는 정국이의 모습이 우스웠다. 해탈을 한 듯 한숨을 푹 내어쉰 정국이가 내게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을 읽은 나는 정국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물속에 있던 정국이가 쏜살같이 해변가로 나가 카메라로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던 태형이를 잡아들었다.
"정국아, 정국아, 잠깐만 이거, 이거 카메라... 아! "
카메라를 들고 있던 태형이지만 지금 정국이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게 뻔했다. 잡아든 상태 그대로 바다로 힘껏 태형이를 던져버린 정국에 태형이는 그대로 입수를 하게 되었고 - 다행히도 카메라는 위로 들고 있어서 그랬는지 멀쩡했다. - 태형이를 시작으로 김석진, 박지민, 김남준, 민윤기, 정호석을 순으로 모두 흠뻑 젖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금이 한 겨울인 사실도 잊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던 것 같다.
"아, 진짜 누나 때문에 수건 망했어. "
물에서 나와 흠뻑 젖은 수건을 쭉 짜며 나를 째려보는 정국에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비웃으래, 하고 답했지만 물 밖으로 나오니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갈아입을 옷이 있긴 한데 차 쪽에 있어서 한참을 가야 했다. 아, 진짜 미쳤지. 이 날씨에. 물에서 나온 김태형도 팔을 비비며 덜덜 떨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나저나, 김남준이랑 김석진은 어디 갔나, 하고 두리번 거리니 저 멀리에서 옷가지들을 잔뜩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구세주다, 구세주. 한참 놀 때 차에 갔다 온 건지, 품에 가득한 수건과 패딩을 하나씩 건네준다. 그 수건을 받아 간단히 물기를 털어내고 패딩을 입으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다들 마찬가지인지 한참을 말이 없더니 금세 시끄러워진다.
"다들 모여봐. 해 지기 전에 사진 찍자. "
사진 찍는다는 석진이의 말에 또 옹기종기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그 모습을 담고 싶었다.
찰칵-
"잘 나왔다. "
"아, 이여주! "
작게 읊조리며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석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른 오라며 내게 손짓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 껴서 멀뚱히 렌즈를 보는 내게 고개를 훅 들이미는 태형이다.
누나, 웃는 얼굴-
풉, 뭐야. 양 볼에 손가락을 푹 찔러 넣고는 한껏 웃는 표정을 짓는 태형이가 귀여워서 웃음이 번졌다. 그 순간 찰칵, 하고 셔터 음이 울렸고 사진이 찍혔다. 폴라로이드에서 사진이 나왔고, 그 사진을 흔들어 말리고 있는 석진에게 다가가니 내가 제일 예쁘게 나왔다며 내게 사진을 건네는 석진에 사진을 확인을 하니 정말이다. 태형이 덕에 자연스레 터진 웃음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진짜 잘 나왔네. 나 이거 주라. "
"그래, 너 가져. 가지고 가. "
가지고 가, 라니?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말인데, 유독 오늘 석진이의 표정에서 자꾸만 슬픔이 보여서 그의 말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영영 나를 어디 떠나보내는 사람처럼,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석진에 질문을 던졌다.
"너 평소랑 달라. 무슨 뜻이ㅇ... "
"야, 불꽃놀이하자. 저기 편의점에서 팔길래 싹다 쓸어왔어. "
내 말을 툭, 끊어 내고는 내 손에 폭죽을 하나 쥐여주고는 폭죽이 가득한 봉투를 들고는 애들에게 하나하나 폭죽을 나눠준다. 진짜 김석진 오늘 이상하네. 어느새 노을이 진 하늘은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세번째 브금입니다 다 다른거니 들어주세요!
다들 폭죽을 하나씩 들고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휘두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읏챠, 하고 일어나 폭죽에 불을 붙이고 그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와, 형. 나 이런 거 처음 해봐요. 진짜 예쁘다. 누나 불꽃 대박."
사그라들어 가는 폭죽을 들고는 멈춰서선 내가 들고 있는 불꽃을 보고 있는 정국에 내 폭죽을 건네니 나 이거 해도 돼요? 하곤 맑게 웃는다. 그래, 정국이 하고 싶은 거 다해. 정국이가 들고 있던 거의 타버린 폭죽을 내 것과 바꿨다. 탁탁 소리를 내며 작은 불꽃을 끝으로 불꽃이 꺼졌다. 아쉽다. 예뻤는데. 폭죽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살피니 아직도 불꽃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 때문인지 아이들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깜깜해진 해변가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
"야, 너무 좋다. 형, 누나, 우리 매년 이렇게 여행 와요. 우리끼리. "
정국이는 제 말버릇인 야, 야 거리며 다 함께 또 오자며 벅찬 목소리를 낸다. 그런 정국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자라는 뜻으로.
누나, 이거 가져요. 내가 가져가서 미안.
정말 자기가 폭죽을 가져가서 내가 운다고 생각했는지 폭죽을 내 손에 쥐여주는 정국이다. 이것도 이제 꺼질 때가 됐는지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 때문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니 모두 심각한 일인줄 알고 자리를 잡고 내 주위를 빙 둘러앉는다.
"슬퍼서 운거 아냐. 그냥, 너무 행복한데. 정말 행복한데, 그런데 눈물이 나더라. "
"... 진짜 괜찮아요? "
"응, 그리고 애들아, "
운을 띄우는 내 말에 모두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이 정적을 잠시 동안 매웠다.
"고마워, 이렇게 나랑 여행 와줘서. 너무 행복하다. "
내 말이 낯간지러웠는지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아이들을 둘러보니 모두 옅은 웃음을 띠고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누나가 우리랑 와준 거지. "
"그러니까. "
"오히려 우리가 할 말이야. 같이 여행 와줘서 고마워, 여주야. "
남준이의 말을 끝으로 아, 오글거려 이제 가자, 하고는 저 멀찍이 걸어가는 민윤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제 가자. 탁탁 모래를 바지에서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민윤기에게로 달려갔다.
"근데, 우리 숙소는 잡았어? "
"응, 완전 럭셔리 한 곳으로다가. 기대해. "
"오? 어딘데? "
"차 타고 좀 가야 돼. "
그렇구나.
묵묵하게 고개를 숙이고 걷던 윤기가 그와 발을 맞춰 걷는 내게 뭐라고 말을 한다. 너무 작게 웅얼 거리는 탓에 뭐? 하고 되물었다.
고맙다고. 같이 와 줘서.
툭 말을 내뱉고는 부끄러운지 저만치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윤기에 웃음이 터졌다. 행복하다, 정말. 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이토록 황홀한 일이란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네번째 브금입니다 필청이에요!
02.
다들 물에 젖었던 옷들이 여전히 축축한 탓에 이 좁은 좌석칸에 8명이 꽉 끼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좁고, 춥고, 배고프고. 거지가 따로 없었다. 그나저나 저녁은 안 먹나.
"아, 아. 형, 밀지 좀 마요. "
"나도 좁아. 아, 배고파. "
또다시 투닥거리는 태형이와 정국이다. 다들 배고프구나. 안 그럴수가 없지. 그래서 우리 밥은 언제 먹어? 하고 운전대를 잡은 석진이를 쳐다보는데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아,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갑 잘 가지고 있지? 하고 물어보니 아무 말이 없다. 느낌이 좋지 않다.
"형, 설마. 없는 거 아니죠. 아까 우리 점심까지만 해도 있었잖아. "
"아니이- 그러니까 전정국, 아까 네가 나 물로 던져서 지갑 없어졌다고. "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하는 석진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오늘 쫄딱 굶게 생겼네.
"그럼 우리 오늘 아무것도 못 먹어? "
"아니, 방법이 아예 없는 거는 아니야. "
"뭔 소리야. "
알 수 없는 석진이의 말에 모두가 의아하고 있을 때, 도로를 달리던 트럭은 터널 속으로 들어왔다. 트럭이 터널 중간 즈음을 지나가고 있을 때 석진이가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잘 하는 거 있잖아. "
"... 뭐? "
양아치 짓.
끼익-
엄청난 굉음을 내며 트럭을 옆으로 돌려세우는 석진이다. 진짜 미친게 아닐까. 아마 우리 중 가장 숨겨진 또라이는 김석진일 거라 단언할 수 있다. 확실히 정상은 아냐.
석진이가 차를 돌려 터널을 막은 탓에 길이 막힌 터널 속 차들은 빵빵 거리며 경적을 울려대었고, 우리는 차례차례 차에서 내렸다.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는 한 명씩 손에 스프레이를 들었다.
"어떻게 하는지 알지? "
내 손에 빨간 스프레이를 쥐여준 민윤기가 비열한 표정으로 씩 웃는다. 그래, 이 짓 한두 번 하냐. 간만이네.
일렬로 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진짜 어떻게 한 명도 빼지 않고 똑같은 놈들만 모였는지. 물론 이 사이에서 함께 소리치고 있는 나도 정상은 아니고. 힘껏 소리를 지른 우리는 서있는 차들의 라이트들이 스포트라이트인 양 당당하게 차들 사이를 걸었다. 앞장서 걷던 김태형을 시작으로 차례로 차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워- 뭐 줄거 있으면 창 밖에 던져놔봐요. "
"없으면 뭐, 어쩔 수 없고. "
씨익 웃어보이곤 손에 들고 있던 스프레이를 몇 번 흔들어 보이고는 크게 차에 엑스 표시를 만들어내는 태형이다. 저 사람 저거 지우려면 돈 꽤나 깨지겠네.
이어서 박지민은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물컵에 있던 물을 차에 쏟아내고는 기분 좋다는 듯 웃어 보였고, 민윤기는 이 차, 저 차들을 기웃거리며 차 문을 발로 뻥뻥 차기도 했다.
"야, 구했다. 튀어. "
민윤기의 외침에 모두 여전히 길을 막고 있는 트럭을 지나쳐 터널의 끝으로 뛰어갔다. 워낙 빠르게 달리는 탓에 현저하게 나는 뒤떨어졌는데 잠시 멈춰 서 나를 기다리고는 내 손을 꼭 붙들고는 함께 뛰는 태형이다.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살짝 가슴속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을 뛰어 터널의 끝에 다다랐을 즈음, 트럭이 우리 옆에 와 섰고, 우리는 급하게 트럭 위로 올라탔다. 그리곤 뒤따라 오는 차들을 약 올리며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 여주 누나 진짜 겁나 못 뛰어. "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태형에 모두 인정이요- 하고 얄궂게 답을 했고 나는 헉헉 거리느라 대답을 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있어. "
"하나, 둘... 열여덟, 열아홉. 19만 원. 충분하다. 배 터지겠네, 오늘. "
지폐를 능숙하게 세던 윤기의 말에 숨죽이고 있던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쟨 어떻게 저런 돈을 얻어왔대. 짭짤한 수입에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간만에 재밌었다. 그치. "
"응, 근데 형들 아까 누나 봤어요? 아주 차에다가 아트를 하던데. "
정국이의 말에 모두 야, 여주 그림 잘 그리더라, 하고는 어깨를 토닥인다. 뭐, 그 정도 가지고. 우뚝 솟은 어깨에 키득거리던 정국이가 최고였다며 엄지를 치켜든다. 그러다 보니 도착했다는 석진의 말에 차에서 내렸고, 나는 이마를 탁, 짚었다. 그리고 민윤기를 찾았다.
"윤기야, 진짜. 너무- 럭셔리하네? "
"이 정도면 일급 호텔이지. 얼마나 넓어."
거짓말도 아주 수준급이네.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은 럭셔리한 호텔도, 그 흔한 모텔도 아니었다. 어두침침한 폐창고. 남준이는 그럴 줄 알았다며 저벅저벅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우리도 뒤따라 들어갔다. 넓기는 엄청 넓네. 다행히도 드문드문 있는 형광등에 불은 들어오는지 마냥 깜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와 한참을 걸어 들어오니,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가 하나 있었다. 이런 게 다 있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다들 자연스럽게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간다. 그러다 석진이가 짜증 난다는 듯 한마디를 내뱉는다.
"아, 또 침대 없어. "
"... 또? "
"아, 아니. 침대가 없네. "
"형, 형. 여기 있어요. "
정국이의 손끝을 따라가니 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매트릭스가 눈에 들어왔다. 매트릭스를 발견한 지민이는 그 위로 풀썩 몸을 뉘었고, 그걸 발견한 태형이는 곧바로 고자질을 했다.
"남주니 형- 지민이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대요- "
"얼씨구, 박지민. 그렇다면- "
너나 할 것 없이 지민이를 깔아뭉개기 시작한다. 지민이 위에 남준이, 그 위에 태형이, 그 위에 호석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게 다가와 입을 연다.
"진짜 저것들 언제 철드려고 저러냐. "
"김석진 네가 할 말은 아닌데. "
"... 여주 나랑 장 보러 가자. 근처에 마트 있어. "
민망하단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장을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하는 석진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걷는 석진을 따랐다.
"우리 장 보러 갔다 온다. "
-마지막 브금입니다 끝까지 들어주실 거죠?><
다녀오라며 손짓을 하는 아이들을 두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 털털 거리며 시동이 걸리고 아까에 비해 넓어진 좌석에 편하게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운전대에 기대어 있는 석진에게 말을 건넸다.
"김석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
"또 무슨 소리야. "
"평소랑 느낌이 좀 달라. "
"... 여주야 뭐 먹고 싶어,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
"봐봐, 또 이렇게 말 돌리지. "
내 말에 후, 하고 한숨을 내뱉은 석진이와 내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감돈다. 그것도 잠시 낮아진 석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곧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즐기자. "
이 말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김석진은 알고 있구나. 지금 이 상황을.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란걸. 나도 이 기분에서 아직 깨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곤 이 허상 속에서의 꿈인지, 석진이의 말인지 모를 말을 끝으로 잠시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먼 훗날에도, 지금의 너를 절대로 잊지 마. 하지만 너무 힘들어하지는 말아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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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 지적 감사히 받겠습니다.
- 혹시 보고 싶으신 리퀘있다면 마구마구 던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