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와 편의점 알바생의 상관관계
08
드라마 하나 따놨다. 두꺼운 대본을 내밀며 던지는 이사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렵게 얻은 거니까 대본 리딩 연습 열심히 해. 소파에 앉는 이사님을 앞에 두고 대본의 표지를 봤다. 드라마 제목이 큼지막하게 써져 있었다. 나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곤,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의 호들갑에 이사님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너가 제일 잘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해. 응?"
나와 눈을 맞추며 내뱉는 말에 괜히 며칠 전 화장실에서 선배와의 일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 잘 할 수 있어요. 내 믿음직스러운 대답에 이사님의 미소가 그 어느때보다 환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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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나와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당연 편의점이었다. 알바생에게 나 걱정 하지 마세요- 라는 의미로 대본을 보여주려 하기 위함이었다. 대본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유리창으로 안을 쳐다보았다. 알바생은 카운터 안쪽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문을 두드릴까, 아니면 그냥 갈까 고민하고 있던 나는 문에 달려있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게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맣게 들리는 종소리에도 남자는 많이 졸린 듯, 눈을 뜨지 않았다. 살금살금 걸어가 카운터 앞에 선 나는 얼굴을 내밀어 남자에게 가까이 했다. 창균씨- 라고 부를 참이었다. 하지만 조금 민망한 마음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이 남자는 어떻게 가까이서 봐도 이렇게 잘생겼나 싶었다. 그리고 그 때,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눈을 떴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빼려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더 빨랐다.남자는 내 머리를 감싸 뒤로 못 빼게끔 하곤, 입을 열었다.
"뭐할려고 그렇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어요."
"......"
"뽀뽀라도 할려고 그랬어요?"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난 아닌데요! 소리를 지르곤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능청스레 모르는 척하고 눈 감고 있을까요?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냥 자고 있길래 깨워 줄려고 했던 거예요.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한 뒤 웅얼웅얼 내뱉는 답에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도저히 나의 말을 믿어주려고 하지 않자 나는 급히 대본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남자의 눈이 여러 번 깜빡였다.
"사실 오늘 대본 받아서... 창균씨한테 말해줄려고 왔어요."
"이런거 들어 줄 사람이 창균씨밖에 없어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더듬거리자 내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본 남자의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그럼 누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어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는 물음에 나도 그를 따라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뭐, 길게는 안나오겠지만. 나의 말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누나 나와서 오래간만에 볼 게 생겼네요."
"진짜 볼거예요?"
"그럼요. 누나 예쁜 모습 챙겨봐야죠."
나는 배시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안 봐도 되는데- 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나오는 드라마를 챙겨봐준다는 한 마디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곧, 스태프들과 선배님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거라는 생각 하나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는 떨어뜨렸던 시선을 들어올려 남자와 눈을 맞췄다. 아마 저 또 왕따되겠죠. 연기를 하는 동안 좋은 소리보다 안좋은 소리를 더 많이 들었기에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다시금 눈을 깜빡였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 하면 힘빠져서 아무것도 못해요."
"그럼 힘빠질때마다 창균씨한테 전화해도 돼요?"
"......"
"창균씨 목소리 들으면 힘이 좀 날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내가 말을 뱉어놓고도 민망해 눈을 굴려야 했다. 우리 사이에 밀당이라기엔 뭐하지만 내가 남자를 당기고 있었다. 나의 뜬금 고백에 남자는 의외로 무척이나 좋아했다. 남자는 수줍게 웃으며 나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누나가 전화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받아줄 수 있어요.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쑥쓰러운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 큰 목소리를 냈다. 진짜죠? 나 진짜 계속 전화 할 거예요! 장난스레 눈을 흘기자 남자는 능글맞은 대답을 내놓았다.
"김여주 남편으로써 꼬박꼬박 받아줄게요."
"...자꾸 그런 소리 할거예요?"
"뭐가요?"
"미래의 창균씨 여자친구를 위해서 그런 농담은 그만 하죠."
대본을 품에 안으며 하는 소리에 남자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정리를 하지 못해 부스스해진 머리를 정리해주는 남자의 손이 따뜻했다.
"저 한 번 한 말은 지키는 남잔데."
"......"
"어떻게 알아요? 나중에 이 농담을 들을 사람이 또 누나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