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
심야<心惹> 약국
written by. 참이슬
-마음을 이끄는 약국, 그 열두 번째 이야기-
12:50 PM.
어깨를 두드리는 독서실 총무의 손길에 그제서야 머쓱하게 웃으며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나 됐지. 빠른 손길로 책을 가방에 욱여넣고 가방을 메어 엘레베이터 앞에 섰다. 형한테 야식 사간다고 할까. 핸드폰을 보며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누군가가 앞길을 막아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뭐하고 사나 했더니, 이제와서 찐따 코스프레 하고 다니는거냐? "
" 응. 학교 다닐 때 못해봤던거 이제서야 좀 하려고. 왜. "
" 킥킥킥 얘 좀 봐. 이동혁, 안 어울리는 짓 그만해. 너도 힘들거 아냐. "
" 너 할머니 돌아가셨다며 왜 우리한테 말 안했냐 존나 섭섭하게. "
" 그냥. 나 간다. "
무표정한 얼굴로 애들을 지나쳐 가려했지만 나를 붙잡는 손길에 힘이 실린걸 보아하니. 오늘 약국 알바가기는 글렀다. 후우, 문자라도 남길 시간은 있어야 할텐데. 애들 얼굴에 비친 살기는 그럴 틈도 주질 않을 느낌이네.
* * *
" 헉헉... 그 쪽엔 없나요? "
" 네. 없어요. 경찰에 신고할까요? "
" 하아, "
올해 들어 최고의 한파를 맞이했다는 날씨임에도 나는 이마의 땀을 훔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져버린 알바생 동혁이 때문이었다. 급한 나머지 일하고 있는 여주씨에게 까지 도움을 부탁한게 무색하게도 이동혁은 이 동네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고, 무서운 감정 마저도 생겼다. 울상을 짓고있는 여주씨를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괜히 불렀나 싶으면서도 여주씨 마저 없었다면 나도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약국에 들어와 경찰서에 갈 채비를 했다. 자켓을 입고 있는데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잠시 영업을 중단한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 김여주씨 어딨죠? "
" 아, 재현씨! "
저 사람이구나. 나는 굳은 표정으로 지갑과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말없이 둘을 지나쳐 문에 간단한 사정을 담은 영업일시중지 종이를 붙였다. 힘겹게 뒤를 돌아 여주씨를 마주했다. 민형씨, 저도 갈게요. 나는 여주씨를 한 번, 그 남자를 한 번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여주씨. 혼자선 버거운 일인데, 같이 가줄래요?
" 괜찮아요 여주씨,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
" 아뇨. 같이 가죠. 이대로 가면 여주씨도 편치는 않을 테니까요. "
" ..... "
차마 입술이 안 떨어졌다. 대신 작은 한숨을 쉬며 약국의 모든 조명을 끈 뒤 문을 잠궜다. 차를 타기전 나도 모르게 여주씨를 부르려다 그만 두었다. 여주씨와 눈이 마주친 것 같지만, 내 착각이겠지. 운전대를 잡기 전 복잡한 마음에 담배를 물었다. 백미러를 조절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 정말 표정 관리 못 하는구나. 하지만 애써 감추고 싶은 마음도, 겨를도 없었다. 연기를 내뱉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동혁이에게 전화를 했다.
- .... 여보세요.
받았다.
" ...! 동혁아, 동혁이니? 너 어디야. "
- 형, 놀랐죠. 미안해요. 급해서 연락할 틈도 없었네.
" 이동혁, 너 어딘데. 그것부터 말해. "
- 여기.. 음, 글쎄다. 쿨럭.. 아, 여기 어디지.
손에서 땀이 났다. 분명 괜찮은 상태가 아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동혁아 괜찮아? 너 동네에 있니? "
- 네. 여기 근데.. 여기가 어디냐면,
나는 그대로 차를 뛰쳐나왔다. 달리는 나를 향해 무어라 외치는 여주씨에게 말할 틈새도 없었다. 미친듯이 쉬지않고 언덕을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여주씨가 사는 집 건물 뒷편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토할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건물 틈을 지나 재활용하는 쓰레기장을 두리번 거리는데,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동혁이가 있었다.
" 어.. 진짜 금방 왔네. "
" ...이동혁. "
어
서
오
세
요
심
야
<心惹>
약
국
" 멍 조금 든거 가지고 무슨 응급실이에요.. 쪽팔리게. "
"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해? 지금 상태가- "
" 여주씨, 제가 잘 돌볼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이만 가보세요. "
" 여주씨 말대로 응급실 가시죠. 의사들한테 정확한 검사와 진단을 받는게 이런 작은 약국에 있는거보단 환자한테 훨 낫지 않을까요. "
" ...조언 감사해요. 하지만 저도 이 애가 죽는걸 원치는 않으니, 죽게 냅두진 않겠죠. "
" 아.. 알겠어요 민형씨, 재현씨. 이만 가봐요. "
두 사람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둘 만의 자리가 마련되자. 주인님이 먼저 말꼬리를 텄어요.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잘 안들리네요. 하지만 분명 좋지 않은 이야기임이 틀림없어요. 빨간 머리, 아니 지금은 갈색 머리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거든요. 최대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어요.
" 이제 말 좀 해줄래? 너 때문에 10년은 더 늙은 것 같아. "
" ....진짜 죄송해요. "
" 죄송하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아. 너도 잘 알잖아. "
" ......형, 저 알바 그만 둘게요. "
엄마야. 이게 무슨 말이죠? 저랑 종이컵은 너무 놀랐어요. 그 바람에 종이컵 하나가 바닥으로 톡톡- 떨어졌어요.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하지만 우리 쪽에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네요. 다행이에요. 저는 너무 놀랍고 슬펐어요. 소년 덕분에 약국이 활기차졌고, 주인님도 내심 그런 소년을 좋게 보고 있었거든요.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그만 두다니요.. 말도 안 돼요! 주인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어요.
" 왜? "
" 저는 공부 쪽에는 연이 없나봐요. "
" 걔네들이 그래? "
" 뭐, 어느 정도 공감을 하니깐요. "
" 그래.. 좋아. 대신 알바를 그만두고 10년 동안 어떻게 살아갈건지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으면 알바 그만두게 해줄게. "
" ..... "
" 그렇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넌 마음대로 그만 못 둬. "
주인님은 바로 앞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소년에게 보여주었어요. 소년은 벙찐 얼굴로 그 종이를 바라볼 뿐이네요. 아마도 계약서인가봐요. 소년이 이 약국에서 알바를 시작한 날에 주인님이 계약서라는 것을 쓰자고 부른 적이 있었거든요. 아마... 그 때 제 기억으론 약국에서 일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여러가지 사항을 정해놓았고 이를 어길 시 소년에게 불리한 결과가 있으리란 내용이었어요. 그렇지 종이컵아? 아, 맞다. 바닥에 떨어졌지.
" 형, "
" 왜. "
" 미안해요. 걱정하게 해서. "
" 알면 다음부터 그러지 마 제발. "
" 알았어요. "
" 그리고, 너 지금 정말 잘 하고 있어. 그것도 알아야해. "
" ....... "
" 사실 너를 알게 된 것 자체가 그리 좋은 계기는 아니었잖아. 난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여주씨와 관련된 일이어서 더더욱이. "
주인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어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네요. 지금 주인님이 약국을 운영하시면서 한 번도 제 시간이 아닐 때에 문을 닫은 적이 없는데, 지금 주인님은 CLOSE 표시를 달고 약국의 조명을 끈 체 조제실 쪽 조명만 켜두었어요. 소년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에요. 주변의 것들이 보이지 않는 지금, 소년과 주인님은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겠어요.
" 솔직한 마음으론, 너가 알바를 시작하고 며칠 안 가서 제 발로 뛰쳐나갈 거라 생각했어. 너에 대한 10퍼센트도 안 되는 설마. 하는 예상이 점점 맞아든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 너를 안 좋게 보던 나 자신을 반성했지. 너처럼 좋은 아이를 내가 몰라봤었구나. 하고 말이야. "
" ..... "
" 알바랑 공부를 병행하는게 쉽지 않은 일이야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잘 해오고 있어. 너가 알다시피 나는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어서.. 뭐, 더 말 안해도 잘 알겠지만. "
" 푸흐- 그건 알다마다죠. "
" 그래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과거의 너도, 미래의 너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건 지금의 이동혁이야.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도. "
씁쓸한 미소를 짓던 소년의 얼굴이 씰룩거려요. 울음을 참고 있나봐요. 주인님은 반창고를 하나 뜯어서 툭 건네주었어요.
그러니 어줍잖은 반성은 그만하라고. 그런데에 신경쓰기에 지금의 너는 너무 괜찮은 사람이니깐.
주인님의 마지막 말을 들은 소년은 끝내 참아왔던 모든 서러움을 다 토해냈어요. 주인님은 그런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곤 말없이 약국을 나왔어요. 많이 추울텐데, 하얀 셔츠만 입은채로 나가시네요. 소년은 종소리가 들리자 아예 의자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어요.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소년을 보니 저도 울컥해요. 정처없이 흔들리고 있던 소년에게 건넨 주인님의 손을 소년은 꽉 잡은 듯 해요. 이제는 소년이 더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행복하기에도 벅찬 소년이니만큼 말이에요.
* * *
" ....민형씨, "
" 아, 여주씨. "
하나의 큰 고비를 넘고나니 마음이 풀리면서도 그간 수없이 많은 폭풍과 비바람을 맞으면서 지내온 저 아이를 더 많이 돌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후련하면서도 찝찝한 감정에 마지못해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여주씨를 만났다. 황급히 바닥에 담배를 버리려다가 일단 뒤로 숨겨 재를 털어댔다. 그리고 뒷주머니에 넣었지만 여주씨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하,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최대한 입으로 숨을 쉬어댔다. 가까이 다가오는 여주씨에 허공을 휙휙 손으로 저어대며 다가갔다.
" ...담배를 피실 줄은 몰랐어요. "
" .. 원래는 피우지 않는데, "
" 아, 아니에요. 당연히 피우실 수도 있죠. 나쁜게 아니니까요. "
" ....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
어색함속에서 대화가 흘러갔고, 종국엔 나와 여주씨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여주씨는 손에 쥐고있던 무언가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조각이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여주씨에게 남긴 쪽지였다. 나는 여주씨를 바라보았고, 내 질문을 미리 파악했는지, 여주씨가 말했다.
" ...이 편지, 못 받은걸로 하고싶어서요. "
" .......... "
" 그러니 민형씨도 없던 일로 해요. 아예 없던 일로. 저희 그래도 되겠죠?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손 안에 있는 작은 종이조각을 꽉 움켜쥘 뿐이었다.
-열두 번째 이야기, 끝-